☕ 직장 내 짝사랑 티 안 내는 법, 90일간 감정 강도를 기록해 얻은 니체와 붓다의 답

탕비실에서 커피 두 잔을 타던 날 ☕

작년 3월 12일 목요일 오후 3시쯤이었다. 탕비실에서 커피를 타고 있는데 옆 팀 준영 대리님이 들어왔다(실명은 아니고 가명이다). "저도 한 잔 같이 타드릴까요" 하고 물었는데 목소리가 이상하게 갈라져서 스스로도 당황했다. 그날 밤 일기장에 "오늘 강도 8"이라고 적었다. 강도에 숫자를 매긴 게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두 달 전부터 이미 스스로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매일 저녁 그날의 짝사랑 강도를 1부터 10까지 점수로 기록해오고 있었다.

그렇게 90일 넘게 기록을 모으고 나서야 알게 된 게 있다. 그걸 이해하는 데 니체와 불교 경전이 의외로 도움이 됐다.


일기장 90일치가 말해준 것 — 무상과 연기 📊

기록을 쭉 늘어놓고 보니 패턴이 보였다.

- 3/12(목) 강도 8 — 탕비실에서 마주쳐 대화함 - 3/13(금) 강도 3 — 하루 종일 못 봄 - 3/17(화) 강도 9 — 회식에서 옆자리 - 3/18(수) 강도 2 — 월차 써서 안 나감 - 3/24(화) 강도 7 — 메신저에 이모티콘 답장 옴 - 3/25(수) 강도 3 — 평범한 하루, 마주친 적 없음

숫자만 봐도 뭔가 이상했다. 이게 진짜 '사랑'이라는 고정된 감정이라면 매일 비슷한 수치가 나와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 사람과 직접 접촉이 있었던 날에만 수치가 튀었다. 접촉이 없는 날은 거의 항상 2~3점 사이였다.

불교의 연기(緣起) — 모든 현상은 조건에 의존해 일어난다는 개념 — 이 이 패턴을 정확히 설명한다. 열반경의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이라는 구절은 흔히 "모든 것은 변한다" 정도로 뭉뚱그려 인용되지만, 원래 맥락은 더 구체적이다. 형성된 것(諸行)은 조건이 모여서 생겼다가 조건이 흩어지면 사라지는 법(生滅法)이라는 뜻이다. 내 강도 8은 '사랑'이라는 실체가 있어서 생긴 게 아니라 탕비실 대화라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생긴 것이었다. 조건이 사라지면 수치도 같이 떨어졌다.

이걸 깨닫고 나서 달라진 건 감정을 참는 방식이 아니라 감정을 보는 시선이었다.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문장 대신 "이 대화라는 조건 때문에 지금 강도가 올라갔다"고 적기 시작했다. 조건부로 일어난 일이면 조건이 바뀔 때 알아서 가라앉는다는 걸 이미 90일치 데이터로 확인했으니까.


힘에의 의지 — 억누르는 대신 옮겨 담기 💪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자기 극복에 대하여'에서 "살아있는 것을 발견하는 곳마다 나는 힘에의 의지를 발견했다"고 썼다. 여기서 힘은 남을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자기 안의 충동을 스스로 조형하는 능력을 말한다. 억누르는 것과는 다르다. 억누르면 에너지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른 데서 삐져나온다. 내 경우엔 그 사람 SNS를 새벽까지 뒤지는 걸로 삐져나왔다.

그래서 대신 시도한 게 있다. 메신저에 답장이 오면 — 데이터상 이때가 강도 7~9로 가장 높이 튀는 순간이었다 — 바로 답장하지 않고, 마침 미뤄뒀던 엑셀 작업을 먼저 끝냈다. 이건 '인내심 훈련'이 아니었다. 그 순간 올라온 에너지를 어디로든 흘려보내야 했고, 마침 할 일이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 작업을 끝내고 다시 강도를 재보면 대부분 4~5로 내려가 있었다. 억누른 게 아니라 다른 곳에 쓴 거다.


영원회귀 — 이 선택을 무한히 반복해도 괜찮은가 🔁

영원회귀는 『차라투스트라』보다 먼저 『즐거운 학문』 341절에 나온다. 어느 악마가 찾아와 "네가 지금 사는 이 삶을 다시, 그리고 수없이 다시 살아야 한다면 어떻겠냐"고 묻는 장면이다. 이걸 짝사랑 앞에서 쓸 만한 질문으로 바꾸면 이렇다. 지금 하려는 행동을 앞으로 백 번 더 반복해도 스스로 떳떳한가.

한번은 그 대리님 자리 쪽 프린터를 일부러 쓰려고 한 적이 있다. 우연을 가장한 마주침이었다. 이 질문을 던져보니 답이 바로 나왔다. 이 행동을 백 번 반복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 떳떳하기는커녕 좀 초라했다. 반대로 회의에서 눈이 마주쳤을 때 자연스럽게 웃고 넘기는 행동은 백 번을 반복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이 차이가 기준이 됐다. 반복했을 때 초라해지는 행동은 그만두고, 반복해도 괜찮은 행동만 남겼다.


그래서 지금은 🌱

그 대리님과는 여전히 같은 회사에 다닌다. 강도는 요즘 평균 2~3점 정도로 안정됐고, 가끔 마주치면 5 정도로 튀었다가 금방 내려온다. 짝사랑이 없어진 게 아니라, 그게 조건에 따라 오르내리는 수치라는 걸 알게 됐을 뿐이다. 직장 내 짝사랑 티 안 내는 법을 찾고 있었는데, 결국 찾은 건 감정을 어떻게 보고 어디로 흘려보낼지에 대한 방법이었다. 숨기는 기술이 아니라, 조건과 반응 사이에 내가 고를 수 있는 틈이 있다는 걸 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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