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정을 없애는 게 아니라, 감정이 말 걸기 전에 멈추는 법 — 스토아 아파테이아 다시 읽다

😶 2019년 11월,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해 11월, 나는 이커머스 스타트업에서 결제 시스템을 레거시 PG사에서 새 PG사로 옮기는 마이그레이션을 맡고 있었다. 블랙프라이데이 트래픽이 몰리기 전에 끝내야 했고, 한 달 동안 새벽 1시 이후 퇴근한 날을 세어보니 스물두 번이었다. 그때 내가 진짜로 바랐던 건 야근이 끝나는 것도, 프로젝트가 성공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불안도, 짜증도, 동료에게 화가 나는 마음도 그냥 다 꺼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상태에 가까워지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감정을 죽이고 나니 오히려 실수가 늘었다. 결제 금액 단위를 잘못 옮긴 커밋을 그대로 배포했고, 롤백 순서를 착각해서 두 시간짜리 장애를 냈다. 무감각은 침착함이 아니었다. 그냥 신호를 못 듣는 상태였을 뿐이다. 몇 년이 지나 스토아철학을 다시 읽으면서, 그때 내가 착각했던 게 뭔지 알게 됐다. 🧠 스토아철학이 없애려 한 건 감정이 아니라 '정념'이었다 세네카는 「분노에 관하여(De Ira)」 2권 1~4장에서 아주 구체적인 예를 든다. 용감한 군인도 나팔 소리가 울리면 심장이 뛰고, 누구든 나쁜 소식을 들으면 얼굴이 창백해지며, 장례식에서는 눈물이 절로 난다. 세네카는 이걸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반응은 "의지가 개입하기 전에" 몸에서 자동으로 일어나는 최초의 흔들림(primi motus)이라고 못 박는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걸 '프로파테이아(propatheia)'라 불렀고, 이건 죄도 아니고 없앨 수도 없는 것이라 했다. 진짜 없애려던 건 그다음 단계, 즉 그 흔들림에 "이건 끔찍한 일이다"라는 판단이 달라붙어 부풀어 오른 상태 — '파토스(pathos)', 정념이었다. 즉 아파테이아 는 심장이 안 뛰는 상태가 아니라, 심장이 뛰는 것과 그 뒤에 붙는 이야기 사이에 틈을 유지하는 상태다. 이 틈이 없으...

💭 짝사랑 감정일기 쓰는법: 니체의 영원회귀와 불교 십이연기로 마음 뜯어보는 39일의 기록

😵‍💫 카톡 하나에 무너지던 39일 작년 6월 14일부터 7월 22일까지, 정확히 39일을 세어봤다. 그 사람 얘기가 일기에 나온 날이 31일. 안 나온 날이 8일뿐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선명한 날이 하나 있다. 7월 3일, 오후 2시 17분에 톡을 보냈는데 답이 온 게 밤 9시 41분. 그 일곱 시간 24분 동안 나는 핸드폰을 열아홉 번 확인했다. 실제로 메모장에 시간을 적어가며 셌으니까 안다. 그날 일기엔 이렇게 썼다. "바쁜가. 아니면 아까 보낸 말이 이상했나. 아니면 그냥 나한테 관심이 없나. 근데 관심이 없으면 왜 지난주엔 먼저 연락했지." 이 세 문장을 나는 그 뒤로도 형태만 바꿔서 백 번쯤 반복했다. 감정이 아니라 알고리즘 같았다. 입력값이 '무응답'이면 출력값은 늘 같은 세 문장. 이 반복을 멈춘 게 감정일기였다. 정확히는, 일기를 쓰면서 내가 매번 같은 회로를 돌고 있다는 걸 '본' 게 시작이었다. 🌀 니체라면 이 반복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 341절에서 악마의 입을 빌려 이렇게 묻는다.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너는 다시 한번, 그리고 수없이 다시 한번 살아야만 할 것이다. (…) 모든 것이 동일한 순서와 연관 속에서 되돌아올 것이다."(안성찬·홍사현 옮김, 책세상, 2005)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절망으로 무너지느냐, 아니면 "너는 신이다"라고 답할 만큼 그 삶을 긍정하느냐가 영원회귀의 핵심이다. 솔직히 처음 이 구절을 짝사랑에 대입했을 때는 좀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카톡 무응답 일곱 시간을 영원히 반복해도 좋다고 말할 수 있나? 그런데 일기를 다시 읽으면서 깨달은 건, 내가 두려워한 건 그 감정 자체가 아니라 '이런 나'를 인정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말한 원한(ressentiment)은 바로 이 지점을 찌른다. 원한을 품은 자는 자기 고통의 원인을 바깥...

🤐 나는 왜 또 손을 들지 않았을까: 파르레시아와 회의실에서 삼켜버린 말들의 정치학에 대한 단상

💳 결제 모듈, 3주, 그리고 들지 않은 손 작년 여름, 다니던 스타트업에서 앱 리뉴얼 프로젝트 킥오프 회의가 있었다. 팀장이 화면에 간트 차트를 띄우고 말했다. "3주 안에 결제 모듈까지 끝내자." 개발자 두 명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PG사 연동만 붙여봐도 API 문서 검토에 인증 테스트, 정산 로직 확인까지 보통 열흘은 잡아먹는다는 걸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절반은 알고 있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말을 안 했다. 팀장이 "다들 괜찮죠?"라고 물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프로젝트는 결국 6주 만에 끝났다. 3주가 아니라. 회의가 끝나고 복도에서 동료 개발자가 슬쩍 말했다. "그거 3주 안에 되겠어요?" 나는 "글쎄요, 빡빡하긴 하죠"라고 답했다. 회의실 안에서는 하지 못한 말을 복도에서는 했다. 이 낙차가 나는 계속 마음에 걸렸다. 🗣️ 파르레시아 , 목이 걸린 채로 하는 말 고대 그리스에 파르레시아(parrhesia)라는 말이 있다. 미셸 푸코가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에서 여러 번 다룬 개념인데, 그냥 '표현의 자유'로 번역하면 오히려 핵심을 놓친다. 푸코가 강조한 지점은 이거다. 파르레시아는 발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발언하는 사람이 그 말 때문에 위험을 감수한다는 데 있다. 신하가 왕에게 직언할 때, 그 말이 왕의 심기를 건드려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데도 하는 말. 위험 부담이 없는 발언은 파르레시아가 아니다. 이 정의를 회의실에 그대로 옮겨보면 이상하게 잘 들어맞는다. 내가 그 킥오프 회의에서 "3주는 무리입니다"라고 말하는 데 드는 비용은 뭐였을까. 목이 달아나진 않는다. 하지만 팀장 앞에서 초를 치는 사람, 협조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찍힐 위험은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분기 평가에서 '협업 태도' 항목에 그 장면이 어떤 식으로든 반영될 거라는 계산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머릿속에 있었다. ...

💔 정서적 허기 때문에 채워지지 않는 사랑을 반복할 때, 니체와 불교가 가리킨 서로 다른 길

🌃 새벽 두 시, 아직 못 지운 대화방 2021년 3월, 새벽 두 시. 나는 그때 나눈 카톡을 아직도 갤러리 구석에 캡처해서 저장해두고 있다. 등산 동호회에서 만난 J였다. 대화는 이렇게 끝난다. 나: 우리 이게 무슨 사이인지 물어봐도 돼 읽음 표시만 뜨고 답은 오지 않았다. 사실 그건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J는 나흘씩 연락을 끊었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밥 먹었어?"로 돌아오곤 했다. 나는 그 나흘 동안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고, 그가 돌아오면 화를 낼 힘도 없이 안도부터 했다. 그 안도감이 진짜 문제였다는 걸 그땐 몰랐다. 🔁 다른 얼굴, 같은 리듬 J 다음에 만난 사람은 회사 동료의 소개로 알게 된 사람이었다. 넉 달을 만나는 동안 그는 딱 세 번, 약속을 당일에 취소했다. 그중 한 번이 내 생일이었다. 저녁 7시 약속을 잡아두고 오후 6시에 "회사일 때문에 못 갈 것 같아 미안"이라는 문자가 왔다. 나는 화장까지 마친 채로 침대에 앉아 휴대폰만 봤다. 자정이 넘어 케이크 이모티콘과 "생일 축하해ㅎㅎ"가 왔을 때, 이상하게도 서운함보다 안도가 먼저 왔다. 다음날이면 나는 그 섭섭함을 거의 다 잊고 있었다. 그리고 올해 6월, 소개팅으로 만난 사람. 이번엔 알아차리는 데 이 주밖에 안 걸렸다. 먼저 연락하고, 답이 빨랐다가 사흘씩 잠잠해지고, 다시 연락이 오면 반가움이 앞서는 그 리듬. 나는 이번엔 그가 잠잠해지기 전에 먼저 연락을 끊었다.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후로 나흘간 나는 이유 없이 손이 떨리듯 휴대폰을 확인했다. 끊어낸 건 나였는데, 몸은 여전히 그 리듬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성격도, 연락 빈도도, 만난 계기도 다 달랐다. 공통점은 딱 하나, 사라졌다가 돌아오는 리듬이었고 그 리듬이 돌아올 때마다 내 안에서 뭔가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 애착이론으로는 설명이 끝나지 않았다 이쯤 되면 흔히 나오는 답은 애착이론이다. 나는 불...

🪙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파산 시 내 돈은 안전할까? 예금자보호법 적용 여부 완벽 총정리 가이드

🪙 코인베이스 앱에서 본 87센트, 그리고 내가 몰랐던 질문 2023년 3월 11일 토요일, 코인베이스 앱을 열었더니 USDC가 1달러가 아니라 0.87달러에 찍혀 있었다. 실리콘밸리은행(SVB)이 전날 폐쇄됐고, USDC 발행사 서클이 400억 달러 넘는 준비금 중 33억 달러를 하필 그 은행에 넣어둔 게 문제였다. 그때 내가 정말 궁금했던 건 "USDC가 다시 1달러가 될까"가 아니었다. "만약 서클이 진짜로 망했으면, 내 USDC는 스테이블코인 예금자보호 여부 로 지켜졌을까"였다. 찾아보니 답은 훨씬 복잡했고, 그 복잡함 안에 진짜 알아야 할 내용이 있었다. 🏦 예금자보호는 보험, 코인 보유는 '줄서기'다 예금자보호법은 은행이 망하면 정부(예금보험공사)가 1인당 5천만 원까지 대신 갚아주는 보험 상품이다. 스테이블코인에는 이런 보험이 없다. 대신 발행사가 파산하면 코인 보유자는 파산법정에서 '몇 번째 줄에 서는 채권자인가'라는 완전히 다른 문제와 마주한다.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발행사가 보유한 준비금(reserve)이 발행사의 일반 자산인지, 아니면 코인 보유자를 위해 법적으로 분리·신탁된 자산인지. 둘째, 코인 보유자가 다른 채권자와 동등한 '일반채권자'인지, 아니면 그 준비금에 대해서만큼은 남들보다 먼저 받아가는 '우선채권자'인지다. SVB 사태에서 USDC가 살아난 것도 이 두 가지가 우연히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서클의 준비금은 SVB에 예치된 계좌 자체가 서클 명의로 분리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재무부·연준·예금보험공사가 2023년 3월 12일 일요일 저녁 SVB와 시그니처은행 예금 전액을 보증하겠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다음 날인 13일 월요일 아침 서클이 남은 준비금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USDC는 다시 1달러로 돌아왔다. 즉 USDC를 구한 건 스테이블코인을 위한 법이 아니라, 은행 예금자를 구제한 정책 결정의 부수 효과였...

💔 짝사랑 상대 SNS 눈팅 새벽까지 끊는 법, 니체와 부처에게 물었더니 둘 다 틀렸다고 했다

🌙 새벽 두 시, 같은 사진을 열두 번째 보고 있었다 작년 가을, 나는 짝사랑하던 사람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새벽 두 시에 열두 번째로 새로고침하고 있었다. 새로 올라온 것도 없었다. 열한 번째와 완전히 똑같은 화면이었다. 그런데도 엄지손가락은 화면을 위로 끌어올렸다. 이게 습관인지 병인지 구분이 안 될 즈음, 나는 니체와 불교를 동시에 펼쳐 들었다. 답을 찾으려던 게 아니라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이름이라도 붙이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두 철학은 정반대의 처방을 내렸다. 니체는 "그 욕망, 억누르지 말고 긍정하라"고 했고 불교는 "그 갈애가 너를 태우고 있다, 꺼뜨려라"고 했다. 처음엔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한참 들여다보니 둘 다 나한테 해당 안 되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 힘에의 의지라기엔, 나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니체가 말한 힘에의 의지는 자기 극복이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나은 방식으로 존재하려는 충동. 문제는 스토리를 새로고침하는 그 순간 내가 극복하고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는 거다. 좋아요를 누를지, 답장을 할지, 새 사진을 올릴지 — 전부 상대가 결정하는 일이었고 나는 그 결정을 확인하는 사람이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이런 상태를 정확히 짚어낸 적이 있다. 원한(ressentiment)이라는 반응적인 힘.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외부의 자극에 반응만 하는 상태다. 스토리 새로고침이 딱 그거였다. 나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다. 그저 상대가 뭘 했는지 확인하고, 그걸로 하루의 감정 온도를 정했다. 니체를 빌려서 내 행동을 정당화하고 싶었는데, 니체가 먼저 나를 저격하고 있었다. 🔥 갈애를 끊으라는데, 나는 갈애조차 정직하지 않았다 불교 쪽은 더 단호하다. 십이연기에서 갈애(taṇhā)는 집착으로, 집착은 괴로움으로 이어진다. 처방은 명확하다. 원인을 끊으면 결과도 끊긴다. 그런데 이것도 나한테는 반쪽짜리 진단이었다. 갈애가 성립하려면...

🌊감정을 없애지 않고도 무너지지 않는 법 — 폭풍우 속 창백해진 스토아 철학자와 아파테이아

📞 해지방어팀에서 보낸 11개월 카드사 콜센터 해지방어팀에서 11개월을 일했다. 하는 일은 단순했다. 해지하겠다는 고객에게 전화가 넘어오면, 이런저런 혜택을 안내하며 최대한 붙잡는 것. 그러니 전화를 건 사람은 애초에 기분이 좋을 리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통을 아직도 기억한다. 남자였고, 연회비 문제로 화가 나 있었다. 내가 매뉴얼대로 "고객님, 정말 죄송합니다. 확인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너 이름 뭐야. 내가 게시판에 올릴 거야. 니들 같은 애들이 무슨 상담이야." 통화는 4분쯤 이어졌다. 전화를 끊고 나서 손이 떨리는 걸 느꼈는데, 헤드셋에서는 벌써 다음 콜이 대기 중이라는 알림음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숨 한 번 쉬고 톤을 한 옥타브 올려 "안녕하세요, 고객님" 하고 받아야 했다. 그 시절 나는 이걸 "감정을 죽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틀렸다. ⛵ 폭풍우 속에서 창백해진 철학자 로마의 문헌학자 아울루스 겔리우스는 『아티카의 밤』 19권 1장에서 이런 일화를 남겼다. 배를 타고 항해하던 한 스토아 철학자가 갑작스러운 폭풍우를 만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동승객들이 놀리듯 물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더니, 왜 그렇게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소?" 철학자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안색이 변하고 몸이 움츠러드는 건 판단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러운 반응이며, 이성이 진짜로 흔들려서 "이 배는 곧 침몰할 것이고 나는 끝장이다"라고 스스로에게 동의해버리는 것과는 다른 문제라고. 이 구분이 나는 "사건과 판단 사이에 틈이 있다"는 익숙한 문장보다 훨씬 유용했다. 스토아 철학은 감정을 세 겹으로 나눈다. 프로파테이아(propatheia), 즉 몸이 먼저 놀라는 첫 반응. 파테(pathē), 그 반응에 "이건 재앙이다"라는 잘못된 판단이 들러붙어 굳...

📔 짝사랑 관찰 일기법: 억누르는 대신 매일 기록하며 마음을 지켜본 이유, 흰곰 실험의 교훈

🐻 억누르려다 더 커진 마음, 그래서 기록을 택했다 작년 9월, 옆 팀 디자이너 J를 좋아하게 됐다는 걸 인지한 날,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생각하지 않기"였다. 회의실에서 마주칠 것 같으면 일부러 다른 층 화장실로 돌아갔고, 메신저 상태 메시지가 바뀌면 못 본 척했다. 그런데 이게 딱 반대로 작동했다. 안 보려고 애쓸수록 J의 커피잔, 걸음걸이, 회의 자료를 넘기는 손가락 같은 게 더 또렷하게 떠올랐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건 심리학에서 이미 이름이 있는 현상이었다. 대니얼 웨그너가 1987년에 한 "흰곰 실험"—피험자에게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흰곰 생각이 더 자주 떠오른다는 연구—이 정확히 이 구조를 설명한다. 억제는 그 대상을 감시하는 별도의 인지 과정을 필요로 하고, 그 감시 자체가 대상을 계속 활성 상태로 붙잡아둔다. 나는 "J를 생각하지 말자"고 결심하는 순간마다 J를 검색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방향을 반대로 틀었다. 억누르지 말고, 대신 매일 저녁 J에 대해 본 것과 느낀 것을 노트에 적었다. 단 규칙 하나: 관찰과 해석을 같은 줄에 쓰지 않는다. 📝 관찰과 해석을 가르는 기술 — 파빤짜라는 오래된 이름 노트는 두 칸으로 나눴다. 왼쪽엔 "본 것", 오른쪽엔 "생각한 것". 10/3: (관찰) J가 회의 중 내 발표 자료에 메모를 세 번 남겼다 / (해석) 나한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닐까 10/17: (관찰)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J가 먼저 인사했다 / (해석)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음, 이게 신호라고 믿고 싶었음 11/20: (관찰) J가 다른 팀원과 점심 약속을 잡는 걸 들었다 / (해석) 괜히 서운했다, 근거 없이 배신감까지 느꼈다 이 작업을 두 달쯤 반복하면서 알게 된 건, 왼쪽 칸은 매번 몇 줄로 끝나는데 오른쪽 칸은 매번 문단이 됐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늘 빈약했고, 내가 거기에 붙인 이...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을 공자가 '덕을 훔치는 도둑'이라 부른 이유: 향원(鄕原)의 정체

🤔 "그 사람 진짜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이 걸릴 때 몇 년 전 팀에 박 과장이라는 분이 있었다. 신입이던 나한테 제일 먼저 커피를 사준 사람도, 야근하는 날 야식을 시켜준 사람도, 팀장 험담을 하는 사람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는 사람도 다 그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사람이 낸 의견이 뭐였는지, 그 사람이 반대한 안건이 있었는지를 도무지 기억할 수가 없다. 3년을 같이 일했는데도. 최근에 논어를 다시 읽다가 ' 향원(鄕原) 논어 '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얼굴이 박 과장이었다. 딱히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왜 그 이름이 떠올랐는지, 그게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다. 😠 공자가 콕 집어 미워한 딱 한 유형 논어 양화편에 이런 구절이 있다. "鄕原, 德之賊也(향원, 덕지적야)." 향원은 덕을 훔치는 도둑이라는 뜻이다. 공자가 평생 미워한 인물 유형은 많지 않다. 소인은 자주 등장하지만, 소인은 그냥 사람이 못됐다고 하면 끝이다. 그런데 향원은 다르다. 마을(鄕)에서 다들 좋다(原, 愿)고 인정하는 사람, 즉 동네에서 평판 좋은 그 사람을 콕 집어 도둑이라 부른 거다. 나쁜 사람보다 좋은 척하는 사람을 더 미워했다는 얘기인데, 처음 읽으면 좀 이상하다. 착하다는데 왜. 🎭 맹자가 풀어준 그 답, "사이비"라는 말의 기원 이 궁금증을 풀어준 건 맹자다. 진심 하편에서 만장이 공자가 왜 향원을 미워했는지 묻자 맹자가 답한다. "비지무거야, 자지무자야(非之無擧也, 刺之無刺也)" — 비난하려 해도 딱히 들 흠이 없고, 꼬집으려 해도 꼬집을 게 없다. 세속에 동조하고 더러운 세상에 영합하며, 있는 모습은 충직하고 신실한 것 같고, 행동은 청렴한 것 같아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스스로도 옳다 여기지만, 요순의 도에는 절대 함께 들어갈 수 없다는 거다. 그래서 덕의 도둑이라 했다는 것. 그리고 여기서 나온 표현이 "사이비(似而非)" ...

💔 3년간의 짝사랑에서 내가 놓친 건 마음이 아니라 '관계 문해력'이었다는 뒤늦은 깨달음들

💔 2019년 겨울, 세 번째 거절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첫 번째는 2019년 3월이었다. "오빠, 나 진짜 좋은 사람인 거 알아. 근데 그런 감정은 아니야." 문장은 분명했다. 그런데 나는 그걸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엔 모른다"는 뜻으로 바꿔 읽었다. 두 번째는 2020년 여름이었다. "그냥 우리 이대로 편하게 지내면 안 될까?" 나는 이걸 여지로 읽었다. 편하게 지내자는 말이 곧 거리를 두자는 말이라는 걸, 그때는 정말 몰랐다. 세 번째는 2021년 12월이었다. "미안해.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이번엔 더 읽을 게 없었다. 그제야 나는 앞의 두 번이 이미 답이었다는 걸 알았다. 3년 동안 나는 같은 문장을 세 번이나 다르게 오독했다. 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가 1993년 『성격 및 사회심리학 저널』에 발표한 짝사랑 연구(Baumeister, Wotman & Stillwell, "Unrequited Love",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64(3))는 이 상태를 "스크립트리스니스(scriptlessness)"라고 불렀다. 짝사랑하는 쪽에게는 이 상황을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회적 대본이 없다는 것이다. 고백-교제-이별에는 대본이 있지만, 고백-거절-그래도-계속-좋아함에는 대본이 없다. 그래서 나는 매번 같은 신호를 처음 보는 것처럼 다시 오독했다. 🤔 니체가 정말 "해석만 있다"고 말했을까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해석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문장은 니체가 책으로 낸 적이 없다. 그가 1886~87년 무렵 남긴 유고 노트의 한 단편이고, 사후에 여동생 엘리자베트 푀르스터니체와 페터 가스트가 편집한 『권력에의 의지』에 481번으로 실렸다. 니체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 책의 편집 자체가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다....

😳짝사랑 티 안 내는 표정 관리법 완벽정리 — 니체와 붓다에게 배우는 마음 숨기기 심리학 노하우

😳 회의실에서 얼굴이 빨개졌던 그날 몇 달 전, 팀 회의 중에 그 사람이 갑자기 제 이름을 부르며 의견을 물었어요. 별일 아니었는데 저는 순간 목까지 빨개지고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옆자리 동료가 "왜 그래, 긴장했어?"라고 물어봤을 때 저는 그제야 깨달았어요. 아, 나 지금 티가 나는구나. 표정은 생각보다 정직해서, 마음을 숨기려 할수록 오히려 더 크게 새어 나오더라고요. 그날 이후로 저는 표정을 '숨기는' 게 아니라 '다스리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을 뜻밖에도 니체와 불교에서 찾았어요. 🔥 억누르면 왜 더 티가 날까 — 니체의 힘에의 의지 니체는 감정을 억압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그는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 동력을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라 불렀는데, 이는 억누른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방향을 바꿔서라도 반드시 표출된다는 뜻이었어요. 짝사랑 티 안내는 표정 관리법 도 똑같습니다. "티 내면 안 돼"라고 스스로를 다그칠수록 얼굴 근육은 오히려 더 부자연스럽게 굳고, 시선은 더 자주 그 사람 쪽으로 도망칩니다. 억압은 통제가 아니라 통제력의 상실이에요. 니체식 해법은 억누르는 게 아니라 '승화(Sublimierung)'입니다. 감정을 없애려 하지 말고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바꾸는 거죠. 실전에서는 이렇게 적용해봤어요. 그 사람이 말을 걸 때 얼굴 근육에 힘을 주는 대신, 그 순간 에너지를 손끝이나 발끝, 즉 몸의 다른 부위로 흘려보내는 겁니다. 저는 회의 중 긴장되면 펜을 살짝 쥐는 손에 힘을 주는 식으로 감정을 '분산'시킵니다. 얼굴에 몰리던 힘이 다른 곳으로 빠지니 표정이 한결 덤덤해지더라고요. 🌊 우연히 마주쳤을 때 — 무상(無常)과 집착 내려놓기 복도에서, 엘리베이터에서, 편의점에서. 짝사랑 상대와 우연히 마주치는 순간은 늘 예고 없이 옵니다. 이때 표정이 무너지는 이유는 단순해요. 우...

🏋️ 아크라시아: 알면서도 못하는 이유,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답한 의지박약의 정체와 극복법

💸 27만원짜리 헬스장, 여섯 번 다닌 계산 작년 3월 둘째 주, 나는 네 번째로 같은 헬스장 앱을 지웠다. 정확히 세어보니 2019년부터 끊은 회원권이 넷, 그중 가장 오래 다닌 것도 두 달을 못 채웠다. 마지막 계약은 3개월에 27만원, 실제로 간 건 여섯 번이었다. 한 번 갈 때마다 4만 5천원씩 낸 셈이다. 문제는 몰라서가 아니었다. 나는 근력 운동이 왜 필요한지, 유산소가 대사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남들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다. 관련 책도 열 권 넘게 읽었다. 그런데도 저녁 9시, 소파에 앉는 순간이 오면 그 지식은 전혀 힘을 못 썼다. 아는 것과 하는 것 사이에 뭔가 끊어져 있었다. 🎭 소크라테스의 도박: 그건 착시일 뿐이다 이 틈을 처음 정면으로 다룬 사람이 소크라테스다.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 352b 이후를 보면 그는 꽤 대담한 주장을 편다. 알면서 나쁜 쪽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은 사실 몰랐을 뿐이다. 근거는 이렇다. 사람이 물건의 실제 크기를 눈대중으로 잘못 재듯이, 가까이 있는 쾌락은 부풀려 보고 멀리 있는 대가는 쪼그라들어 보인다. 담배 한 대의 즐거움은 지금 눈앞에 있어서 크게 보이고, 폐암의 위험은 30년 뒤에 있어서 작게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이걸 순전히 거리의 착시라고 봤고, 해법도 간단했다. 정확히 재는 기술, 그가 말한 '측정의 기술'만 있으면 착시는 교정되고, 교정되고 나면 누구도 나쁜 쪽을 고르지 않는다. 그럼 헬스장을 안 가는 나는 운동의 가치를 정확히 몰랐던 것뿐이라는 얘기다. 듣기엔 위안이 되는데, 어딘가 석연치 않다. 📖 아리스토텔레스: 배우가 시를 외우듯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위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7권에서 그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드러난 사실과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못 박는다. 그가 보기에 아크라테스, 알면서 못 하는 사람은 대전제는 갖고 있다. '단 음식은 살찌운다'는 걸 안다. 문제는 그 순간 눈앞의 케이크를 향해 ...

💔 짝사랑 티 안 내는 법: 회의실에서 들킨 마음, 니체와 붓다에게 배우는 감정 다스리는 법

💭 11월 화요일, 회의실에서 들켜버린 마음 2024년 11월 12일 화요일, 오후 2시 프로젝트 리뷰 회의였다. 다른 팀 UX 디자이너 L이 발표를 시작하자마자 나는 노트북 화면 대신 그 사람 손짓을 보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동기 J가 커피를 뽑으며 무심하게 물었다. "너 지난 세 번 회의에서 L 얘기만 메모했더라. 좋아하냐?" 나는 "그냥 그 팀 작업 방식이 궁금해서"라고 답했는데, 스스로도 그 대답의 어설픔을 느꼈다. 티가 났던 거다. 그날 집에 오는 길에 나는 이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하다가, 이상하게도 니체와 불교 경전을 다시 펼쳤다. 연애 상담이 아니라 철학책에서 답을 찾으려 한 건, 감정을 숨기는 기술보다 감정을 대하는 태도가 먼저 틀렸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 낙타, 사자, 어린아이 — 니체가 말한 감정을 다루는 세 단계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 "세 가지 변신에 대하여"에서 정신이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변한다고 썼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명령에 복종하는 단계다. 나는 처음엔 낙타였다. "짝사랑은 티 내면 안 된다"는 명령을 그대로 짊어지고, 회의 때마다 표정을 관리하는 걸 의무처럼 수행했다. 사자는 그 명령에 "나는 원한다"고 맞서 싸우는 단계다. 여기서 많은 자기계발 콘텐츠가 멈춘다.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당당하게 표현하라"는 식으로. 하지만 니체가 정말 강조한 건 그다음, 어린아이의 단계다. 어린아이는 "신성한 긍정"이며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다. 억압도 발산도 아니라, 그 감정 자체를 원료 삼아 새로운 놀이를 창조하는 것.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는 감정을 참거나 터뜨리는 이분법이 아니라, 그 힘을 다른 형태로 빚어내는 능력을 말한다. 『선악의 저편』 13절에서 ...

🏠함께 살아도 냉장고는 따로 썼다, 에피쿠로스 정원학교가 알려주는 공동체 생활의 오랜 지혜

🧊 냉장고 칸 하나 때문에 시작된 이야기 2019년 봄, 서울 합정동의 4층짜리 셰어하우스에 6개월쯤 산 적이 있다. 방 다섯 개짜리 집에 다섯 명이 살았고, 냉장고는 한 대, 칸은 다섯 개로 나뉘어 있었다. 문제는 그 칸이 균등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제일 위 칸을 쓰던 사람 — 편의상 민석이라고 하자 — 이 야식을 자주 시켜 먹으면서 자기 칸이 부족하다고 아래 칸까지 슬금슬금 넘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배달 온 치킨 상자 하나였다가, 나중엔 각종 반찬통이 쌓였다. 결국 집주인이 중재에 나서서 칸마다 이름표를 붙이는 걸로 끝났는데, 그 이름표 하나 붙이는 데 두 달이 걸렸다. 부엌 하나, 냉장고 하나를 같이 쓰는 것과 그 안의 칸까지 완전히 섞는 것 사이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었다. 같이 사는 건 됐는데, 뭘 같이 쓰고 뭘 따로 둘지에 대한 합의가 없으니까 매번 부딪혔다. 🌿 "정원"은 코뮌이 아니었다 에피쿠로스 얘기가 나오면 보통 원조 미니멀리스트, 최초의 코리빙 공동체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틀린 말은 아닌데, 정작 핵심은 다른 데 있다. 기원전 306년쯤 에피쿠로스는 아테네 성벽 바깥 한적한 곳에 땅을 사서 학교 겸 거주 공간을 차렸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10권에서 전하는 바로는 이 땅값이 80미나였다고 한다. 1미나가 100드라크마이니 8천 드라크마, 숙련 노동자 일당이 1드라크마 안팎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상당한 액수다. 즉 에피쿠로스 개인이 자기 돈으로 땅을 매입한 것이지, 제자들이 돈을 모아 공동 소유한 게 아니었다. 이 지점이 피타고라스 학파와 결정적으로 다르다. 피타고라스 공동체는 재산을 완전히 공유하는 걸 원칙으로 삼았던 걸로 유명한데, 에피쿠로스 정원학교 는 그러지 않았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대화하되, 소유권은 각자의 것으로 남겨뒀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그대로 옮겨 적은 에피쿠로스의 유언장(10권 16~21절 부근)을 보면 이 구조가 얼마나 꼼꼼하게 설계...

💬 문자 한 통에 세 시간 매달린 밤, 나는 내 감정조차 읽지 못했다: 연애 감정 문해력 이야기

📱 그 문자 하나를 스무 번 다시 읽던 밤 2021년 11월, 벌써 5년 전이다. 그 사람한테서 "오늘 좀 피곤하다ㅠ 담에 얘기하자"라는 문자를 받고 나는 세 시간을 매달렸다. 답장이 늦은 것도 아니었다. 내가 보낸 지 8분 만에 왔다. 그런데도 나는 그 문장을 캡처해서 다시 읽고, 친구한테 보내서 "이게 무슨 뜻 같아?"라고 물었다. 친구는 "그냥 피곤한가보지"라고 했다. 나도 알았다. 근데 그 말이 위로가 안 됐다. 진짜 궁금했던 건 그 사람 마음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으니까. 나는 화가 난 건지, 서운한 건지, 아니면 그냥 불안한 건지조차 구분을 못 하고 있었다. 세 시간 동안 붙잡고 있었던 건 문자가 아니라 이름 없는 감정 덩어리였다. 🏷️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은 왜 더 아픈가 심리학자 리사 펠드먼 배럿은 저서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서 "감정 입자도(emotional granularity)"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같은 불쾌한 상태를 두고도 누군가는 그냥 "기분 나쁘다"로 뭉뚱그리고, 누군가는 "서운하다, 불안하다, 자존심 상한다"를 구분해서 느낀다는 것이다. 배럿이 토드 카쉬단과 함께 발표한 연구(Kashdan, Barrett & McKnight, 2015, Current Directions in Psychological Science )에 따르면, 부정적 감정을 세분화해서 느끼는 사람일수록 스트레스 상황에서 술을 마시거나 화를 표출하는 즉각적 반응 대신 더 나은 대처 전략을 고르는 경향이 있었다. 감정을 구분하는 능력 자체가 대처 능력과 연결된다는 뜻이다. 나는 그날 밤 "피곤하다ㅠ"라는 여섯 글자에 화, 불안, 자격지심을 다 욱여넣고 있었다. 그중 뭐가 진짜인지 몰랐으니 어느 것도 처리하지 못했다. 그냥 뭉쳐서 세 시간을 버틴 거다. 🧠 니체라면 이 감정을 '의지'라고 불렀을 것...

⚠️ 퇴직연금 디폴트옵션 재승인, 안 하면 정말 그대로 유지될까? 만기 도래 후 실제 겪은 일

💬 문자 한 통 받고 그냥 넘기려고 했던 이유 작년 여름, 다니는 회사 퇴직연금 사업자(증권사 DC형 계좌)한테서 문자가 왔다. "귀하의 사전지정운용방법(디폴트옵션) 만기가 도래합니다. 별도 지시가 없으면 기존 방법대로 자동 운용됩니다." 처음엔 그냥 넘겼다. 2년 전 가입할 때 이미 상담받고 골랐던 상품인데, 뭘 또 확인하라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자동 운용"이라는 말이 계속 걸렸다. 자동으로 되는 거면 왜 굳이 문자를 보냈을까. 결국 약관이랑 퇴직연금 사업자 안내 페이지,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조문까지 뒤져봤다. 📜 재승인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약관까지 뒤져봤다 퇴직연금 디폴트옵션 재승인 제도는 2023년 7월 12일부터 시행됐다. DC형과 개인형IRP 가입자가 대상이고, DB형은 해당 없다. 사업자는 지정된 상품의 만기가 다가오면 가입자에게 사전 통지할 의무가 있고, 가입자가 그 기간 안에 별도 지시를 하지 않으면 '기존에 지정했던 것과 동일한 상품'으로 재매수된다. 즉 재승인을 안 해도 계좌가 텅 비거나 임의로 다른 상품에 편입되는 일은 없다. 여기까지는 문자 내용 그대로였다. 문제는 "동일한 상품으로 재매수"라는 문구가 상품 종류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걸 그때까진 몰랐다는 거다. 🔄 원리금보장형과 로드맵형, 만기가 도래했을 때 완전히 다르게 움직인다 내 계좌엔 정기예금형(원리금보장형) 디폴트옵션이 지정돼 있었다. 이 경우 "동일 상품 재매수"는 같은 은행의 같은 정기예금 상품에 새로 가입하는 것과 같다. 즉 이자율은 2년 전 가입 당시 금리가 아니라 만기 재예치 시점의 새 금리로 다시 계약된다. 내 경우 처음 가입할 땐 3.8%대였는데, 만기가 돌아온 시점엔 3.2%대로 내려가 있었다. 기준금리가 그사이 내려갔으니 당연한 결과였는데도, "재승인 안 해도 그대로 유지된다"는 문구만 보고 금리까지 그대로일 거라 넘겨짚...

💌 짝사랑이 티 안 나던 순간들, 니체의 힘에의 의지와 붓다의 마음챙김에서 뜻밖의 답을 찾은 이유

🪟 회의실 창가 자리, 3초의 침묵이 알려준 것 작년 7월 22일 화요일 오후 2시, 신제품 런칭 프로젝트 마무리 회의였다. 창가 자리에 앉은 그 사람이 발표 자료 마지막 장을 넘기다가 잠깐 멈칫했다. 딱 3초쯤이었을 거다. 화면을 보는 척했지만 사실 나는 그 사람의 손끝, 넘기다 만 페이지 모서리만 보고 있었다. 그 3초를 기점으로 나는 뭔가 달라졌다는 걸 알았다. 문제는 그날부터였다. 어떻게 하면 이 마음을 들키지 않고 그 자리에, 그 프로젝트에, 그 팀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을까. 8월 한 달 내내 나는 이 질문을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답은 연애 칼럼이 아니라 니체와 불교 경전에서 왔다. 처음엔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는데, 9월 초부터 11월 말까지 석 달 가까이 그 사람과 매주 화요일 같은 회의실에 앉으면서, 오히려 그 두 사유가 제일 실용적이었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 💪 힘에의 의지, 감정을 참는 게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힘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자기극복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하는 곳마다 힘에의 의지를 발견했다." (니체전집, 정동호 역, 책세상) 그가 말한 힘에의 의지는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자기 안의 에너지를 어디로 흘려보낼지 스스로 결정하는 힘이다. 나한테는 이 개념이 이렇게 적용됐다. 8월 셋째 주부터 나는 회의 전 15분씩 발표 자료를 미리 훑어보는 습관을 만들었다. 감정을 억누르려고 한 게 아니라, 그 에너지를 자료 준비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긴 거였다. 회의 중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2초쯤 유지한 뒤 다음 발표자로 자연스럽게 넘기는 식으로 흐름을 만들었다. 참는 게 아니라 그 힘을 다른 곳에 쓰는 것, 이게 힘에의 의지가 짝사랑에 알려준 첫 번째 기술이었다. ♾️ "이 삶을 다시, 무수히 다시 살아야 한다면" — 영원회귀가 물은 것 니체의 영원회귀는 『즐거운 학문』 341절에...

💰 예금자보호 한도 1억 믿고 1억6천만원 통장 4개로 쪼갠 실전 후기, 숫자로 꼼꼼히 정리해봤습니다

작년 초에 부모님 댁 정리하면서 제 앞으로 1억 6천만원 정도가 들어왔어요. 처음엔 별생각 없이 주거래은행 창구에 가서 정기예금에 다 넣으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창구 직원이 "이 정도 금액이면 몇 군데 나눠서 넣으시는 분들 많아요"라고 툭 던진 말이 걸려서 그날 밤부터 검색을 시작했고, 결국 통장 4개로 쪼갰습니다. 그 과정에서 숫자, 헷갈렸던 부분, 시행착오를 최대한 구체적으로 남긴 예금자보호 한도 분산예치 실전 후기 입니다. 🏦 왜 하필 4군데였나 — 한도가 올랐는데도 안 합친 이유 제가 계좌를 나누기 시작한 건 2025년 초, 예금자보호 한도가 아직 5천만원이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그해 9월 1일부로 한도가 1억원으로 올랐죠. 뉴스 보고 "그럼 이제 두 군데면 충분하겠네" 싶어서 통장을 합칠까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근데 안 합쳤어요. 이유가 두 가지예요. 첫째, 이자소득이 연 2천만원을 넘으면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이 됩니다. 제 예금 전체의 세전 이자를 합치면 연 500만원 안팎이라 당장 걸리는 건 아니지만, 만기가 한날한시에 겹치면 그해 다른 소득(퇴직금 운용 수익 등)이랑 합산될 때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세무사 지인 조언을 들었어요. 그래서 만기를 일부러 분산시켰습니다. 둘째, 한도가 1억으로 올랐다고 해도 "그 은행이 진짜 괜찮은지"는 별개 문제잖아요. 저축은행 중에서도 BIS비율이나 연체율 낮은 곳만 골랐는데, 한 곳에 다 몰아넣기엔 여전히 찜찜하더라고요. 최종적으로 넣은 곳은 이렇습니다. 주거래 하나은행 12개월 정기예금에 5천만원(가입 당시 금리 3.35%), OK저축은행 12개월 정기예금에 5천만원(3.85%), 케이뱅크 코드K 정기예금에 3천만원(3.6%), 그리고 집 근처 신협에 3천만원을 넣었어요. 🏛️ 신협 계좌 하나 만드는데 몰랐던 것들 신협 계좌는 그냥 은행 가듯 가면 안 되더라고요. 조합원 가입부터 해야 하는데, 출자금 명목으로 3만원을 따로 내야 조합원...

🎲 도덕적 운: 가스불 끄고 나온 날, '살인자'라 부르는 순간 우리는 다른 걸 하고 있다

🔥 가스불을 켜놓고 나온 날 재작년 가을, 연희동에서 반지하 자취를 할 때였다. 김치찌개를 올려놓고 편의점에 담배를 사러 나갔다가, 계산대 앞에서 친구 전화를 받고 그대로 십오 분을 떠들었다. 방에 돌아와 문을 여는 순간 났던 그 탄내를 아직도 기억한다. 냄비 바닥은 새까맣게 눌어붙어 있었고, 손잡이는 만질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그날 아무 일도 없었다. 불이 나지 않았으니까. 다음 날 출근해서 이 얘기를 웃으며 했다. "나 완전 덜렁이야." 그걸로 끝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 십오 분 사이에 화재가 나서 옆집까지 번졌다면, 나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업무상실화죄로 기소되는 사람이 됐을 거다. 내가 한 행동은 정확히 똑같다. 가스불을 켜놓고 나갔다는 것. 달라지는 건 오직 그 십오 분 동안 세상에서 벌어진 일뿐이고, 그건 내 통제 밖에 있었다. 😔 죄책감이 아니라 '떠안음' 버나드 윌리엄스가 1976년 논문 「 도덕적 운 」에서 든 예는 사실 술 취한 운전자가 아니라 트럭 운전사다. 아무 잘못도 없이 규정 속도로, 신호도 지키며 운전하던 트럭 기사 앞에 아이가 갑자기 뛰어든다. 기사는 브레이크를 밟을 새도 없다.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그는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윌리엄스가 주목한 건 바로 그 지점이다. 비난받을 이유가 없는데도, 이 사람은 평생 그 순간을 안고 산다. 윌리엄스는 이걸 죄책감(guilt)과 구별해서 'agent-regret(행위자적 회한)'이라고 불렀다. 죄책감은 "내가 잘못했다"는 판단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 트럭 기사가 느끼는 감정은 판단이 아니라 사실에서 나온다. 자기 손이, 자기 발이, 그 사건의 한가운데 있었다는 사실.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는 명제와 "나는 그 일을 저질렀다"는 명제가 그의 안에서 동시에 참이고, 이 둘은 서로를 지우지 못한다. 내 가스불 얘기가 웃음으로 끝난 건 결과가 나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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