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티인컴 배당 30% 원천징수당한 이유, 리츠(REIT) 외국납부세액공제 신청 실전 후기

😱 배당내역서에 30%라고 찍혀 있길래 소름 돋았던 날 5월 종합소득세 신고를 준비하면서 키움증권 영웅문S# 앱에서 해외주식 배당내역서를 뽑았다. 애플, 코카콜라는 익숙한 15%가 찍혀 있는데 리얼티인컴(O) 배당 항목만 30%로 원천징수돼 있었다. 처음엔 반사적으로 "아 W-8BEN 만료됐구나" 하고 넘어가려 했다. 실제로 3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서류라 깜빡하기 쉽고, 나도 한 번 갱신 시기를 놓친 적이 있어서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앱에서 [해외주식] > [해외주식 마이페이지] > [세금/서류] 들어가서 W-8BEN 상태를 확인해보니 유효기간이 2027년까지로 멀쩡했다. 그럼 왜 30%가 뗐을까 하다가 리얼티인컴이 리츠(REIT)라는 걸 뒤늦게 떠올렸다. 🔍 범인은 W-8BEN이 아니라 리츠 배당의 소득 성격이었다 리츠 배당은 한 덩어리가 아니다. 미국 세법상 리츠 분배금은 크게 경상배당(ordinary dividend), 자본이득배당(capital gain distribution), 원본반환(return of capital) 세 가지로 나뉘는데, 조세조약상 15% 우대세율은 원칙적으로 경상배당에만 적용된다. 자본이득배당이나 원본반환 성격으로 분류되면 조약 혜택을 못 받고 30% 원천징수되는 경우가 있다. 문제는 이 분배금 성격이 배당 지급 시점에 확정되지 않는다는 거다. 리츠는 회계연도가 끝나야 각 분배금이 실제로 어떤 소득이었는지 정산해서 1099-DIV로 확정 통지한다. 그래서 리얼티인컴 같은 경우 지급 시점엔 일단 30%로 보수적으로 원천징수했다가, 연말 정산 후 실제 경상배당 비중만큼 15%로 재조정해서 초과분을 돌려주는 방식을 쓴다. 내 경우 4월 배당분에서 30% 뗐던 게 5월 초 정정(코렉션) 내역서가 올라오면서 15% 기준으로 재계산됐고, 초과 원천징수분은 증권사에 환급 요청을 넣은 지 영업일 기준 7일 만에 계좌로 들어왔다. 만약 이 정정을 기다리지 않고 30% 기준 그대로 신고했으면 이후 경정...

💘 짝사랑 상사병 극복법 총정리, 니체의 소유욕과 화살경 무상함에서 배우는 마음 정리 실천법

🌙 새벽 세 시, 프로필 사진만 스무 번 눌러본 밤 작년 가을이었다. 회사 근처 카페에서 몇 번 마주친 사람 하나 때문에 두 달을 앓았다. 정확히는 앓았다는 말도 부족하다. 회의 중에 그 사람 목소리가 떠올라서 발표 자료를 세 번 다시 읽었고, 퇴근길엔 그 사람이 자주 간다던 편의점 앞을 일부러 돌아서 걸었다. 우습게도 정작 대화는 세 번 나눈 게 전부였다. 새벽 세 시에 프로필 사진을 스무 번쯤 눌러보다가, 이게 사랑이 아니라 병이라는 걸 인정했다. 그즈음 짝사랑 상사병 극복법 을 검색하다 다시 집어든 책이 니체의 『즐거운 학문』이었고, 오래전 절에서 들었던 화살 비유가 자꾸 겹쳐 떠올랐다. 💔 니체는 사랑을 낭만이 아니라 소유욕이라고 불렀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 14절에서 성애(性愛)를 '소유하려는 갈망'이라고 정의한다. 상대의 몸뿐 아니라 영혼까지 무조건적으로 손에 넣으려는 충동, 그게 니체가 본 사랑의 민낯이다. 낭만적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결국 상대를 나의 세계 안에 편입시키려는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의 한 갈래라는 것이다. 이 관점으로 보면 짝사랑이 유독 괴로운 이유가 선명해진다. 소유하고 싶은데 소유할 방법이 아예 차단돼 있으니, 그 힘은 갈 곳을 잃고 안으로 파고들어 나를 갉아먹는다. 흥미로운 건 니체 자신도 이 화살을 정통으로 맞았다는 사실이다. 1882년 니체는 친구 파울 레를 통해 루 살로메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했다. 이후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극심한 고독과 분노를 토로했고, 그 시기 써내려간 글들에는 유독 원한(르상티망)과 자기 극복이라는 주제가 짙게 배어 있다. 철학자도 이 감정 앞에서는 그저 한 사람이었다는 게, 나는 오히려 위안이 됐다. 🏹 화살은 한 번만 맞아도 된다 불교에는 살라숫따, 흔히 '화살경'이라 불리는 경전이 있다.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화살을 맞으면 아프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그 화살을 맞고 나서 스스로에게 두 번째 화살을...

💰DC형 퇴직연금 실물이전 방법 총정리, 해지 안 하고 증권사로 계좌 옮긴 실전 경험 후기

💸 퇴직연금 계좌, 팔아서 옮기려다 손절할 뻔했던 이야기 작년에 다니던 회사 퇴직연금이 은행 DC형으로 방치되어 있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수익률도 별로고, 상품 라인업도 제가 원하는 ETF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증권사로 옮기려고 알아봤는데, 처음엔 당연히 "해지하고 현금으로 받아서 다시 넣어야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그렇게 하면 그 시점에 보유하고 있던 펀드나 ETF를 전부 매도해야 하고, 매도 타이밍이 안 좋으면 손실 확정, 게다가 재예치까지 며칠씩 공백이 생겨서 그 사이 시장이 오르면 고스란히 손해예요. 그때 알게 된 게 ' 퇴직연금 실물이전 방법 '이었습니다. 보유 상품을 팔지 않고 그대로 계좌만 옮기는 방식인데, 저처럼 이미 물려 있는 상품이 있거나 매도 타이밍을 피하고 싶은 분들에게 꼭 필요한 제도예요. 📑 실물이전이 뭔지부터 정리하면 기존에는 퇴직연금을 다른 금융회사로 옮기려면 무조건 보유 자산을 전부 현금화한 뒤 이전해야 했어요. 그런데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시행령 개정으로 실물이전 제도가 도입되면서, DC형과 IRP 계좌에 한해 상품을 매도하지 않고 계좌 자체를 그대로 옮길 수 있게 됐습니다. 다만 여기 함정이 하나 있는데, '이전받는 증권사에서도 동일한 상품을 취급하고 있어야' 실물이전이 가능하다는 점이에요. 예를 들어 제가 A은행 DC 계좌에서 삼성전자 ETF와 미래에셋 펀드를 갖고 있었는데, 옮기려는 B증권사에서 그 펀드를 취급하지 않으면 그 부분만 강제로 현금화됩니다. 원리금보장상품(예적금)도 대부분 실물이전이 안 돼서 만기까지 기다리거나 중도해지 후 이전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 제가 실제로 밟았던 절차 순서 1. 이전받을 증권사 계좌 개설 — 저는 미래에셋증권 DC 계좌를 새로 텄어요. 회사 퇴직연금 사업자로 등록돼 있는 증권사여야 하니, 먼저 회사 인사팀에 "우리 회사가 어떤 증권사와 DC 계약이 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게 순서예요. ...

🍰 알면서도 왜 못할까: 아크라시아, 새벽의 치즈케이크가 던진 2400년 된 오래된 질문과 답

```html 🌙 새벽 세 시, 치즈케이크 앞에서 작년 12월 3일, 인바디 검사를 받고 나온 다음 날이었다. 72.4kg. 목표는 4kg 감량, 두 달 안에. 그렇게 다짐한 지 나흘째 되던 밤,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둔 채로 치즈케이크 한 조각을 이미 입에 넣고 있었다. 포크를 든 손이 움직이기 전에 머릿속에서는 이미 계산이 끝나 있었다. "이거 먹으면 이틀치 노력이 날아간다." 알고 있었다. 정확히, 숫자까지 계산할 만큼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먹었다. 이 흔한 장면에 이름을 붙인 사람이 2400년 전에 이미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걸 아크라시아 (ἀκρασία), 흔히 '의지의 나약함'이라 번역하는 상태라고 불렀다. 그런데 재밌는 건, 아리스토텔레스 본인도 이 개념을 설명하다가 스스로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막다른 골목이야말로 이 글에서 진짜 하고 싶은 얘기다. 🤔 소크라테스는 왜 "알면서 짓는 죄"를 부정했나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먼저 이 문제를 건드린 건 소크라테스였다.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단호하게 말한다. 누구도 알면서 나쁜 것을 향해 가지 않는다고. 나쁜 줄 아는 사람이 그걸 선택한다면, 그건 사실 몰랐던 거라고. 앎이 진짜 앎이라면 그 앎은 행동을 지배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이게 그 유명한 '주지주의(intellectualism)'다. 솔직히 말하면 이 주장은 좀 얄밉다. 치즈케이크를 삼키던 그 순간의 나에게 "너는 사실 몰랐던 거야"라고 말하면, 나는 웃을 것 같다. 나는 분명히 알았다. 계산까지 했다니까.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7권에서 스승뻘 되는 이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이 주장은 명백히 드러난 현상들과 충돌한다"고, 그는 꽤 단호하게 적는다(7권 2장, 1145b21 근처). 인간은 실제로 알면서도 저지른다. 문제는 '안다'는 게 도대...

💔짝사랑 유통기한 계산법: 니체와 불교가 결국 같은 질문을 던지는 이유, 새벽 카톡의 진실

🌙 새벽 1시, 문장 하나를 세 번째 읽었다 새벽 1시, 카톡 대화창을 위로 올리고 있었다. 11월 3일 그 사람이 보낸 "밥 먹었어?" 여섯 글자를 다시 읽는 중이었다. 세 번째였다. 마침표도 물음표도 없이 툭 끝난 그 문장을 두고 '이건 관심이다', '그냥 예의다', '어쩌면...' 세 가지 버전의 해석을 만들어냈다. 정작 내가 붙들고 있던 건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여섯 글자였다는 걸 한참 뒤에 알았다. 지나고 보니 그건 일종의 짝사랑 유통기한 계산법 이었다. 이 얘기를 꺼내는 건 그 새벽의 행동에 이름을 붙이고 싶어서다. 소가 삼킨 풀을 게워내 다시 씹듯, 나는 몇 달째 지나간 문장 하나를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그 되새김질에 정확히 2년 8개월을 썼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나를 붙잡아준, 혹은 붙잡고 놔주지 않은 두 철학자가 있었다. 니체와 붓다다. 재밌는 건 이 둘이 서로를 별로 안 좋아했다는 사실이다. ⚔️ 니체가 불교를 "허무주의"라고 부른 이유 니체는 『안티크리스트』에서 불교를 꽤 정면으로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불교는 삶을 부정하는 종교였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 욕망 자체를 꺼버리자는 태도, 그게 니체 눈에는 삶으로부터의 도피처럼 보였다. 그는 정반대를 원했다.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 즉 고통을 없애는 게 아니라 고통을 딛고 넘어서는 힘. 그 정점에 영원회귀라는 사고 실험이 있다. 『즐거운 학문』에 나오는 유명한 질문이다. 지금 이 삶을, 이 고통까지 포함해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영원히 반복해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짝사랑에 이 질문을 들이대면 무섭다. 그 새벽의 스크롤, 세 번 읽은 문장, 답 없는 3일을 무한히 반복해도 나는 "그래, 좋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니체식으로 보면 여기서 "아니"라고 답하면서도 관계를 놓지 못하는 상태, 그게 그가 경멸한 원한(ressentiment)이다. 원...

💔 짝사랑이 원한(르상티망)으로 변하는 순간: 니체와 붓다가 알려주는 마음의 비밀과 인문학적 통찰

💔 짝사랑이 미움으로 바뀌던 그 순간 대학교 2학년 겨울, 같은 동아리에 반년 넘게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었다. 매주 화요일 정기모임 끝나고 다 같이 술 마시러 가는 자리에서, 그 사람 옆자리가 비어 있으면 일부러 늦게 도착한 척하고 앉는 식이었다. 그해 12월 종강 회식 자리에서 취기를 빌려 고백했고, 돌아온 답은 "오빠는 진짜 좋은 사람인데 우리 이렇게 지내는 게 더 편할 것 같아"였다. 문자도 아니고 카톡도 아니고, 노래방 화장실 앞 복도에서 들은 말이었다. 이상한 건 그다음이었다. 처음 며칠은 그냥 우울했는데, 한 2주쯤 지나니까 그 사람이 밉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회의 때 발언하는 방식이 거슬리고, 다른 사람한테는 웃으면서 나한테는 예의만 차리는 것 같고, 나중엔 "쟤 원래 좀 계산적이었잖아"라는 말을 술자리에서 은근슬쩍 흘리고 다녔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반년을 좋아하다가 한 달 만에 "계산적인 애"로 재분류해버린 거니까. 이 낙차가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니체 르상티망 짝사랑 이라는 키워드로 다시 찾아보다가 이름을 발견했다. ⚖️ 르상티망, 손댈 수 없는 것을 나쁜 것으로 만드는 재주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말하는 르상티망(ressentiment)은 단순히 "미워하는 감정"이 아니다. 핵심은 방향이 거꾸로 뒤집힌다는 데 있다. 힘 있는 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먼저 긍정하고, 거기서 부족한 것을 나중에 "나쁜 것"으로 규정한다. 반대로 원한을 품은 자는 순서가 뒤바뀐다. 손에 넣지 못한 대상을 먼저 "저건 원래 나쁜 것"이라고 못박고, 그걸 근거 삼아 자기 자신을 정당화한다. 내가 했던 일이 정확히 이거였다. "그 사람을 못 가졌다"는 사실 자체는 바꿀 수 없으니, 그 대신 "그 사람은 원래 별로였다"는 서사를 만들어낸 거다. 노예의 도덕이 강자의 미덕을 뒤집어 "겸손...

💔 짝사랑이 아플 때 니체와 부처를 소환하는 이유: 권태기가 알려주는 사랑의 철학적 의미와 태도

📱 3년 전, 답장 없는 카톡을 보다가 한 사람을 1년 넘게 혼자 좋아한 적이 있다. 매일 그 사람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확인하고, 별 뜻 없는 답장 한 줄에 하루 기분이 결정되던 시기였다. 그때 나는 이 감정이 부끄러웠다. "왜 이렇게 못 놓지, 왜 이렇게 집착하지" 하면서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러다 우연히 니체의 책과 불교 경전을 거의 동시에 붙잡고 읽었는데, 신기하게도 이 두 완전히 다른 사유 체계가 짝사랑이라는 유치해 보이는 감정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었다. 하나는 그 감정을 긍정하라 하고, 하나는 그 감정을 놓으라 한다. 이 글은 그 사이에서 내가 찾은 태도에 관한 것이다. 🧘 불교: 짝사랑의 고통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에서 온다 불교의 핵심 개념 중 하나가 무상(無常)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뜻이다. 감정도, 상대의 마음도, 나의 마음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짝사랑을 할 때 우리는 정반대의 짓을 한다. "이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형태로 감정을 고정시킨다. 초기 불교 경전인 『담마빠다』에는 "집착에서 슬픔이 생기고, 집착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집착에서 자유로운 이에게는 슬픔도 두려움도 없다"는 구절이 있다. 짝사랑의 고통을 뜯어보면 사실 상대를 향한 사랑 자체보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나의 기대와 그게 무너질 때의 낙차가 더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답장이 늦으면 불안한 것도, 그 사람의 SNS를 강박적으로 확인하는 것도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 만드는 반응이다. 불교는 이걸 없애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이것도 지나간다"는 사실을 자각하라고 한다. 그 자각만으로도 감정의 밀도가 달라진다. 🔥 니체라면: 그 마음도 힘에의 의지다, 부끄러워하지 마라 여기서 니체는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들어온다. 니체는 인간의 근원적 충동을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라고 불렀다. 이는 단순한 권력욕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확장...

💔 짝사랑 상대가 갑자기 연락을 끊은 진짜 이유, 47일간 인스타그램으로 직접 확인한 결과

📱 47일째 읽씹, 그리고 내가 실제로 확인한 것들 작년 10월 둘째 주 화요일이 마지막이었다. "오늘 회식이라 늦을 듯ㅎㅎ 낼 연락할게"가 마지막 메시지였고, 그다음 날도, 그다음 주도 답은 오지 않았다. 처음 일주일은 무슨 사고라도 났나 걱정했고, 둘째 주부터는 화가 났고, 셋째 주부터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카톡 대화창을 위로 스크롤하며 하나하나 복기했다. 그러다 2주간 매일 밤 그 사람 인스타그램 스토리와 프로필 사진을 캡처해서 날짜별로 모아봤다. 결과는 명확했다. 스토리는 거의 매일 올라왔고, 프로필 사진도 한 번 바뀌었고, 다른 친구 게시물에는 댓글도 달았다. 그런데 내 카톡만 회색 숫자 1이 사라지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이게 의미하는 건 하나다. 그는 바쁘지 않았다. 사고도 아니었다. 그냥 나한테만, 정확히 나한테만 반응을 멈춘 거였다. 이 발견이 나를 편하게 해주진 않았지만, 적어도 "혹시 무슨 일 있나"라는 헛된 걱정은 끝냈다. 🤔 흔히 말하는 세 가지 이유, 그리고 그게 전부가 아닌 이유 연애 상담 커뮤니티를 뒤지면 이유는 대개 세 가지로 수렴한다. 다른 사람이 생겼거나, 정말 바빴거나(위 캡처처럼 이건 대부분 핑계로 밝혀지지만), 흥미가 식었거나. 문제는 이 세 가지가 전부 '그가 왜'에 대한 설명이라는 점이다. 나는 이 틀 자체가 틀렸다고 본다. 짝사랑 상대 갑자기 연락두절 이유 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대부분 실패하는데, 이유는 우리가 그의 동기를 알아내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람 내면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은 그가 말해주지 않는 한 영원히 추측일 뿐이다. 내가 캡처로 확인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왜'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했는가'였다. 그거면 충분했다. 🧩 회피형 애착이라는 렌즈 — 그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침묵의 구조를 설명하는 것 심리학자 킴 바솔로뮤가 정리한 성인 애착 네 유형 중 회피형은 갈등이나 거절의 부담이 예상되는 순간 관...

🍂 밑으로 끌려 내려가는 마음에게: 시몬 베유가 말한 중력과 은총, 지친 마음을 위한 회복법

🌙 화요일 밤 11시, 배포 버튼을 누르고 나서 작년 가을, 10개월 끌던 앱 리뉴얼 프로젝트를 화요일 밤 11시에 배포했다. 마지막 커밋을 올리고 나니 몸이 텅 빈 캔처럼 가벼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노트북을 덮고 눕기는커녕, 40분 뒤 다시 열어서 다음 분기 할 일 목록을 만들고 있었다. 딱히 급한 일도 아니었다. 그냥 뭐라도 계획해두지 않으면 불안했다. 그 다음 사흘도 마찬가지였다. 퇴근하면 저녁마다 새 할 일을 하나씩 추가했는데, 나중에 세어보니 그중 실제로 다음 달까지 필요했던 항목은 하나도 없었다. 쉬어야 할 몸이 대신 계획을 만들고 있었다는 게, 그때는 이상하다고 느끼지도 못했다. 📖 베유가 "중력"이라는 단어를 가져온 이유 『중력과 은총』은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가 1943년 서른네 살에 죽은 뒤, 생전에 쓴 노트(cahiers)를 귀스타브 티봉이 추려 1947년에 처음 묶어낸 책이다. 원래 완결된 논증서가 아니라 단상 모음이라, 티봉이 직접 "중력과 은총", "공백과 보상" 같은 제목을 붙여 장을 나눴다. 책의 첫 문장으로 알려진 구절은 이렇다. > "Tous les mouvements naturels de l'âme sont régis par des lois analogues à celles de la pesanteur matérielle. La grâce seule fait exception." 내가 옮기면 "영혼의 모든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물리적 중력과 유사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은총만이 예외다" 정도가 된다. 번역서마다 표현이 조금씩 다를 수 있으니 정확한 어감은 원문 대조가 필요하지만, 핵심 구도는 분명하다. 욕망, 불안, 자기주장 같은 것은 사과가 떨어지듯 저절로 아래로 끌려간다는 것. 노력해서 만드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작동한다는 것. 🕳️ 공백을 못 견디는 게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부터가 ...

💌 짝사랑 편지지 문구 고르는 법: 니체와 부처를 만났던 세 시간, 첫 문장과의 사투 기록

✏️ 편지지 앞에서 세 시간, 첫 문장은 왜 안 써지는가 작년 12월 초, 연희동 골목의 작은 문구점 '종이의 계절'에서 크림색 편지지 세트를 샀다. 8,900원짜리였다. 마음에 둔 사람에게 뭔가 쓰고 싶었는데, 짝사랑 편지지 문구 고르는 법 을 아무리 뒤져봐도 정작 책상 앞에 앉으니 첫 문장에서 막혔다. 1차 초고는 이랬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요즘 부쩍 추워졌네요." 써놓고 바로 지웠다. 회사 단체 메신저에 올려도 아무도 이상하게 안 볼 문장이었다. 안전하다는 건 알겠는데, 안전하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이 문장은 아무것도 걸지 않았다. 상대가 나를 기억하든 안 하든 상관없는 문장, 즉 내가 세계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겠다고 선언한 문장이었다. 🔥 니체의 힘에의 의지: 문장은 세계를 움켜쥐는 행위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 259절에서 삶 자체를 이렇게 규정한다. "삶 자체는 본질적으로 자기 것이 아닌 것의 전유, 침해, 이질적이고 약한 것의 제압, 억압, 가혹함, 자기 형식의 강요, 동화, 그리고 적어도 가장 온건하게 말해도 착취다." 불편한 문장이다. 그런데 이 불편함이 정확히 내 편지지 앞에서 벌어지던 일이었다. 1차 초고를 지운 이유를 다시 보면, 나는 상대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 문장을 썼던 것이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나는 힘을 행사하지 않았다. 내 인상, 내 기억,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봤는지를 세계에 새기지 않고, 그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형식을 빌려왔다. 그건 안전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2차 초고를 다시 썼다. "지난달 회의 끝나고 혼자 남아서 자료 정리하시던 모습, 그게 계속 생각났어요." 이건 전유였다. 그 사람의 한 장면을 내 기억 속에 붙잡아두고, 그걸 문장으로 세계에 각인시키는 일. 니체가 말한 착취라는 단어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자기 형식의 강요'는 맞았다. 나는 그 사람의 한순간을 내 방식대로 ...

💌 짝사랑 편지 예절, 상대에게 부담 주지 않고 마음을 전하는 정성스런 글쓰기 방법 총정리

🌙 편지지를 세 번 고쳐 쓴 밤 스물두 살 겨울, 학교 앞 문구점에서 편지지를 세 번 다시 산 적이 있다. 종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었다. 써놓은 첫 문장 때문이었다. "이 편지 읽고 나면 답장 좀 해줘." 다시 읽어보니 그 한 줄이 편지 전체를 바꿔놓고 있었다. 좋아한다는 말이 아니라 부탁으로, 부탁이 아니라 거의 조건처럼 읽혔다. 결국 그 문장을 지웠다. 그런데 지우고 나니 이상하게 더 무서웠다. 답장을 요구하지 않으면 이 마음이 허공에 뜬 채로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였다. 그날 밤 알게 된 게 있다. 짝사랑 편지 예절 은 맞춤법도, 문장력도 아니고, 상대에게 응답의 의무를 지우지 않는 것이더라는 것. 📮 "답장 주세요"가 왜 실례인가 편지에 답장을 요구하는 순간, 그 편지는 선물이 아니라 청구가 된다. 받는 사람은 이제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 내 마음을 받아주거나, 내 마음을 대놓고 거절하거나. 좋아하지 않는데 무시하기도 미안하고, 그렇다고 만나줄 마음도 없는 사람에게 나는 "답을 달라"는 숙제를 내준 셈이다. 고전 서간문화에서 이걸 실례로 여긴 이유도 비슷하다. 조선시대 편지, 특히 마음을 전하는 사적인 서한에서는 상대의 답신 유무를 편지의 성패로 삼지 않았다. 편지는 화자의 심경을 정리해 전달하는 행위 자체로 완결됐다. 답이 오면 다행이고, 오지 않으면 그저 그 편지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읽씹"에 그렇게 예민한 건, 편지(혹은 메시지)를 보내는 순간부터 이미 상대의 반응까지 내 마음의 일부로 계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계산을 걷어내는 게 예절의 시작이다. 📜 이옥봉, 쫓겨나고도 편지를 보낸 여자 16세기 조선의 여성 시인 이옥봉의 이야기가 있다. 서녀로 태어난 그는 문신 조원(趙瑗)의 소실이 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받는다. 다시는 시를 짓지 말라는 것. 그런데 억울하게 옥에 갇힌 이웃의 남편을 위해, 이옥봉이 대신 탄원의 시를 지어 ...

💌 받은 사랑은 갚지 않아도 된다 — 관계 부채감이 알려준 사랑의 진짜 의미와 관계의 무게감

📸 사흘 걸려 만든 포토북과 "고마워, 잘 쓸게" 3년 전 겨울, 짝사랑하던 사람의 생일에 포토북을 만들어 준 적이 있다. 인화점에서 사진을 고르고, 그 사람과 나눴던 대화 캡처를 편집해서 페이지마다 배치하고, 표지는 직접 가죽 커버를 사서 씌웠다. 작업 시간만 얼추 사흘, 자정 넘어까지 앉아 있던 날도 있었다. 건넬 때 그 사람의 반응은 "와 고마워, 잘 쓸게"였고, 포장도 풀지 않은 채 가방에 넣었다. 그게 다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그 사람의 카톡 답장 속도를 재기 시작했다. 이모티콘 하나가 붙었는지, 물음표로 끝나는 문장인지, 지난번보다 답장이 짧아졌는지를 계산기 두드리듯 따졌다. 사흘의 노동을 들였으니 그만큼의 관심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감각이 몸에 붙어버렸다. 그 감각, 즉 관계 부채감 에 이름을 붙이고 싶어서 니체와 불교를 오래 뒤졌는데, 결과적으로 알게 된 건 두 사상이 "봐, 내 말이 맞지" 하고 나란히 맞장구쳐주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지점에서 나를 찔러온다는 사실이었다. 💰 "죄"라는 말은 원래 "빚"이었다 — 니체가 뒤진 회계장부 니체는 『도덕의 계보』 제2논문에서 아예 회계 용어로 시작한다. 4절에서 그는 독일어 "Schuld(죄)"가 "Schulden(빚)"이라는 지극히 물질적인 단어에서 파생됐다고 지적하며, 도덕의 가장 오래된 뿌리가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계약 관계라고 못박는다. 갚지 못한 자는 벌을 받는데, 그 벌이란 채권자가 채무자의 몸이나 자유, 목숨의 일부를 뜯어가는 대가 관계였다는 것이다. 6절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통을 가하는 행위 자체가 채권자에게 쾌감을 준다고 말한다. 갚지 못한 빚은 고통으로 정산된다는 논리다. 내가 답장 속도를 재던 그 행위를 이 틀에 넣어보면 소름 끼치게 들어맞긴 한다. 사흘의 노동=빚, 미지근한 반응=미상환, 그리고 내가 느낀 서운...

💔짝사랑 티 안 내는 법, 니체와 붓다가 알려주는 감정을 숨기는 서로 다른 방법 완벽 총정리

3개월 동안 스물두 번, 나는 프사를 확인했다 📱 작년 가을, 같은 스터디에 있던 사람을 좋아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고, 어느 순간 카톡 프사가 바뀌면 알림도 없이 알아챘다는 사실만 남아 있다. 나중에 대화 목록을 세어보니 프사를 확인한 게 스물두 번이었다. 스터디가 끝나고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자기 전에, 아침에 눈뜨자마자. 짝사랑 티 안내기 에 애쓸수록 오히려 더 자주 확인하게 되는 이상한 순환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감정을 누르는 것과 그냥 흘려보내는 것, 뭐가 다른 걸까. 답을 찾다가 니체와 불교로 갔다. 그런데 이 둘이 하는 말이 생각보다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니체는 불교를 오독했다 — 그 근거 📚 니체가 불교를 좋아했다는 건 유명한 얘기다. 『안티크리스트』에서 그는 불교를 기독교보다 우위에 두면서 "리얼리즘의 종교"라고 부른다. 죄의식이나 신에 대한 공포 없이 고통을 있는 그대로 다루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던 거다. 문제는 니체가 이 불교를 어디서 배웠느냐다. 프레니 미스트리(Freny Mistry)는 1981년 저작 『Nietzsche and Buddhism: Prolegomenon to a Comparative Study』에서 니체가 팔리어 경전을 직접 읽은 기록이 없다고 지적한다. 그가 불교를 접한 경로는 대부분 쇼펜하우어의 저작과, 헤르만 올덴베르크가 1881년에 쓴 『붓다』 같은 2차 자료였다. 로버트 모리슨도 1997년 옥스퍼드에서 낸 『Nietzsche and Buddhism』에서 비슷한 지적을 한다. 쇼펜하우어는 불교의 열반을 '의지의 완전한 소멸', 거의 허무에 가까운 상태로 읽었는데, 니체는 이 프레임을 그대로 물려받아 불교를 '수동적 니힐리즘'으로 규정해버렸다는 거다. 실제 초기 불교 경전이 말하는 열반은 소멸이 아니라 갈애의 소멸이다. 대상이 다르다. 이게 왜 짝사랑이랑 상관있냐면, 니체식으로 이 감정을 다루면 '욕망을...

💰파킹통장 대신 CD금리 ETF 갈아타기, 비상금 1000만원 6개월 세후로 실제 정산해봤다

💰 비상금 1000만 원, 반은 그대로 두고 반만 옮겨본 이유 작년 말에 케이뱅크 플러스박스 앱을 켰다가 우대금리가 또 내려간 걸 보고 짜증이 났다. 처음 가입했을 땐 2.5%였는데 어느새 2.3%까지 내려와 있었다. 기준금리가 계속 인하되는 흐름이니 당연한 거긴 한데, 문제는 이게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몇 달 간격으로 계속 깎인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비상금 전부를 성격 다른 상품으로 옮기는 건 겁이 나서, 비상금 2000만 원 중 1000만 원은 파킹통장에 그대로 두고 나머지 1000만 원만 CD금리 ETF로 옮겨서 딱 6개월 돌려봤다. 결과를 세전 말고 세후로, 그것도 실제로 통장에 찍힌 숫자로 정리해본다. 📉 파킹통장 금리, 알고 보니 계속 깎이고 있었다 옮기기로 결심한 진짜 이유는 금리 하락 자체보다 "조건부 우대금리"였다. 플러스박스는 광고에 붙는 최고금리와 내가 실제로 받는 금리가 다른 구조다. 나는 6개월 동안 우대금리 구간이 두 번 조정되는 걸 겪었다. 처음 3개월은 연 2.5%, 이후 3개월은 연 2.3%로 낮아졌다. 은행 앱 공지 하나로 금리가 뚝 떨어지는 걸 보면서 이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 CD금리 ETF가 파킹통장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이유 이것이 이번에 직접 시도해본 단기채 ETF 파킹통장 대체 다. 옮긴 곳은 TIGER CD금리투자KIS(합성)(357870)다. 이 ETF는 분배금을 따로 주지 않고 91일물 CD금리를 매일 반영해서 기준가(NAV)가 조금씩 올라가는 구조다. 그래서 예금처럼 이자를 받는 느낌이 아니라 주식처럼 사고팔아서 차익을 실현하는 방식이 된다. 여기서 세금 오해를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런 채권형 ETF는 매매차익이 양도소득이 아니라 배당소득으로 과세되고, 그것도 매도 시점에 전체 보유기간 동안의 상승분을 한 번에 배당소득세 15.4%로 떼는 '보유기간과세' 방식이다.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자가 아니면 크게 걱정할 부분은 아니지...

📱 손가락이 화면을 누르기 전, 에픽테토스의 스토아 철학이 알려주는 아침 루틴, 그 찰나의 훈련

⏰ 7월 22일 화요일, 알람을 끄자마자 벌어진 일 지난 7월 22일 화요일 아침 6시 40분, 알람을 끄자마자 손이 먼저 움직였다. 화면에 뜬 건 예전 팀장이 보낸 카카오톡이었다. "내일 회의 자료 아직 안 왔는데 확인 부탁드려요." 퇴사한 지 넉 달째인 회사에서, 후임자가 나를 참조로 넣은 채 보낸 메시지였다. 화가 난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순간부터 나는 30분 내내 어떻게 답할지, 왜 아직도 나를 참조에 넣는지를 생각했다. 그날 하려던 원고는 손도 못 댔다. 이 사소한 사건 때문에 다시 스토아 철학 아침 루틴 을 찾아, 에픽테토스를 펼쳤다. 이번엔 흔히 인용되는 첫 문장 말고, 그다음을 읽었다. 📖 "우리에게 달린 것" 다음 문장이 진짜다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 1장은 "세상에는 우리에게 달린 것과 달려 있지 않은 것이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스토아 자기계발 콘텐츠 어디를 가도 이 문장이 나온다. 그런데 그 문단 바로 뒤에, 훨씬 덜 인용되는 대목이 있다. "거친 인상이 떠오를 때마다 즉시 스스로에게 말하라. 너는 그저 인상일 뿐, 네가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다." 이 구절이 중요한 이유는, 스토아 철학이 실제로 훈련시키는 지점이 '통제 가능/불가능 분류'가 아니라 그 이전 단계이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걸 판타시아(인상)와 슁카타테시스(동의)로 나눠 불렀다. 카카오톡을 보는 순간 내 안에서 일어나는 건 이미 하나의 해석이다. "또 나를 귀찮게 하네"라는 판단은 인상 자체가 아니라 내가 그 인상에 이미 동의해버린 결과다. 통제이분법 체크리스트는 동의가 끝난 다음에 "이건 내 통제 밖이니 신경 끄자"라고 사후 처리하는 것이고, 에픽테토스가 훈련하라고 한 건 동의하기 전, 인상을 인상으로만 붙잡아두는 그 찰나다. 순서가 다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기계발서를 쓴 적이 없다 ...

🍂짝사랑 티 안 내는 법, 니체와 붓다에게 물어본 마음 숨기기와 감정 다스리는 법, 연애 심리 총정리

💔 짝사랑, 들키는 순간 게임 끝이라고 믿었던 나 작년 12월부터 2월까지, 8주짜리 스터디에서 매주 토요일 오전에 만난 사람이 있었다. 합정역 근처 스터디카페, 창가 자리, 늘 15분 일찍 와서 노트북을 펴놓고 있던 사람. 스터디 총무를 맡고 있어서 공지도 그 사람이 올렸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공지 알림이 뜨는 순간 심장이 한 번 내려앉는 걸 느끼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 그걸 숨기는 데 완전히 실패하고 있었다는 거다. 발표 끝나고 "저번 자료 잘 봤어요" 한마디를 들으면 그 말만 붙잡고 일주일을 살았다. 카톡 답장은 원래 3분 안에 하다가 갑자기 40분씩 재기 시작했다. 실제로 스터디 끝나고 친구가 "너 걔 볼 때 표정이 달라져"라고 말했을 때, 나는 부정도 못 했다. 그때부터 진지하게 짝사랑 티 안 내는 법 을 찾기 시작했다. 그 즈음에 다시 읽고 있던 게 니체의 「즐거운 학문」이었고, 어쩌다 보니 법구경도 같이 펼쳐 들고 있었다. 완전히 다른 두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 셈이다. 이 마음, 어떻게 해야 하나. 🔥 니체라면: 숨기는 게 아니라 시점을 내가 정하는 것 니체를 읽으면서 처음 깨달은 건, 감정을 숨기고 싶어 하는 이유부터 점검해야 한다는 거였다. 두려워서 숨기는 것과, 때를 스스로 고르고 싶어서 숨기는 것은 겉으로 똑같아 보여도 전혀 다르다. 전자는 위축이고 후자는 지배다. 나는 명백히 전자였다. 거절당할까 봐, 스터디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봐 숨겼다. 힘에의 의지 같은 게 아니라 그냥 겁이었다. 「즐거운 학문」 341절에는 악마가 찾아와 "네가 지금 사는 이 삶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무한히 반복해서 살아야 한다면 어떻겠냐"고 묻는 대목이 나온다. 이걸 그 겨울에 그대로 적용해봤다. 매주 토요일 15분 일찍 가서 창가 자리를 곁눈질하고, 공지 알림에 심장이 내려앉고, 아무 진전도 없는 이 상태를 영원히 반복해서 살아야 한다면 나는 그러겠다고 말할 수 있는가. 대답은 아...

📚 에피쿠로스는 SNS를 끄라고 하지 않았다: '케노독시아' 감별로 완성하는 아타락시아 실천법

🍂 재작년 가을, 종로서적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대학 때 같이 자취방에서 라면 끓여 먹던 친구가 있었다. 졸업하고 십 년 넘게 각자 회사 다니느라 연락이 뜸했는데, 어느 날 그 친구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종로에 작은 헌책방을 차렸다는 소식을 인스타그램으로 봤다. 개업 첫날 사진이었다. 손글씨로 쓴 나무 간판, 친구가 앞치마를 두르고 웃고 있는 모습, 밑에는 "십 년 만에 제 이름 걸고 하는 일이네요"라는 문구. 이상하게 그 사진 앞에서 오래 멈췄다. 부럽다는 감정은 아니었다. 헌책방 운영이 얼마나 고달픈지는 나도 안다. 그런데도 뭔가 뾰족한 게 가슴을 찔렀다. 나는 그해 봄에 이직 제안을 받았다가 안정적이라는 이유로 거절했었다. 그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그 사진 한 장 앞에서 갑자기 내 선택 전체가 재판대에 오른 기분이었다. 화면을 끄고 나서도 한참 동안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나중에 이 감정을 곱씹다가 에피쿠로스를 다시 읽었다. 대학 교양 수업에서 "쾌락주의 철학자, 사실은 검소하게 살라고 한 사람" 정도로 배웠던 그 사람. 그런데 이번에 제대로 읽어보니, 그가 남긴 글 중에 그날 밤 내 감정을 정확히 겨냥한 개념이 있었다. 🏺 에피쿠로스가 실제로 나눈 건 '자연스러운 욕망'과 '케노독시아'였다 에피쿠로스의 『주요 교설(Kuriai Doxai)』 29번 항목을 보면 그는 욕망을 세 가지로 나눈다.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것(배고프면 먹고 싶은 것), 자연스럽지만 필수는 아닌 것(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것), 그리고 자연스럽지도 필수적이지도 않은 것. 마지막 항목을 그는 '케노독시아(kenodoxia)'에서 비롯된 욕망이라 불렀다. 직역하면 '텅 빈 의견', 실체 없는 평판과 타인의 시선에서 생겨난 욕망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에피쿠로스가 이 세 번째 범주를 그냥 '사치'로 뭉뚱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명예, 권...

🔥권태기, 견디지 말고 이용하라 — 니체와 불교가 알려주는 권태기 극복법과 사랑의 진짜 의미

🍙 삼각김밥처럼 앉아 있던 저녁 3년 사귄 사람과 마주 앉아 밥을 먹는데 문득 할 말이 없었다. 설렘은커녕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고르듯 무덤덤했다. 그날 느낀 건 슬픔이 아니라 죄책감이었다. "나 지금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건가"라는 질문이 밥그릇보다 먼저 앞에 놓였다. 그 질문에 답을 찾겠다고 몇 주를 헤맸는데, 결국 나를 건진 건 심리학 논문이 아니라 니체와 불교였다. 둘 다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권태는 사랑이 고장 났다는 신호가 아니라, 사랑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증거라고. 🔁 니체라면 이 권태를 "고장"이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 341절에서 이상한 질문을 던진다. 어느 날 악마가 찾아와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이 지루한 저녁 식사까지 포함해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영원히 반복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묻는다면. 그 순간 절규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한번!"이라고 외칠 것인가. 이 질문을 권태기 철학적 재해석 에 들이대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나는 그 삼각김밥 저녁을 다시 살라면 절규할 줄 알았는데, 곰곰이 따져보니 아니었다. 그 침묵 자체가 싫었던 게 아니라, 그 침묵을 "실패"로 해석하는 내 습관이 싫었던 거다. 니체가 힘에의 의지라고 부른 건 거창한 정복욕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을 저항 없이 긍정하고 거기서 다시 뻗어나가는 힘이다. 권태로운 저녁을 실패로 낙인찍고 도망칠 자료로 쓸지, 아니면 "이 관계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가 됐다"는 데이터로 쓸지는 순전히 내 해석의 몫이었다. ☸️ 불교는 권태를 없애라고 말하지 않는다 불교의 무상(無常)은 모든 상태가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한다는 뜻이다. 초기 경전들이 반복해서 강조하는 건 "설렘도 무상하고 권태도 무상하다"는 것이지, 설렘만 붙잡고 권태는 도려내라는 게 아니다. 고통은 대상이 변하는 데서 오는 게 ...

💌 짝사랑 상대의 결혼 소식 앞에서, 니체와 붓다 사이에서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가짐 정리

📬 봉투를 열기 전에 알았다 지난달 회사 우편함에 청첩장이 하나 와 있었다. 보낸 사람 칸에 그 사람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 누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누나가 대신 부쳐준 거였다. 봉투를 뜯기도 전에 손글씨를 보고 알았다. 주소를 쓸 때 우편번호 앞자리를 항상 조금 삐뚤게 쓰는 버릇, 그 집안 특유의 필체였다. 나는 그걸 5초쯤 들여다보다가 봉투를 서랍에 넣고 회의에 들어갔다. 울지 않았다. 그날은. 대신 회의 내내 그 사람이 문자에서 "반드시"를 항상 "반듯이"로 잘못 쓰던 게 생각났다. 3년을 알고 지내면서 한 번도 고쳐주지 않았다. 고쳐줄 타이밍을 놓친 게 아니라, 고쳐주면 그 오타를 다시는 못 볼 것 같아서 일부러 안 고쳤다. 💭 내가 사랑한 건 실제로 누구였나 사람들은 짝사랑을 미화한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정직하게 복기해보면 그 사람은 내가 해준 요리를 먹고 "먹을 만은 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칭찬도 아니고 비난도 아닌, 딱 그 중간의 애매한 말. 나는 그 말을 3주 동안 곱씹었다. 좋다는 거야 별로라는 거야. 지금 생각하면 웃긴데, 그때는 그 한 문장이 내 자존감을 쥐고 흔들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원한 감정(르상티망)을 약자의 도덕이라고 불렀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원래 나쁜 것"이라 규정해버리는 심리적 방어기제 말이다. 나는 그 사람을 미화하는 대신 정확히 반대로 갔다. 그 사람의 무심함, 애매함, 가끔의 무례함까지도 사랑의 재료로 삼았다. 이게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놔두고, 그 대상과 부딪히면서 생기는 감정의 낙차 자체를 내 것으로 흡수하는 것. 상대를 신격화하지 않고도 강렬하게 원할 수 있다는 걸, 그 "먹을 만은 하다"는 말을 들으며 배웠다. 🌊 무상, 그런데 왜 이렇게 안 놓아지지 불교의 무상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뜻이다. 감정도, 관계도, 심지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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