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분,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어느 저녁, 2호선 신촌역 플랫폼에 서 있었다. 전광판은 '4분 후 도착'을 표시하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한결같이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나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멈췄다. 왜인지는 그때도 잘 몰랐다. 그냥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 4분은 평소와 달랐다. 터널에서 올라오는 바람 소리가 들렸고, 건너편 플랫폼에 서 있는 어떤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피곤해 보였다.
나중에 그 순간을 생각했다. [기다림의 현상학](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기다림의+현상학)이란 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상태인가? 우리가 기다림을 견디지 못할 때, 무엇을 회피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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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이데거: 기다림에도 두 종류가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 §65와 §68에서 시간성을 분석하면서, 기다림에 해당하는 독일어를 둘로 구별한다. Erwarten(기대)과 Gewärtigen(기다려-가짐)이다. Erwarten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계산하고 통제하려는 태도다. 열차가 언제 오는지 확인하고, 메시지가 왔는지 새로고침하는 것이 그것이다. Gewärtigen은 다르다. 무엇이 올지 확정하지 않은 채, 도래할 것 자체를 향해 열려 있는 구조다.
§65에서 하이데거는 쓴다: "Das primäre Phänomen der ursprünglichen und eigentlichen Zeitlichkeit ist die Zukunft." 번역하면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시간성의 일차 현상은 미래다." 하지만 이 미래는 달력의 미래가 아니다. 현존재(Dasein)가 자신의 가능성을 향해 앞서 달려가는(Vorlaufen, §53) 방식으로 자신을 이해하는 구조다. 그리고 그 가능성의 극단에는 죽음이 있다. §53에서 하이데거는 죽음을 "das eigenste, unbezügliche, unüberholbare Sein-können" — "가장 고유하고, 무연관적이며, 추월 불가능한 존재 가능" — 으로 정의한다.
스마트폰을 열어 무한 스크롤하는 것은 Erwarten이다. 도착 예정 시간을 체크하고, 알림을 확인하는 것은 미래를 계산하고 확보하려는 시도다. 그냥 서 있는 것, 무엇이 올지 모른 채로 있는 것 — 그것이 Gewärtigen에 가깝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도래할 것을 향해 자신을 열어놓는 실존적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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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이데거의 한계: 기다림이 결국 자기 자신으로 수렴할 때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하이데거 분석에서 Gewärtigen의 구조는 궁극적으로 '죽음을 향한 선구'로 수렴한다. 내가 기다리는 것의 가장 깊은 층위는 '나의 죽음'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54가 강조하듯 철저히 나의 것이다.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다. 본래적 실존은 이 근본적 고독 위에 서 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이 지점을 정확히 건드린다. 그는 하이데거를 보완하는 게 아니라 비판한다. 『전체성과 무한』(Totalité et Infini, 1961) 전체를 관통하는 논변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타자를 존재(Being)의 지평 아래 포섭하는 전체주의적(totalitarian) 구조를 갖는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에게서 타자는 결국 현존재의 자기이해 안으로 흡수된다. 기다림의 최종 지평이 '나의 죽음'이라면, 그것은 타자를 향한 기다림이 아니라 자아로의 귀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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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비나스: 얼굴이 기다림의 방향을 바꾼다
레비나스는 『시간과 타자』(Le Temps et l'Autre, 1947)에서 하이데거의 죽음 분석을 직접 문제 삼는다. "La mort n'est pas dans mon pouvoir" — 죽음은 나의 권력 안에 있지 않다. 하이데거가 죽음을 현존재가 앞서 달려가서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분석한 반면, 레비나스는 죽음이 근본적으로 외부에서 오는 것, 내가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죽음은 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나의 불가능성이다.
그리고 그 불가능성과 닮은 것이 있다. 타자의 얼굴(le visage)이다. 『전체성과 무한』 제3부 "얼굴과 외재성" 섹션에서 레비나스는 얼굴이 내 개념의 포획에 저항한다고 말한다. 얼굴은 범주화할 수 없다. 그것은 나에게 말을 건다: "Tu ne tueras point" — 살인하지 말라. 이 호명이 윤리의 시작이다. 윤리는 나의 자아 확인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불려 나오는 사건이다.
그날 플랫폼에서 나는 건너편 남자의 피곤한 얼굴을 봤다. 그 얼굴은 나에게 무언가를 했다. 뭐라 설명하기 어렵다. 분명한 건, 그것이 스크롤로는 생기지 않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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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둘 사이의 균열을 살기
하이데거와 레비나스를 나란히 세울 때의 가장 큰 유혹은 이 긴장을 봉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화해하지 않는다. 레비나스의 기획 자체가 하이데거를 넘어서려는 시도다.
그럼에도 이 균열은 기다림에 대해 더 정직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하이데거 없이는, 기다림을 낭비로 환원하는 문화를 비판할 언어가 없다. Erwarten과 Gewärtigen의 구별은 우리가 왜 4분을 폰 없이 견디지 못하는지를 정확히 짚는다. 그러나 레비나스 없이는, 기다림이 자기 실존의 확인으로만 귀착될 위험이 있다.
기다림이 윤리적이 되는 것은 그것이 타자의 얼굴을 향해 열릴 때다. 내가 폰을 꺼내지 않았던 건 뭔가 대단한 결심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덕에 건너편 얼굴을 봤고, 그 얼굴이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했다. 그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기다림이 수동이기를 멈추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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