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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면서도 왜 할까 — 아크라시아, 의지의 나약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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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벽 두 시의 자기혐오 새벽 두 시였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또 한 편을 추천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내일 오전 아홉 시에 발표가 있다는 것, 지금 자야 한다는 것, 이걸 클릭하면 후회한다는 것. 그런데도 클릭했다. 이 상황이 답답한 이유는 이것이 무지(無知)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나는 몰랐던 것이 아니다. 완전히, 분명히, 의심 없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했다. 철학자들은 이 상태에 오래된 이름을 붙여뒀다. [아크라시아](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아크라시아)(ἀκρασία) — 직역하면 '자기 지배의 실패', 보통 '의지의 나약함'으로 번역된다. --- ## 🏛️ 소크라테스가 이 현상을 부정한 이유 아크라시아의 역설을 처음 정면으로 다룬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인데, 그는 스승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반박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소크라테스의 입장은 이것이다: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 그것을 선택하는 일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가 나쁜 선택을 할 때는 그것이 나쁘다는 사실을 그 순간 "진짜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악행의 원인은 언제나 무지다(『프로타고라스』, 357d-e). 논리는 깔끔하다. 하지만 새벽 두 시의 나에게 적용하면 뭔가 석연치 않다. 나는 진짜로 알고 있었는데. --- ## 🧩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체 — 어떤 앎이 작동을 멈추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7권 3장(1147a24–b19)에서 소크라테스의 논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놓친 것을 짚는다. 핵심 주장은 이것이다: 앎에는 종류가 있다. "가지고 있는 앎(ἕξις)"과 "실제로 발동되는 앎(χρῆσις)"은 다르다. 그가 꺼내는 도구는 실천 삼단논법이다. 정상적인 경우 이렇게 작동한다. - 대전제(보편 명제): "단 음식은 몸에 나쁘다" - 소전제(특수 명제): ...
🪨 진정하라는 말을 세 번 했을 때, 나는 내가 누구인지 헷갈렸다 — 아파테이아의 진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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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 번째 "진정하시고요"를 말하던 순간, 나는 내가 누구인지 헷갈렸다 3년 전쯤 이커머스 회사 CS팀에서 일할 때, 배송이 사흘 늦어진 고객이 전화를 걸어와 처음부터 끝까지 욕설로 시작하는 날이 있었다. "너 같은 게 뭘 안다고"로 시작해서 "회사 망하게 해주겠다"로 끝나는 5분짜리 통화. 매뉴얼대로 "고객님, 진정하시고요"를 세 번쯤 반복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화가 난 건지, 화가 난 척을 그만둔 건지, 아니면 애초에 화가 나긴 했던 건지조차 헷갈렸다. 표정과 목소리는 차분했는데, 속에서는 뭔가가 식지 않고 그대로 얼어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 무렵 나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스토아 철학 책 몇 권을 집어 들었고, 거기서 '[아파테이아](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아파테이아)(apatheia)'라는 단어를 처음 만났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은 이 개념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 ## 🧊 감정을 누르는 법을 배운 게 아니라, 감정을 못 느끼는 척하는 법을 배웠다 처음에 내가 시도한 건 단순했다. 화가 올라오면 숫자를 셌다. 슬픔이 밀려오면 다른 생각으로 덮었다. 일종의 감정 차단 훈련이었는데, 몇 달 해보고 알게 된 건 이게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이었다. 차단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그저 표현되는 통로만 막힌 채로 몸 어딘가에 쌓였다. 나는 전화를 받을 때는 멀쩡했지만, 퇴근길 지하철에서 별것 아닌 일에 눈물이 났고, 주말엔 이유 없이 무기력했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한 아파테이아는 이런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 에픽테토스나 세네카가 추구한 건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외부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판단'에서 동요가 비롯된다는 걸 ...
🍗 결제 버튼 앞에서 멈춘 12분, 아크라시아: 알면서도 못 하는 나를 위한 오래된 철학적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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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시 47분, 손가락이 멈췄다 지난주 화요일 밤, 나는 배달 앱의 '결제하기'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려둔 채로 정확히 12분을 그대로 있었다. (화면 잠금 시간을 길게 늘려놨던 터라, 화면이 꺼지지 않고 그 12분을 고스란히 지켜봤다.) 장바구니에는 양념치킨 한 마리와 콜라 1.25리터가 담겨 있었고, 같은 화면 한구석에는 그날 낮에 기록해둔 식단 앱의 숫자가 떠 있었다. 1,840킬로칼로리. 치킨 한 마리를 더하면 하루 권장량을 가뿐히 넘긴다는 걸, 나는 모르지 않았다. 모르지 않았는데도 손가락은 결제 버튼 위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12분 동안 내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을 나중에 돌이켜보면서, 나는 이게 '의지박약'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되기엔 훨씬 더 기이한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망설였다. 망설였다는 것 자체가 내 안의 어떤 부분은 분명히 "하지 마"라고 말하고 있었다는 증거였으니까. --- ## 🧠 안다는 것과, 그 앎이 힘을 잃는 순간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7권에서 '의지가 약한 사람(아크라테스)'과 '자제력이 아예 없는 사람(아콜라스토스)'을 구분해놓았다. 둘 다 그릇된 행동을 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아콜라스토스는 애초에 그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면 아크라테스는 행동하는 그 순간, 혹은 적어도 행동하고 난 직후에는 "내가 잘못했다"는 걸 안다. 후회할 줄 안다는 것 — 그게 둘을 가르는 선이다. 이 구분을 처음 읽었을 때 그 12분이 떠올랐다. 나는 분명 후회할 사람이었다. 결제 버튼을 누르고 30분쯤 지나면 틀림없이 "또 시켰네"라고 자책할 사람. 그런데도 그 순간엔 멈추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풀면 이렇게 된다. 내 안의 '보편적인 앎' — 과식은 몸에 안 좋다 — 은 멀쩡히 살아있었지만, 그 앎이 "지금 이 치킨을 ...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번아웃이었다 — 명상록이 숨긴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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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제는 왜 같은 말을 열두 번 썼나 명상록을 두 번째 읽다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줄을 그어놓은 문장이 있는데, 비슷한 말이 뒤에서 또 나왔다. 처음엔 번역 오류인가 싶었다. 아니었다. 마르쿠스 본인이 같은 주제를 다른 권에서 반복하고 있었다. '지금에 집중하라'가 2권에 있고 5권에 있고 7권에 있다. 황제이자 철학자인 사람이, 왜 자기가 쓴 걸 자꾸 까먹나? 그 질문이 이 글의 출발점이다. 명상록은 철학 교과서가 아니다. 이건 한 남자가 매일 밤, 낮에 무너진 것들을 다시 세우려고 쓴 기록이다. 반복한다는 것은 까먹는다는 뜻이고, 까먹는다는 것은 낮에 그 원칙대로 살지 못했다는 뜻이다. 번아웃의 핵심 증상 중 하나는 '알면서도 할 수 없음'이다 — 무엇이 옳은지 알지만 그걸 실행할 에너지가 없는 상태. 마르쿠스의 반복은 그 증거다. --- ## 🌅 5권 1절: 그도 이불을 걷어내야 했다 번아웃이라는 단어는 1974년에 생겼다. 심리학자 허버트 프로이덴버거가 자원봉사자들의 소진 상태를 묘사하면서 처음 쓴 말이다. 마르쿠스는 당연히 '번아웃'이라고 쓰지 않았다. 하지만 명상록 5권 1절을 읽으면 뭔가가 겹친다. > "새벽에 일어나기 힘들 때 스스로에게 말하라: 나는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러 일어난다. 내가 태어난 이유인 그 일을 하는 것이 불만인가? 아니면 이불 속에서 따뜻하게 웅크리려고 만들어진 것인가?" 이 글을 쓴 사람은 일어나기 싫었다. 정확히는, 일어날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 설득해야 했다. 황제가. 이건 격언이 아니다 — 이건 자기 자신을 침대 밖으로 끌어내는 과정을 글로 기록한 것이다. 아침 무기력을 스스로 논파해야 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게 한 번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필요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번아웃 연구의 표준 척도인 마슬락 번아웃 인벤토리(MBI)는 세 축으로 번아웃을 측정한다: 정서적 소진, 냉소, 효능감 저하. 명상록에서 이 세 가지를 찾는...
🪞 수치심의 철학: 나를 비추는 거울이자 세상이 겨누는 무기, 사르트르가 말한 타자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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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치심의 철학](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수치심의+철학): 나를 비추는 거울, 세상이 겨누는 무기 스물다섯 살의 회식 자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수치심의 물리적 질감을 경험했다. 분위기를 살리겠다고 꺼낸 농담이 테이블 위에 납처럼 가라앉았고, 선배의 시선이 나를 스쳐가는 찰나—그건 비난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게 더 나빴다. 실망인지 연민인지 모를 그 눈빛 앞에서 나는 갑자기 내가 누구인지 알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생각했던 나와, 그 선배의 눈에 비친 내가 달랐다. 그 간극이 바닥에서 올라와 얼굴을 태웠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 장면이 반복 재생됐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 감정이 부끄러움이라는 걸, 그리고 이 부끄러움이 단순히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과는 다른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다는 걸. 수치심은 죄책감이 아니다. 죄책감은 내가 한 일에 대한 반응이고, 수치심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반응이다. --- ## 👁️ 타자의 시선이 나를 만든다—사르트르의 수치 사르트르는 수치심을 타자의 시선을 통해 자아가 '대상화'되는 순간이라고 봤다. 그의 유명한 열쇠구멍 예시를 빌리면: 복도에서 몰래 방 안을 엿보던 사람이 갑자기 누군가의 발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자신이 '엿보는 자'라는 존재로 굳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 시선 앞에서 나는 내가 생각했던 나—자유롭고 자율적인 주체—가 아니라, 타자의 판단에 포획된 객체가 된다. 회식 자리의 나도 그랬다. 선배의 눈빛이 특별히 잔인했던 게 아니다. 문제는 그 시선이 내 안에 있던 어떤 자아상을 뒤집어 보여줬다는 것이다. 수치심은 타자가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타자의 시선 앞에서 내가 스스로를 재발견하는 사건이다. --- ## 🧭 수치심은 도덕의 자원이다—버나드 윌리엄스의 역설 그렇다면 수치심은 무조건 나쁜 건가? 철학자 버나드 윌리엄스는 1993년 저서 『수치심과 필연성(Shame and Necess...
🥱 지루함을 견디는 사람이 살아남는다 — 하이데거와 파스칼의 권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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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시간의 공항 작년 가을, 국내선이 두 시간 지연됐다. 공항 와이파이가 불안정했고 데이터도 됐다 안 됐다를 반복했다. 처음 20분은 익숙한 순서대로 버텼다 — 메시지 확인, 뉴스 훑기, 유튜브 로딩 실패, 또 메시지 확인. 배터리가 걱정되기 시작하자 결국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시작됐다. 불안이 찾아온 것이다. 연락 기다리는 것도 없고, 딱히 놓친 것도 없는데 무언가를 계속 해야 한다는 충동이 물처럼 밀려왔다. 나는 그 느낌을 그냥 '지루함'이라고 불렀는데, 블레즈 파스칼이 350년 전에 이미 똑같은 상태를 해부해뒀다는 걸 한참 뒤에야 알게 됐다. --- ## 🃏 파스칼이 진단한 것: 전환이라는 도피 파스칼은 1670년 출판된 《팡세》(Pensées)에서 인간의 불행을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하나에서 온다: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것." (§136) 이 구절은 보통 스마트폰 중독을 예언한 문장처럼 인용된다. 그런데 그렇게 읽는 것은 파스칼의 진단을 절반쯤 놓치는 것이다. 그가 지목한 것은 외부 자극에 대한 의존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파스칼은 이를 *divertissement*(전환, 기분 전환)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인간이 사냥을 즐기는 이유는 사냥 자체가 좋기 때문이 아니다. 사냥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의 허무함과 유한성을 직면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자극의 내용이 아니라 자극이 채워주는 빈자리다. 공항에서 내가 느낀 불안은 그래서 단순한 심심함이 아니었다. 평소에 자극으로 눌러두었던 것들이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느낌이었다. 파스칼의 언어로는, 나는 divertissement 없이 자신과 단둘이 남겨진 것이다. --- ## 🧭 하이데거의 세 종류 권태 마르틴 하이데거는 1929-30년 프라이부르크 강의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에서 [권태의 철학](https://warguss.bl...
⏳ 기다림의 현상학: 플랫폼에서 하이데거와 레비나스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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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분,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어느 저녁, 2호선 신촌역 플랫폼에 서 있었다. 전광판은 '4분 후 도착'을 표시하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한결같이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나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멈췄다. 왜인지는 그때도 잘 몰랐다. 그냥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 4분은 평소와 달랐다. 터널에서 올라오는 바람 소리가 들렸고, 건너편 플랫폼에 서 있는 어떤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피곤해 보였다. 나중에 그 순간을 생각했다. [기다림의 현상학](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기다림의+현상학)이란 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상태인가? 우리가 기다림을 견디지 못할 때, 무엇을 회피하고 있는 걸까? --- ## 🔍 하이데거: 기다림에도 두 종류가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 §65와 §68에서 시간성을 분석하면서, 기다림에 해당하는 독일어를 둘로 구별한다. Erwarten(기대)과 Gewärtigen(기다려-가짐)이다. Erwarten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계산하고 통제하려는 태도다. 열차가 언제 오는지 확인하고, 메시지가 왔는지 새로고침하는 것이 그것이다. Gewärtigen은 다르다. 무엇이 올지 확정하지 않은 채, 도래할 것 자체를 향해 열려 있는 구조다. §65에서 하이데거는 쓴다: "Das primäre Phänomen der ursprünglichen und eigentlichen Zeitlichkeit ist die Zukunft." 번역하면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시간성의 일차 현상은 미래다." 하지만 이 미래는 달력의 미래가 아니다. 현존재(Dasein)가 자신의 가능성을 향해 앞서 달려가는(Vorlaufen, §53) 방식으로 자신을 이해하는 구조다. 그리고 그 가능성의 극단에는 죽음이 있다. §53에서 하이데거는 죽음을 "das eigenste, unbezügliche, ...
🧘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에너지를 쏟던 나에게 — 에픽테토스의 이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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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흘을 버린 나 몇 년 전,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사흘을 거의 잠들지 못했다. 그 시간 동안 머릿속을 채운 것들을 돌이켜보면 이렇다. 청중이 지루해하면 어떡하지. 상사가 준비 부족이라고 느끼면 어떡하지. 질문을 버벅이면 어떡하지. 발표 자료 폰트가 어색해 보이면 어떡하지. 폰트. 나는 실제로 새벽 두 시에 폰트를 고민하며 앉아 있었다. 발표 당일, 나는 청중의 표정을 실시간으로 읽으려 했다. 저 사람이 하품했다. 저 사람이 휴대폰을 봤다. 모든 것이 실패의 신호처럼 보였다. 발표는 끝났다. 상사는 잘했다고 했다. 그 사흘이 결과에 기여한 게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 사흘이 나를 얼마나 갉아먹었는지는 안다. 나중에 에픽테토스를 읽다가 불편한 문장 하나를 만났다. --- ## 📚 에픽테토스가 구분한 것 에픽테토스는 《엥케이리디온(Enchiridion)》을 이렇게 시작한다.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고,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달린 것으로 판단, 욕구, 혐오, 의지를 꼽는다. 우리에게 달리지 않은 것으로는 몸, 명성, 지위, 외부의 일들을 든다. 이것이 [에픽테토스의 통제 이분법](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에픽테토스의+통제+이분법)(dichotomy of control)이다. 에픽테토스가 노예였다는 사실은 이 철학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그는 자유인이 쓴 자유의 철학이 아니라,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가 쓴 자유의 철학을 남겼다. 외부를 바꿀 수 없을 때, 그는 자신이 반응하는 방식만이 온전히 자신의 것임을 발견했다. 통제 이분법은 그렇게, 극단적 무력 속에서 태어난 철학이다. --- ## ⚙️ 이것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 처음 이 개념을 접했을 때 나는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적용하려 하면 단순하지 않다. 무엇이 내 통제 안에 있고 밖에 있는지를 구분하는 일 자체가 이미 상당한 훈련을 요구한다. 가령 직장 동료와의 갈등. ...
🔍 '아닌 것'을 알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 아포파티즘을 일상에 들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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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기소개서 앞에서 막힌 이유 2019년 겨울, 나는 채용 공고 앞에서 이상한 막막함에 빠진 적이 있다. 자기소개서 첫 칸, '자신을 한 문장으로 표현해보세요'라는 항목이었다. 열다섯 분이 지나도 커서는 깜박이기만 했다. 문장을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면서 뭔가를 깨달았다 — 나는 나를 '무엇'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무능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쓰는 모든 문장이 즉시 반례를 불렀다. '나는 끈기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썼다가, 중도에 그만둔 일들을 떠올리고 지웠다. 그 막막함은 사실 철학적으로 꽤 정직한 반응이었다. 우리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규정하는 데 익숙하다. '나는 ~이다'의 문법으로. 그런데 그 문법 자체가 자아를 왜곡하는 틀일 수 있다는 오래된 생각이 있다. 이것을 [아포파티즘 일상 적용](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아포파티즘+일상+적용)(apophaticism), 혹은 부정의 길(via negativa)이라고 부른다. --- ## 🏛️ 신학에서 출발한 부정의 논리 아포파티즘은 원래 신학에서 왔다. 5세기 신학자 위(僞)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Pseudo-Dionysius the Areopagite)는 신에 대해 '전능하다', '선하다', '지혜롭다'와 같은 긍정적 서술이 오히려 신을 축소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언어로 규정되는 순간, 신은 그 언어의 한계 안에 갇힌다. 그래서 그는 반대 방향을 택했다 — 신은 이것이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부정의 축적을 통해 도달하는 어떤 경계. 그것이 오히려 더 정직한 접근이라는 것이다. 이 논리가 신학 바깥에서도 작동한다는 것을 비트겐슈타인이 다른 언어로 보여줬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
🥱 권태의 철학적 구조: 하이데거가 말한 '깊은 지루함'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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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하철 두 정거장, 핸드폰 세 번 3호선 을지로에서 충무로까지는 두 정거장이다. 3분이 채 안 된다. 나는 그 사이 핸드폰을 세 번 꺼냈다가 집어넣었다. 첫 번째는 알림 확인. 두 번째는 음악 변경. 세 번째는—솔직히 이유가 없었다. 손이 먼저였다. 주머니에서 기계를 꺼내고, 아무것도 새롭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넣었다. 반사에 가까웠다. 나중에 그 순간을 떠올리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무언가를 원했던 게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상태도 아니었다. '원함'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내용이 비어 있는 상태. 철학자들은 이 상태에 오래전부터 이름을 붙여왔다. [권태의 철학적 구조](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권태의+철학적+구조). 그런데 그들이 말한 권태는 내가 그 순간 경험한 것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구조적이다. --- ## 🚪 하이데거의 세 번째 문: tiefe Langeweile가 여는 것 하이데거는 1929-30년 겨울 학기 프라이부르크 강의—나중에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GA 29/30)로 묶인—에서 권태를 세 개의 층으로 해부한다. §18부터 §38까지, 약 200페이지에 걸쳐서. 이 분량 자체가 이미 신호다. 권태는 심리적 현상이 아니라 존재론적 사태다. 첫 번째 권태(gelangweilt werden von etwas)는 특정 대상에 의해 지루해지는 것이다. 기차를 기다리다 지루해지는 것. 두 번째(sich langweilen bei etwas)는 파티에 있으면서 지루한 것—환경이 아니라 내가 지루함을 생산하는 상태다. 그러나 세 번째가 결정적이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tiefe Langeweile, 심층적 권태라고 부른다. 독일어 표현은 "Es ist einem langweilig"—'사람에게 권태롭다'는 뜻으로, 주어가 없는 문장이다. 누가 무엇에 의해 지루한 것이 아니라, 권태로운 상태 자체가 덮쳐오는 것. ...
🧠 알면서도 왜 못 하는가 — 아크라시아, 의지 박약을 철학적으로 해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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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이미 결제까지 마친 온라인 철학 강의를 켜놓고서 다른 탭에서 '철학 강의 추천'을 검색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수강 중이면서 비슷한 것을 또 찾고 있었다. 강의는 멈춰 있었고,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이 장면이 불편한 이유는 하나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모르고 한 게 아니었다. 앎은 있었다. 행동은 없었다. 그리스어로 이 상태를 [아크라시아(akrasia)](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아크라시아(akrasia))라고 부른다. 직역하면 '자기 지배의 결여'. 나쁜 것을 나쁜 줄 알면서도 선택하는 상태. 서양 철학에서 이 문제는 이상하리만큼 오래된 논쟁의 대상이었고, 그 논쟁이 지금도 끝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 ## 🏛️ 소크라테스가 옳다면 아크라시아는 존재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아크라시아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봤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좋다고 판단하는 것을 행한다. 만약 나쁜 것을 했다면, 그건 나쁜 줄 몰랐기 때문이다. 앎이 완전하면 행동도 따라온다 — 이것이 소크라테스적 주지주의의 핵심이다. 이 논리는 실제로 꽤 설득력 있다. 흡연자가 폐암의 확률을 정말로, 뼛속 깊이 실감하고 있다면 담배를 피울 수 있을까? 어쩌면 아크라시아는 무지의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그러나 내 경험은 이 설명과 맞지 않는다. 나는 강의를 틀어놓고 다른 강의를 검색하면서 내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무지가 아니었다. --- ## 🔬 아리스토텔레스의 해부, 그리고 그 한계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철학자였다. 그의 핵심 구분은 '현실적 앎(actual knowledge)'과 '잠재적 앎(potential knowledge)'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알고 있지만, 욕구에 압도될 때 그 앎이 실천의 영역으로 활성화되지 않는...
🌿 에피쿠로스가 현대를 살았다면: 정보 과부하 시대의 아타락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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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대가 쾌락보다 더 피로하다 어느 오후, 아무 알림도 없는 시간에 일부러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불편했다. 피로한 것이 아니라 정확히는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감각—확인하지 않은 메시지, 업데이트되었을 피드, 아직 오지 않은 응답—이 머릿속을 조용히 채웠다. 그 피로는 정보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기다림의 상태' 자체가 이미 소진이었다. 에피쿠로스는 이 감각을 알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이것을 철학적 문제로 먼저 정의했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말한다: "미래에 대해, 그것이 전적으로 우리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적으로 우리 것이 아닌 것도 아님을 기억하라(τὸ δὲ μέλλον οὔτε ἡμέτερον οὔτε πάντως οὐχ ἡμέτερον)." 쾌락주의자라는 이미지와 기묘하게 어긋나는 이 문장이 사실 에피쿠로스 철학의 핵심에 가장 가깝다. 그가 [아타락시아](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아타락시아)의 진짜 적으로 지목한 것은 쾌락이 아니었다. 쾌락에 대한 예상—올지 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긴장의 상태—이었다. 현대 플랫폼은 이 구조를 정교하게 활용한다. 유튜브 자동재생, 인스타그램 무한 스크롤, 카카오톡 읽음 표시. 이 기능들의 공통점은 '다음'을 항상 암시한다는 것이다. 콘텐츠가 끝나면 다음이 시작되고, 메시지를 보내면 읽음 여부를 기다리게 되고, 피드를 내리면 새 게시물이 뜬다. 플랫폼은 현재 쾌락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다음 쾌락에 대한 기대를 심는다. 에피쿠로스의 언어로 말하자면, 현대 디지털 환경은 쾌락의 기계가 아니라 기대의 기계다. --- ## ⚖️ 운동하는 쾌락과 안정된 쾌락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두 종류로 나눈다. '운동하는 쾌락(κίνησις, kinesis)'—배고플 때 먹는 것, 알림이 왔을 때의 흥분, 좋아요를 받을 때의 자극 같은 것. 그리고 '안정적 상태의 ...
💀 오늘 죽는다고 상상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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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게 전혀 효과가 없었다 메멘토 모리 훈련을 처음 시도한 건 2년 전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고 나서 매일 아침 스마트폰을 열기 전 5분 동안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상상했다. 2주가 지났을 때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더 여유로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감을 앞둔 것처럼 예민해졌고, 아직 못 한 것들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이 경험을 나중에 설명해준 건 철학이 아니라 심리학이었다. --- ## 💀 죽음을 자주 상상할수록 오히려 더 집착하게 된다 1980년대 말, 심리학자 제프 그린버그, 셸던 솔로몬, 톰 피진스키는 공포 관리 이론(Terror Management Theory, TMT)을 제안했다. 이들의 핵심 주장은 불편하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함을 인식하는 유일한 동물이며, 이 인식이 만들어내는 실존적 공포를 관리하기 위해 두 가지 방어 기제를 자동으로 작동시킨다. 하나는 자신이 속한 세계관과 가치 체계를 더 강하게 옹호하는 것, 다른 하나는 자존감을 높이려는 행동을 강화하는 것이다. 실험에서 피험자들에게 죽음을 떠올리게 하면(mortality salience), 자신의 문화적 세계관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이 증가했다. 즉, 죽음을 생각하면 해방되는 게 아니라 더 자기 보호적이 되고, 집착이 강화된다. 스토아 훈련을 피상적으로 적용할 때 정확히 이 함정에 빠진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자극이 불안을 촉발하고, 뇌는 그 불안을 덮기 위해 반대 방향으로 반응한다. 그렇다면 스토아인들은 왜 이것을 효과적인 수련이라고 했을까. --- ## 📖 에픽테토스가 실제로 훈련시킨 것 스토아 수련의 핵심은 "죽음을 상상하라"가 아니다. 에픽테토스의 『강의록(Discourses)』 3권에서 그는 더 정밀한 지시를 내린다.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죽음에 대한 *판단(krisis)*을 바꾸는 것. 죽음이 나쁜 것이라는 판단을 내가 내리고 있...
🧠 알면서도 못 하는 나에게: 아크라시아, 의지 나약함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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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도 시작을 못 했다 마감은 내일 아침이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노트북을 열었고, 빈 문서를 응시했고, 그리고 유튜브를 켰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나는 알고리즘 어딘가에서 문어의 색 인식 능력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다. 흥미롭긴 했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과는 완전히 무관했다. 이 순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게으름? 의지력 부족? 혹은 더 그럴듯하게 포장하자면—번아웃?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이 상황에 단 한 단어를 붙였을 것이다. **[아크라시아](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아크라시아)(akrasia)**. --- ## 🏛️ 아리스토텔레스가 명명한 인간의 오래된 결함 아크라시아는 고대 그리스어로 '자기 통제의 부재', 혹은 '의지의 나약함'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7권에서 이 개념을 집중적으로 다루는데, 그가 던진 질문은 놀랍도록 현대적이다. "어떻게 사람은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그것에 반하여 행동할 수 있는가?" 소크라테스는 이 질문에 단호했다. 그는 진정한 앎이 있다면 잘못된 행동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악행은 언제나 무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아크라시아는 아예 존재할 수 없다. 담배가 해롭다는 것을 '정말로' 안다면 담배를 피우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설명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경험에 주목했다. 사람들은 분명히 알면서도 틀린 선택을 한다. 그는 이를 부정하는 것이 오히려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는 철학적 오류라고 반박한다. 7권 3장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 "우리는 이 현상을 단순히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히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설명은 섬세하다. 아크라시아적 인간은 두 종류의 앎 사이에서 분열된다. 보편적 앎("운동은 건강에 좋다")은 있지만, 특수...
🤔 모르겠다고 말할 용기 — 피론의 에포케가 정보 홍수 시대에 건네는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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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루에 몇 번이나 '판단'을 강요당하는가 얼마 전 저녁, 나는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었다가 20분 만에 내려놓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어떤 정치인에 대한 입장, 특정 식품의 건강 효과, 어느 나라의 외교 전략, 요즘 뜨는 투자 종목까지 —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스스로 뭔가 판단하려 애쓰고 있었다. 피로했다. 정보를 소화한 것이 아니라 정보에 짓눌린 기분이었다. 그때 문득 학부 때 읽었던 한 이름이 떠올랐다. 피론(Pyrrho of Elis).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철학자. 그는 '아무것도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결론을 삶의 방식으로 끌어올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방식의 핵심에 [피론의 에포케(epoché)](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피론의+에포케(epoché))가 있었다. --- ## 🏛️ 피론은 왜 판단을 멈추었는가 에포케는 원래 그리스어로 '보류', '정지'를 뜻한다. 피론과 그의 후계자들이 발전시킨 고대 회의주의(Pyrrhonism)에서 에포케는 단순한 지적 겸손이 아니었다. 어떤 명제에 대해서도 동의하거나 반대하지 않는, 완전한 판단의 유보였다. 피론의 제자 티몬(Timon of Phlius)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스승은 이렇게 가르쳤다. "사물은 본질적으로 구별되거나 측량되거나 판단될 수 없다. 따라서 감각도 의견도 참이거나 거짓이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도 신뢰해서는 안 되며, 판단 없이, 기울지 않고,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들으면 허무주의처럼 들린다. 그런데 피론이 이 판단 중지를 통해 도달하고자 했던 것은 파괴가 아니라 '아타락시아(ataraxia)', 즉 마음의 평온이었다. 판단을 멈추자 불안이 사라졌다. 확신을 추구하기를 그만두자 오히려 마음이 고요해졌다는 것이다. 후대 철학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는 이를 그림자에 비유했다...
🌿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배우는 아타락시아 — 쾌락이 아닌 고요한 마음이 진짜 행복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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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안이 배경음이 된 시대 어느 날 저녁, 할 일 목록을 다 지웠는데도 마음이 무거웠다. 마감도 없고, 미뤄둔 이메일도 없고, 딱히 걱정할 거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가슴 어딘가에 무언가가 웅크리고 있었다. 이유 없는 불안. WHO가 2023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불안장애를 겪는 인구는 약 3억 100만 명에 달한다. 수치 뒤에는 내가 있었고, 아마 당신도 있을 것이다. 그 무렵, 에피쿠로스를 다시 펼쳤다. 흔히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자'라는 낙인과 함께 소환된다. 맛있는 음식, 좋은 와인, 감각적 향유. 하지만 그것은 로마 상류층이 자신의 방종을 철학으로 포장하면서 만들어낸 왜곡이었다. 에피쿠로스가 아테네 교외 정원에서 제자들과 나눈 식사는 치즈와 빵이 전부였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철학자 열전』 10권에서 에피쿠로스의 편지를 직접 인용한다. "치즈 한 조각만 있어도 나는 이미 풍요롭다." 이것이 쾌락주의자의 식단이다. --- ## 📜 에피쿠로스가 실제로 말한 것 에피쿠로스의 핵심 개념인 [아타락시아](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아타락시아)(ἀταραξία)는 '쾌락의 극대화'가 아니라 '동요 없음'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31절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몸에 고통이 없고 영혼에 불안이 없을 때, 우리는 쾌락의 극점에 도달한다." 최고의 상태는 강렬한 쾌감이 아니라, 결핍과 동요의 부재다. 『중요한 교설』(Κύριαι Δόξαι)에서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세 층위로 분류한다.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배고픔, 우정, 철학적 사유), 자연스럽지만 필요하지 않은 것(미식, 성적 향락), 자연스럽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것(명성, 권력, 부). 아타락시아는 첫 번째 층위에서만 충족 가능하다. 나머지는 채울수록 비어지는 그릇이다. 이 구조는 단순해 보이지만 실은 급진적이다.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
🧠 알면서도 한다 — 아크라시아, 의지의 나약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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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크라테스가 틀렸다 어젯밤 또 그랬다. 자정이 넘어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낮에 분명히 다짐했다. 오늘은 야식 없이 잔다고. 그런데 손은 이미 치킨 봉지를 뜯고 있었다. 먹으면서도 알았다. 이건 좋지 않다. 알면서 했다. 이 경험이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이유는, 소크라테스가 이 상황을 아예 불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도 자발적으로 나쁜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쁜 선택은 항상 무지의 결과다. 알면 행한다. 이것이 그의 지덕합일(知德合一) 테제다. 그렇다면 내가 야식이 나쁘다는 걸 알면서 치킨을 집어 들었다는 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진짜로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정말 몰랐던 걸까? 아니다. 나는 알았다. 그래서 [아크라시아](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아크라시아)가 필요하다. --- ## 🧠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단, 그리고 데이비드슨의 역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7권 1~10장에서 소크라테스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아크라시아는 실제로 존재한다. 알면서도 더 나쁜 것을 선택하는 의지의 나약함이 있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우리에게는 두 종류의 앎이 있다. "야식은 건강에 나쁘다"는 보편적 앎과, "지금 내 앞의 이 치킨이 나쁘다"는 특수한 앎. 아크라시아 상태에서는 보편적 앎은 있지만 특수한 앎이 욕구에 의해 일시적으로 억눌린다. 술 취한 사람이 윤리학 명제를 암송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럴싸한 설명이다. 그런데 1969년 도널드 데이비드슨은 여기서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논문 「How is Weakness of the Will Possible?」에서 그는 아크라시아를 인정하는 순간 실천 추론 전체가 흔들린다는 논리적 긴장을 드러냈다. 우리의 행위는 이유(reason)에 의해 설명된다. 내가 치킨을 집어 든 건 뭔가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크라...
🔴 수치심의 철학: 얼굴이 붉어지는 순간 나는 나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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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하철에서 넘어진 날 몇 년 전 출근길 지하철에서 급정거에 중심을 잃고 그대로 넘어졌다. 다친 곳은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순간 뺨이 달아올랐는데, 이상한 건 지하철 문이 닫히고 혼자 걸어가는 내내 그 열감이 가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를 보던 승객들은 이미 각자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혼자 계속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데, 왜? 이 질문에서 출발하면 수치심은 꽤 복잡한 감정이 된다. --- ## 😳 수치심은 왜 혼자서도 일어나는가 사르트르는 수치심을 이렇게 설명했다. 《존재와 무》(1943) 3부에서 그는 열쇠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남자를 묘사한다. 남자는 거리낌 없이 문에 귀를 갖다 대다가 갑자기 복도에서 발소리를 듣는다. 그 순간 수치심이 밀려든다. 사르트르의 분석은 간결하다. 타인의 시선이 나를 객체로 만드는 순간 수치심이 생긴다는 것. 하지만 이 설명은 내 지하철 경험의 절반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버나드 윌리엄스는 《수치심과 필연성》(Shame and Necessity, 1993)에서 다른 각도를 제시한다. 수치심의 핵심은 실제로 보는 타인이 아니라 '상상된 관찰자(imagined observer)'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도 없을 때도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데, 그건 이미 타인의 시선이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철학자의 입장은 표면적으로 비슷해 보이지만 결론은 상당히 다르다. 사르트르에게 수치심은 외부로부터 온다. 타인이 사라지면 수치심도 사라진다. 반면 윌리엄스에게 수치심은 자아 구조 자체의 문제다. 타인이 없어도, 그 타인을 이미 내면화한 자아가 스스로를 심판한다. 무인도에 혼자 있어도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면, 수치심은 타인의 부재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자아의 기능이다. --- ## 📚 루스 베네딕트가 틀린 이유 이쯤에서 한 번쯤 들어봤을 구분이 등장한다. '수치 문화(shame culture) 대 죄 문화(g...
🌀 철학적 허무주의 극복법: 니체는 의미를 창조하라 했고, 카뮈는 그것도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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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연봉 협상이 끝난 다음 날이었다. 숫자는 좋았다. 전년보다 12% 올랐고, IT 스타트업 팀장은 메시지에 "탁월한 성과"라는 단어를 썼다. 그런데 강남역 9번 출구 계단을 올라오면서 나는 멈춰 섰다. 뭔가가 와야 하는 것 같은데. 기쁨이든 뿌듯함이든.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계단 위로 사람들이 밀려갔고, 나는 지하철 환기구에서 나오는 매캐한 바람을 맞으며 그게 뭔지 한참 생각했다. 그 느낌에 이름이 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철학적 허무주의 극복법](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철학적+허무주의+극복법)을 두고 철학자들이 오래 논쟁했고, 니체가 1882년에 먼저 진단을 내렸다. --- ## 💀 신은 죽었다—그리고 우리가 죽였다 『즐거운 학문』 §125에서 니체는 한낮에 등불을 들고 광장을 뛰어다니는 미친 사람을 등장시킨다. "신을 찾는다"고 외치는 그를 사람들이 비웃자 그는 말한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이 대목을 종교 비판으로만 읽으면 절반을 놓친다. 니체가 말하는 '신'은 절대적 가치 체계 전부를 가리킨다. 이성, 진보, 도덕, 민족주의—우리가 신 대신 붙잡으려 했던 것들. 연봉 12% 상승도 그 자리에 있었다. 객관적 지표, 측정 가능한 성과, 타인이 부여하는 "탁월함"이라는 라벨. 그것들이 의미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걸 계단 위에서 몸으로 알았다. 니체는 이 허무를 두 가지 반응으로 나눈다. 유고집에서 나온 구분인데—여기서 짚고 가자면, 흔히 알려진 『권력에의 의지』는 니체 사후에 여동생 엘리자베트 푀르스터-니체가 편집한 판본으로, 반유대주의적 맥락이 덧씌워졌다. 니체 자신은 『에케 호모』에서 "나는 독일인이 아니다, 나는 좋은 유럽인이다"라고 썼고, 독일 민족주의를 반복해서 조롱했다. 나치가 전용한 "권력에의 의지"와 니체가...
🕯️ 아케디아 철학: 중세 수도사의 한낮 악마가 현대 번아웃보다 정확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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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쯤이었다. 노트북 화면에 기획서가 열려 있었고, 커서는 빈 문서 위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그 기획서가 사흘째 같은 자리에 있었다는 거다. 처음에는 '지금 집중이 안 돼서', 그 다음엔 '아이디어가 아직 무르익지 않아서'라고 자신을 설득했다. 하지만 사흘이 지나도 커서는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그게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무언가 더 깊은 곳이 꺼져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이 감각에 이미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그것도 1,700년 전에 붙여진 이름이. --- ## 😈 한낮의 악마가 찾아올 때 4세기 이집트의 수도사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Evagrius Ponticus)는 수도원 생활을 위협하는 여덟 가지 악한 생각을 목록으로 정리했다. 그중 여섯 번째가 아케디아(ἀκηδία, acedia)였다. 그는 이것을 '한낮의 악마'라 불렀다. 정확히 오전 10시에서 오후 2시 사이, 태양이 가장 높이 떠 그림자가 짧아지는 시간대에 찾아온다고 했다. 에바그리우스의 묘사는 섬뜩할 정도로 구체적이다(*De Octo Spiritibus Malitiae*). 아케디아에 사로잡힌 수도사는 태양이 천천히 움직인다고 느낀다. 하루가 마치 50시간처럼 느껴진다. 창밖을 자꾸 내다본다. 다른 수도사가 찾아왔으면 하고 바란다.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면 더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감각이 밀려온다. 이것은 게으름이 아니었다. 수도사는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몸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의미를 담는 그릇이 깨진 것이었다. 에바그리우스는 이 상태를 단순한 피로나 나태와 구분하여 독립적인 악으로 분류했고, 그것이 수도 생활을 끝장내는 가장 위험한 것이라고 경고했다. --- ## 🔥 번아웃이라는 현대의 진단 1974년 심리학자 허버트 프로이덴버거(Herbert Freudenberger)가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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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아크] 제작 효율 최적화 위한 영지 세팅
### 1. 대성공 확률 증가 vs. 제작 수수료 절감 - **대성공 확률 증가**: 대성공 확률이 2% 증가해도 실제 효과는 크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기본 대성공 확률 5%에 2% 증가를 적용해도 실질적인 효과는 0.1% 증가에 불과합니다. - **제작 수수료 절감**: 제작 수수료를 2% 절감할 경우, 제작할 때마다 발생하는 골드 비용을 직접적으로 줄일 수 있어 비용 절약 효과가 훨씬 큽니다. - 결과적으로, 제작 수수료 절감이 대성공 확률 증가보다 약 10배 더 많은 이득을 제공합니다. 따라서 대성공 확률보다는 수수료 절감에 집중하는 것이 권장됩니다. --- ### 2. 효율적인 영지 세팅을 위한 이득 극대화 세팅 - 영지 내 필수 세팅 아이템으로 "곡예사의 대기실," "찬란한 소원 나무," "여신의 가호"가 추천됩니다. - **곡예사의 대기실**: 마리샵에서 블루 크리스탈로 구매할 수 있으며, 기본적인 제작 효율을 높이는 데 필수 아이템입니다. - **찬란한 소원 나무**: 수수료 절감을 제공하여 제작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어 이득 극대화에 도움이 됩니다. - **여신의 가호**: 미술품 42개를 모아 획득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제작 효율을 제공합니다. 여유가 있다면 필수로 장착하는 것이 좋습니다. - 여신의 가호 대신, **곡예사의 무기 진열대**를 구매해 사용할 수도 있으며, 경제적인 선택지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 ### 3. 의상 세팅 (선택적 적용) - 특정 의상을 착용하면 제작 효율이 약간 증가하지만, 최적의 의상 옵션은 없기 때문에 필수는 아닙니다. 크리스탈 비용이 부담스러울 경우 생략 가능하며, 다른 세팅을 우선적으로 강화하는 것이 좋습니다. - **드레스룸 이용**: 크리스탈을 사용하여 드레스룸에서 특정 NPC와의 호감도로 얻을 수 있는 의상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 **추천 의상**: 페...
[로스트아크] 로스트아크 생활 도구 옵션
### 생활 도구 옵션 및 확률 | **옵션** | **고급** | **희귀** | **영웅** | **전설** | **유물** | |-------------------------|-------------|------------|-------------|-------------|-------------| | 기본 보상 추가 획득률 | 5~10% | 10~20% | 15~30% | 20~40% | 25~50% | | 희귀 재료 획득률 | 5~10% | 10~20% | 15~30% | 20~40% | 25~50% | | 특수 획득 확률 | 0.5~1% | 1~2% | 1.5~3% | 2~4% | 2.5~5% | | 내구도 미차감 확률 | 2.5~5% | 5~10% | 7.5~15% | 10~20% | 12.5~25% | | 채집속도 | 1.25~2.5% | 2.5~5% | 3.75~7.5% | 5~10% | 6.25~12.5% | | 미니게임 난이도 하락 | 1 | 1~2 | 1~2 | 2~3 | 2~3 | | 미니게임 보상 획득 확률 | 5~10% | 10~20% | 15~30% | 20~40% | 25~50% | | 낚시 캐스팅 등급 | 1~2 | 2~4 | 4~6 | 6~8 | 8~10 | --- ### 생활 키트 옵션 정리 - 영웅 등급 생활 도구가 제작 비용면에서 효율 좋음 | **생활 유형** | **필수 옵션 (빨간색)...
한국 핵무장 논의와 방위산업 관련주: 핵무기 개발 과정과 유망 종목 분석
한국의 독자적 핵무장 논의가 주요 이슈로 떠오르며 방위산업 관련 주식들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특히, 핵무기 및 방어 관련 기술력을 보유한 기업들이 관심을 끌고 있어 투자자들에게 큰 잠재적 수혜가 예상됩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 가능성 등 외교적 변화는 이러한 방위산업 관련주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 참조: https://gussconomy.tistory.com/entry/한국-핵무장-시나리오-관련주-투자-포인트-총정리 ) --- ### 핵무기 생산과정 요약 #### **핵연료 확보** : 고농축 우라늄-235 또는 플루토늄-239와 같은 핵분열 물질을 확보하는 과정입니다. - **우라늄 농축**: 우라늄-235의 비율을 약 90% 이상으로 높이는 과정입니다. - **플루토늄 생산**: 원자로에서 우라늄-238을 중성자로 포획하여 플루토늄을 생성하고 이를 화학적으로 분리합니다. #### **폭발 장치 개발** : 확보한 핵연료를 폭발할 수 있도록 설계된 장치입니다. - **충돌 방식 (Gun-type)**: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해 두 덩어리를 빠르게 결합시켜 핵분열을 유도합니다. - **내부 압축 방식 (Implosion-type)**: 고폭압력으로 플루토늄을 압축하여 임계 질량을 초과하도록 합니다. ####. **무기화 및 배치** - 폭발 장치를 무기 형태로 조립하여 배치 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미사일, 폭격기 등에 탑재될 수 있도록 설계합니다. --- ### 핵심적인 부분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핵연료 확보**와 **폭발 장치 개발**입니다. - **핵연료 확보**: 핵분열 물질 확보가 핵무기 개발의 필수 조건입니다. 우라늄 농축과 플루토늄 생산은 고도의 기술력을 요구하며, 보안과 국제적인 감시가 강화된 부분입니다. - **폭발 장치 개발**: 핵연료가 있어도 이를 효과적으로 폭발시키는 장치가 없다면 무기화가 불가능합니다. 압축 방식 등 폭발 장치 개발 기술이 핵무기의 폭발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