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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면 속 얼굴은 왜 나를 채우지 못하는가 — 후설의 상호주관성으로 읽는 디지털 시대의 고독

## 🚇 지하철에서 낯선 확신 출퇴근 지하철을 타다 보면 가끔 이상한 확신이 든다. 수십 명이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데, 오히려 그 밀도 속에서 더 혼자인 기분. 이상한 건, 그 기분이 막연하지 않다는 거다. 아주 선명하다. 옆 사람의 팔꿈치가 내 갈비뼈에 닿는데도, 그 사람은 내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감각을 어떻게 설명할까 오래 생각했다. '현대인의 소통 부재'라든가 '스마트폰이 인간관계를 망쳤다'는 식의 설명은 왠지 헐거웠다. 그러다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을 다시 읽으면서, 내가 찾던 언어를 만났다. 그는 타인이 '나타나는' 방식을 해명하려 한 철학자다. 그리고 그 해명 안에는, 우리가 지금 겪는 고립의 구조가 이미 들어 있었다. --- ## 👥 타인이 타인이 되는 순간 후설의 『데카르트적 성찰』 5성찰은 철학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 중 하나다. 핵심 질문은 이거다. 나는 어떻게 눈앞의 저 몸이 단순한 물체가 아니라 또 다른 주체임을 아는가? 그의 답은 '유비적 통각(analogische Apperzeption)'이다. 내 몸은 내가 안에서 경험하는 살아있는 몸(Leib)이다. 저 바깥의 몸이 내 몸과 구조적으로 닮아 있을 때, 나는 그 몸에 내 살아있음을 이전(移轉)시킨다. 후설은 이것을 5성찰 §51에서 '짝짓기(Paarung)'라 부른다. 외부의 몸은 수동적 연합을 통해 내 살아있는 몸과 짝을 이루고, 그로부터 타인의 자아성이 구성된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이 과정이 추론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 사람도 고통을 느끼겠지' 하고 논리적으로 유추하는 게 아니다. 상대방이 찡그리는 순간 내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짝짓기는 몸이 몸을 알아보는 선반성적(前反省的) 사건이다. 후설은 뇌과학 이전에 이 구조를 현상학적으로 포착했다. --- ## 📵 짝짓기가 실패하는 조건 그렇다면 지하철 안에서 왜 그 짝짓기가 일...

🔥 번아웃의 바닥에서 니체를 읽었다 — 아모르파티, 운명을 '참는 것'이 아닌 '사랑하는 것'

## 💡 3년을 잃고 나서야 알게 된 것 2021년 겨울, 내가 직접 기획해서 제안했던 신규 서비스 안이 임원 회의에서 전면 폐기됐다. 3년이었다. 초안부터 사용자 인터뷰, 프로토타입, 재수정, 재재수정까지 — 내 시간의 대부분을 쏟아부은 3년이 회의록 한 줄로 끝났다. 그날 저녁 나는 술도 마시지 않았다. 그냥 집에 가서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이후 몇 달이 가장 이상했다. 몸은 출근했는데 나머지 자아는 어딘가에 두고 온 것 같았다. 가깝게 지냈던 친구 두 명과 연락이 끊겼다 — 정확히는 내가 먼저 연락을 안 했다. "요즘 어때?"라는 질문을 받을 에너지가 없었다. 대답하는 것도, 괜찮은 척 하는 것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도 전부 소모였다. 번아웃이란 게 이런 건지 그때 처음 알았다. 무기력한 게 아니라, 무언가를 느끼는 일 자체가 무거워지는 상태. --- ## 🔥 저항이 나를 더 지치게 하고 있었다 그 시기에 내가 자꾸 빠졌던 생각은 자기혐오였다. '내가 부족해서 그 일이 실패한 거야', '애초에 이 분야에 맞지 않는 사람인 거야.' 이런 내러티브가 쉽게 끊기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자기비판이 우리를 지치게 하는 데는 신경과학적 이유가 있다. 심리학자 크리스틴 네프(Kristin Neff)는 텍사스대학교에서 자기연민과 자기비판의 차이를 장기적으로 연구해왔다(대표 논문: "Self-compassion: An alternative conceptualization of a healthy attitude toward oneself", *Self and Identity*, Vol. 2, 2003). 그의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 것은, 자기비판이 뇌의 위협 감지 시스템을 활성화한다는 점이다 — 외부의 적을 마주했을 때와 동일한 생존 반응. 스트레스 호르몬이 올라가고, 편도체가 과활성화되며, 결국 우리는 자기 자신과의 전쟁 루프에 갇힌다. 내가 번아웃 상태에서 자기혐오를 반복...

💔 회피형 연인을 2년간 사랑하면서 내가 배운 것들 — 니체와 붓다가 내 안에서 충돌한 이유

## 💔 그는 항상 한 발짝 뒤에 있었다 나는 2년 가까이 한 사람을 좋아했다. 정확히는, 좋아하면서 동시에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 사람은 만날 때는 다정했지만 헤어지면 증발했다. 연락을 보내면 하루 뒤에 짧은 답이 왔고, 자주 보자고 하면 슬그머니 대화 주제를 바꿨다. 처음엔 내가 뭔가 잘못한 줄 알았다. 나중에서야 그게 나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데, 그게 오히려 더 어려웠다. 잘못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탓하나. 그때 나는 존 볼비(John Bowlby)의 애착이론을 다시 꺼내 읽었다. 회피형 애착자는 어린 시절 정서적 요구가 반복적으로 묵살되면서 친밀감 자체를 위협으로 학습하게 된다. 가까워지면 본능적으로 물러서는 것,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신경계의 문제다. 마리오 미쿨린서(Mario Mikulincer)와 필립 셰이버(Philip Shaver)의 연구(2007)는 이걸 생리학적으로 보여준다. 회피형 애착자는 친밀도가 높아질수록 코르티솔 수치가 오르고, 동시에 그 불안을 의식에서 차단하는 억제 전략을 쓴다. 즉 그들은 불안을 느끼면서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작동한다. 당신이 "왜 표정이 없어?"라고 물을 때 그 사람이 "잘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 아니다. 진짜로 접근이 차단돼 있는 것이다. --- ## ⚡ 집착은 생명력이다 — 니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 여기서 나는 니체를 꺼낸다.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는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이 아니다. 자신의 잠재성을 향해 끊임없이 팽창하려는 생의 충동이다. 그 렌즈로 보면, 누군가를 갈망하는 집착은 나약함이 아니라 생명력의 과잉이다. 내가 그를 원했던 것은 내 안에 쏟을 곳을 찾는 에너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는 이렇게 묻는다 — 지금 이 순간이 무한히 반복된다 해도 그것을 원하겠는가? 그 고통스러운 기다림, 읽씹, 어정쩡한 만남을 영원히 반복하겠는가? 그것을 감수하고 "...

💔 짝사랑 감정 정리하는 법 — 끝내려 할수록 더 깊어지는 역설, 철학이 알려주는 진짜 해법

## 🍂 경복궁역 3번 출구, 가을 저녁 2023년 10월이었다. 은행나무 잎이 막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저녁, 나는 경복궁역 3번 출구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그 사람과 마지막으로 걸었던 골목 입구였다. 그날 그 사람은 내가 한 말에 미소를 지었고, 나는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잊어버렸다. 그냥 나란히 걸었다.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채. 그 이후 나는 6개월간 그 역을 피해 다녔다. 회사까지 두 정거장을 돌아가면서도. 노선도에서 역 이름을 보기만 해도 자동으로 그 사람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문제는, 피할수록 그 역과 그 사람이 더 단단하게 연결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이 현상에 이름이 있다는 걸 알았다. --- ## 🐻 흰 곰 실험이 증명한 것 1987년, 하버드의 심리학자 다니엘 웨그너(Daniel Wegner)는 피험자들에게 간단한 지시를 내렸다. "흰 곰을 생각하지 마세요." 결과는 예상과 반대였다. 억제를 지시받은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흰 곰을 훨씬 더 자주 생각했고, 억제를 멈춘 뒤에는 생각 빈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웨그너는 이것을 역설적 과정 이론(Ironic Process Theory)이라 불렀다. 특정 생각을 억누르려면 그것을 모니터링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 모니터링 자체가 해당 생각에 주의를 고정시킨다.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53(1), 5–13, 1987) "그 사람을 생각하지 말자"는 다짐이 효과 없는 이유는 의지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뇌가 그렇게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억압하려는 시도 자체가 신경학적으로 그 대상을 활성화한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적어도 자책의 부담은 덜 수 있다. 잊지 못하는 것이 내 의지력의 실패가 아니라는 것. 억압이 역효과라는 걸 알고 나서도 한동안 막막했다. 잊으려 하지 않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 ## 💭 니체의 불편한 ...

🧘 아파테이아 다시 읽기 — 스토아 철학에서 흔들리지 않는다는 건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 💧 세네카는 눈물을 흘렸다 스토아 철학을 처음 공부할 때 가장 이상했던 장면이 있다. 세네카가 친구 루킬리우스에게 보낸 편지들(Epistulae Morales) 63번에서 그는 썼다: "지혜로운 사람도 사랑하는 이를 잃으면 눈물을 흘린다. 다만 그 눈물은 쏟아지지 않는다." 자기 감정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던 사람이 왜 우는가. 더 이상한 건 57번 편지다. 세네카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다 공포를 느꼈다고 고백한다. "내 영혼이 움츠러들었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왔다." (EM 57.4) 스토아 현자가 터널에서 무서움을 느꼈다는 것. 나는 이걸 읽고 오히려 안심했다. 왜냐하면 나는 오랫동안 [아파테이아](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아파테이아)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번아웃이 가르쳐준 오해 2년 전 겨울, 나는 회의 도중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동료가 울먹이며 말했고, 팀장이 중요한 결정을 내렸고, 나는 그 모든 것을 유리 너머로 보듯 처리했다. 당시엔 그걸 '성숙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됐다고. Christina Maslach의 번아웃 연구(1981)가 정의하는 탈진의 3단계 중 두 번째가 **탈개인화(depersonalization)**다. 타인을 인간이 아닌 사물처럼 처리하는 방어 반응. 나는 아파테이아를 달성한 게 아니라 탈개인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이 둘은 표면이 같아 보이지만 기원이 다르다. 하나는 의도적 선택이고, 다른 하나는 신경계의 항복이다. 그 차이를 이해하려면 스토아 철학자들이 실제로 뭘 말했는지 다시 읽어야 했다. --- ## 🌊 프로파테이아: 첫 번째 파도는 우리 것이 아니다 스토아 사상의 기술 용어 중에 **프로파테이아(propatheiai)**가 있다. '선행 감정' 혹은 '첫 번째 떨림'으로 번역...

🏛️ 아파테이아: 제논이 원한 감정의 완전한 소멸과 에픽테토스가 수정한 스토아 철학의 핵심 개념

## 🏛️ 스토아 안에서 먼저 다툼이 있었다 제논이 기원전 3세기 아테네에서 스토아 철학을 창시했을 때, [아파테이아](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아파테이아)(ἀπάθεια)는 꽤 급진적인 명제였다. 현인(sophos)은 파토스(πάθος)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 여기까지는 우리가 아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다음이 문제다. 제논과 크리시포스의 초기 스토아에서 아파테이아는 '흔들리지 않음'이 아니라 말 그대로 '파토스의 부재'였다. 공포, 욕망, 쾌락, 슬픔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철학자 열전』 7권 110절에서 초기 스토아의 감정 분류를 기록하면서, 현인이 이 파토스들을 '경험하지 않는다'고 쓴다. 경험하되 지배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경험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것. 이 버전의 아파테이아는 철학적으로 순결하지만, 문제가 있다. 처음 스토아를 공부할 때 나는 그 문제를 손에 잡히지 않는 불편함으로만 느꼈는데, 나중에 플루타르코스를 읽으면서 그게 단순한 직관적 반발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 ## ⚔️ 플루타르코스가 공격한 지점 플루타르코스는 스토아에 호의적인 독자가 아니었다. 『스토아 철학자들의 모순에 관하여(De Stoicorum repugnantiis)』와 여러 논쟁적 에세이에서 그는 구체적인 역설을 지적한다. 슬픔을 느끼지 않는 인간이 어떻게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 있는가? 아파테이아가 완성된 덕(aretē)의 상태라면, 그 상태에 도달한 현인은 연민(oiktirmos)도 느끼지 않는다. 연민이 없으면 자선도 공허해지고, 공동체적 삶의 기반이 흔들린다. 플루타르코스의 비판은 감정주의의 방어가 아니었다. 그는 스토아 철학 내부의 언어로 공격했다. 스토아는 덕을 공동체적 관계 속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이해했는데, 그 덕을 완성하기 위해 제거한 것이 결국 공동체적 유대의 정서적 기반이었다는 것이다. 덕스러워지려다 덕스러울 수 있는 능력을 잃는 아이러니. ...

💘 짝사랑을 들키지 않는 심리 전략이란? 니체와 불교가 가르쳐준 감정 숨기기의 역설적 기술

스물두 살 봄이었다. 철학 독서 모임에서 우리는 매주 목요일 저녁 도서관 4층 세미나실에 모였다. 그 사람은 언제나 창가 쪽 자리에 앉았고, 발표자가 논점을 살짝 빗나가면 웃지 않고 고개를 왼쪽으로 5도쯤 기울이는 버릇이 있었다. 그 각도가 나오면 곧 "근데 그게 진짜 그 텍스트가 말하는 거예요?"라는 말이 따라왔다. 나는 그 각도를 외웠다. 그날 우리가 읽은 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그 사람이 차를 마시다가 '자기극복'이라는 단어에서 멈춰 "이게 결국 자기 자신을 이기는 건데, 이기고 나면 뭐가 남아요?"라고 물었을 때, 나는 대답 대신 노트에 뭔가를 적는 척했다. 마음이 들킬 것 같아서. --- ## 💡 감추는 것과 억압하는 것은 다르다 니체가 『짜라투스트라』에서 말한 자기극복(Selbstüberwindung)은 자신의 약함을 없애는 게 아니라, 그것을 품은 채로 더 강한 형태로 탈바꿈하는 과정이다. "모든 위대한 것은 자신을 극복함으로써 창조된다." [짝사랑 들키지 않는 심리 전략](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짝사랑+들키지+않는+심리+전략)을 감추는 행위를 이 맥락에 놓으면, 그것은 감정을 죽이는 게 아니다. 감정이 나를 지배하게 두지 않겠다는 의지다. 억압은 밀어 넣는 것이고, 극복은 그 위에 서는 것이다. 핸드폰을 꺼낸 그 순간 내가 한 건 후자에 가까웠다. 무르익지 않은 감정이 관계를 조급하게 밀어붙이는 것을 막으면서, 동시에 그 자리에 계속 있기로 한 것. 자기극복은 감정을 부정하지 않는다. 감정을 지휘하는 위치에 내가 서는 것이다. --- ## 🧘 집착에서 현존으로 불교 심리학에서 고통의 뿌리는 갈애(tanha, 渴愛)다. 팔리어 경전 『담마파다』 16장은 말한다. "집착에서 두려움이 생기고, 집착에서 슬픔이 생긴다." 짝사랑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경험하는 건 상대방이 아니다. 상대방에...

💔 슬픔이 끝나지 않는 이유 — 바르트와 프로이트가 말하는 애도의 철학

이별 직후, 나는 한동안 아무것도 버리지 못했다. 그 사람이 두고 간 칫솔 하나, 서랍 안에 접힌 메모지 한 장. 치우면 끝나는 것 같아서, 치울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책장에서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Journal de deuil*)를 꺼냈다. 1977년 10월, 어머니를 잃은 다음 날부터 1978년 9월까지 그가 작은 종이 조각들에 남긴 메모를 모은 책이다. 2009년 사후에 출판됐다. 바르트의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사망하고 2년 뒤, 그는 차에 치여 세상을 떠났다. 일기는 미완인 채로 남겨졌다. 그 미완이 오히려 슬픔의 진실에 가까운 것 같았다. --- ## 🔬 프로이트의 약속: 슬픔에는 완료가 있다 프로이트는 1917년 논문 「애도와 멜랑콜리」(*Trauer und Melancholie*)에서 정상적인 애도의 메커니즘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슬픔은 일종의 '애도 작업'(*Trauerarbeit*)이다. 잃어버린 대상에 묶어두었던 리비도를 현실 검증을 통해 서서히 거둬들이고, 그 에너지를 새로운 대상에 투자하는 것. 이 과정이 완료되면 자아는 자유로워진다. 프로이트의 모델은 구조적으로 명쾌하고, 심지어 위로가 된다 — 언젠가는 끝난다고 말해주니까. 문제는 현실이 이 모델을 거의 따르지 않는다는 거다. 리비도를 거둬들이는 '작업'을 끝낸 것처럼 느껴진 다음 날, 그 사람의 목소리를 닮은 노래가 들리면 모든 것이 다시 돌아온다. 프로이트라면 '잔여 애도'나 '회귀'로 설명하겠지만, 그 설명이 실제 경험의 무게를 충분히 담아내지는 못한다. --- ## 📔 바르트의 일기: 슬픔은 반복된다 『애도 일기』의 330여 개 메모 어디에도 애도가 단계적으로 완료되어 가는 흔적은 없다. 오히려 반복이 있다. 매일 아침 다시 시작되는 부재의 감각, 어머니가 살아있던 것처럼 느껴지다 다시 사라지는 순간들. 바르트는 이것을 병리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이 반복 자체를 기록의 대상...

💔 짝사랑 티 내지 않는 법: 니체와 불교가 서로 다른 이유로 이 감정에 말을 건네는 방식

## 🎭 연기의 피로 나는 한동안 그 사람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표정을 관리하는 법을 배웠다. 회의실에서, 복도에서, 단체 카톡창에서. 내가 연습한 건 무표정이 아니었다—무표정은 오히려 티가 나니까. 내가 원한 건 자연스러움이었고, 자연스러움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행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나는 감정을 숨기고 있는 걸까, 아니면 감정과 거리를 두는 법을 배우고 있는 걸까. 이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르다. 전자는 배우의 일이고, 후자는 철학자들이 수천 년째 씨름해온 문제다. --- ## 📚 니체를 자기계발서로 읽지 않기 위해 영원회귀(Ewige Wiederkehr)를 짝사랑에 갖다 붙이는 방식이 있다. '이 감정을 무한히 반복해도 괜찮겠냐'고 자문하면서, '아니오'라는 답이 나오면 변해야 한다는 신호로 읽는 것이다. 언뜻 그럴듯하지만 이건 니체를 자기계발서로 번역하는 가장 흔한 실수다. 니체가 『즐거운 학문』에서 영원회귀를 처음 제시한 방식을 다시 읽으면, 그것은 고통에서 탈출할 명분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그는 삶의 가장 사소한 순간, 가장 작은 고통까지 포함한 전체를 다시 살고 싶은가를 묻는다. 이 물음의 핵심은 '아니오라면 바꾸라'가 아니라, '그 삶 전체를 긍정할 수 있는가'라는 시험이다. 긍정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드러날 때, 그 사람은 아직 자신의 삶을 충분히 살고 있지 않다는 진단이 내려진다. 짝사랑에 대입하면 이렇다. 영원회귀는 이 감정을 끊어도 된다는 허가증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 감정을—버려야 할 잉여가 아니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의 구성 요소로서—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니체식 짝사랑 전략이 있다면, 그건 '숨겨서 살아남기'가 아니라 '감당하면서 더 커지기'에 더 가깝다. --- ## 🧘 불교의 처방: 없애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는 것 불교는 다른 방향에...

🥱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하이데거는 무엇을 보았는가

## 🕒 오후 세 시와 다섯 시 사이 명절 연휴 사흘째였다. 가족들은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고 나는 거실에 혼자 남았다. 창밖의 빛이 오후 3시와 5시 사이 어딘가에 고여 있었다—너무 밝아서 졸리지 않지만, 너무 어두워서 무언가를 시작할 마음도 나지 않는 그 애매한 시간대. 리모컨을 들었다가 놓고, 핸드폰을 켰다가 껐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아무것도 나를 불러 세우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이름이 마르틴 하이데거였다. 그는 20세기 초, 바로 이 감각—아무것도 아닌 것에 사로잡힌 기분—을 철학의 핵심 주제로 끌어올린 사람이다. --- ## 🚂 하이데거가 기차역에서 시작한 것 하이데거는 1929-30년 겨울학기 프라이부르크 강의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Die Grundbegriffe der Metaphysik*, GA 29/30)에서 권태(Langeweile)를 세 가지 층위로 해부한다. 그가 첫 번째 사례로 드는 것은 작은 간이역이다. 기차가 네 시간 늦는다.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잡지를 읽어 보지만 이내 시들해진다. 시계를 본다. 삼십 분이 지났을 뿐이다. 이 상태를 하이데거는 *von etwas gelangweilt sein*(무언가에 의해 지루해진다)이라 부른다—지루함의 원인이 외부에 특정되어 있는 형태다. 두 번째 층위는 더 미묘하다. 지인의 저녁 식사 자리. 음식도 나쁘지 않고 대화도 흐른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길, 문득 자신이 그 자리에서 지루했다는 걸 깨닫는다. 무엇이 지루했는가를 꼭 집을 수 없다. 하이데거는 이를 *sich langweilen bei etwas*(무언가를 하면서 스스로 지루해진다)로 구별한다. 대상이 아닌 나 자신 쪽으로 시선이 이동한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진정으로 주목하는 것은 세 번째 형태다. --- ## 💭 "그냥 지루하다"는 말의 철학적 무게 *Es ist einem langweilig.* 번역하면 "그냥 지루하다...

💘 짝사랑 들키지 않는 법: 감정을 숨기면서도 가까워지는 철학적 전략

## 🎭 들키는 건 가면이 얇아서가 아니다 지난 겨울, 그 사람과 편의점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나는 손에 커피를 들고 있었고, 그 사람은 막 문을 열고 나오던 참이었다. "어, 왔어?" 그 사람이 먼저 말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잘 지냈냐고 물었다. 5분쯤 서서 이야기했다. 헤어지고 나서 두 블록을 걷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는 그 5분 동안 목소리 톤을 세 번 고쳐먹었고, 손에서 커피를 다른 손으로 옮기는 것도 한 번 망설였고, 말을 끝낼 타이밍을 두 번 놓쳤다. 들키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온몸이 바빴다. 그게 문제였다. 나는 감정을 숨기는 데 에너지를 쓰고 있었다. 감정을 소화하는 게 아니라. 니체는 《선악의 저편》 40절에서 이렇게 썼다. "심오한 것은 모두 가면을 사랑한다(Alles, was tief ist, liebt die Maske)." 그런데 이 문장의 방향이 중요하다. 니체가 말한 순서는 이렇다—먼저 깊이가 있고, 그 깊이가 스스로 가면을 만들어낸다. 가면을 쓰기로 결심해서 깊어지는 게 아니다. 억지로 표정을 관리하려는 사람은 결국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티 난다. 깊이 있는 사람은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아도 감정이 밖으로 쉽게 흘러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질문이 바뀐다. '어떻게 숨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깊어질 것인가'. --- ## 💭 감정을 처리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불교에서 집착의 원인을 설명할 때 '우파다나(upādāna, 取)'라는 개념을 쓴다. 팔리어 원어로는 '연료'와 '집착' 두 가지 뜻을 동시에 가진다. 불씨가 계속 타오르려면 연료가 있어야 하듯, 집착도 계속 투입되는 무언가가 있어야 유지된다. 짝사랑에서 그 연료는 대개 가능성에 대한 반추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한 건 혹시…", "오늘 눈이 마주쳤는데…" 같은 생각들. 우파다나는 감정 ...

⏳ 슬픔에도 속도가 있다 — 베르그송의 '지속'으로 읽는 애도의 시간학, 그리고 회복의 개인차

# 슬픔에도 속도가 있다 — [애도의 시간학](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애도의+시간학) ## 🕰️ 왜 나는 아직도 거기 있는가 몇 해 전, 오래 사귀던 사람과 헤어진 직후였다. 가장 친한 친구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이별을 겪었는데, 두 달 만에 훌훌 털고 새 일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여섯 달이 지나도 아직 같은 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당혹스러웠던 건 슬픔 자체가 아니었다. '왜 나는 아직도 여기 있지?'라는 질문이 더 무거웠다. 회복에 정해진 일정이 있고, 나는 그 일정을 어긴 사람 같은 기분. 친구가 두 달 만에 괜찮아졌다면 나도 두 달이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계산은 처음부터 틀렸다. --- ## ⏳ 시계가 측정할 수 없는 것 앙리 베르그송은 1889년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에서 시계 시간과 의식이 경험하는 시간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그가 '지속(durée)'이라고 부른 것은 단순히 '주관적으로 느리거나 빠른 시간'이 아니다. 핵심은 기억의 구조에 있다. 베르그송은 기억을 두 층위로 나눴다. 하나는 '습관 기억(mémoire-habitude)' — 반복을 통해 몸에 새겨진 것들. 매일 아침 같이 커피를 마셨다면, 그 시간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몸의 루틴이 된다. 다른 하나는 '순수 기억(souvenir pur)' — 과거의 한 순간이 지금 이 순간과 공존하는 상태. 오래된 장면이 불쑥 현재로 침투하는 경험, 그것이 순수 기억의 작동 방식이다. 이 구도에서 보면, 애도의 속도 차이는 의지의 차이가 아니다. 잃어버린 관계가 얼마나 많은 습관 기억 안에 박혀 있었느냐의 차이다. 친구의 연애는 짧았고, 두 사람만의 공유된 루틴이 적었다. 내 경우는 달랐다 — 퇴근 후 전화, 주말 장보기, 아플 때 연락하는 순서. 이런 것들이 무너지면 슬픔이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한다. 습관의 자리들이 허물어지...

🌿 아타락시아: 에피쿠로스가 정원을 만든 이유 — 새벽 세 시 불안에서 영혼의 고요를 찾는 여정

## 🌙 새벽 세 시의 목록 몇 달 전, 새벽 세 시에 눈이 떠졌다. 이유는 없었다. 발표도 없고, 마감도 없었다. 그냥 천장을 보고 있었는데 머릿속에 이상한 목록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답장 안 한 메시지, 연락이 끊긴 사람, 삼 년 전에 내가 한 말 한 마디. 특이한 건 그 목록이 불안의 이유가 아니라 불안의 증상이었다는 거다. 불안이 먼저 왔고, 뇌가 그것을 설명하려고 재료를 끌어모은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에피쿠로스를 다시 읽었다. 처음이 아니었다. 대학 때 한 번 훑었고, [아타락시아](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아타락시아)—영혼이 흔들리지 않는 상태—라는 개념도 알고 있었다. 근데 이번엔 다른 질문이 생겼다. 이 사람이 처방한 게 금욕도 아니고 은둔도 아닌데, 어떻게 이 고요에 도달한다는 거지? --- ## 🌿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끊으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에피쿠로스에 대해 오래 가지고 있던 이미지는 틀렸다. 쾌락을 철학의 목표라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적게 원하고 쉽게 만족하라"는 메시지—그러니까 세련된 금욕주의. 근데 원전은 다르다. 그는 "쾌락은 행복한 삶의 시작이자 끝이다(ἡδονὴν ἀρχὴν καὶ τέλος λέγομεν τῆς μακαρίας ζωῆς)"라고 명시적으로 썼다. 그러면서 아타락시아—마음의 교란이 없는 상태—를 최고의 쾌락으로 정의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건 쾌락의 종류 구분이 아니라, 그가 불안의 원인으로 무엇을 지목했는가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에 대한 공포, 신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끝없는 사회적 인정 욕구가 불안의 삼대 원천이라고 봤다. 새벽 세 시의 내 목록을 대입해보면 세 번째였다—더 잘 했어야 했는데 못한 것들,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것들에 대한 반추. 근데 에피쿠로스의 처방이 "더 적게 원해라"가 아니었다는 게 흥미롭다. 그는 아테네 교외에 정원(케포스)을 사서 거기서 살았다. 혼자가 아니...

💘 짝사랑 상대의 관심사를 역이용해 첫 대화를 여는 법 — 연출된 우연도 진심이면 사랑이다

## 💭 그 사람이 말한 한마디를, 나는 두 달 동안 곱씹었다 어느 오후, 그 사람이 옆자리 사람에게 말했다. "요즘 일본 미니멀리즘 인테리어에 완전 빠졌어." 내게 한 말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말이었고, 나는 그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 뒤로 나는 무라카미 다케시의 에세이를 찾아 읽었다. 와비사비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 주말에 아무 이유 없이 MUJI 매장을 혼자 돌아다녔다. 그게 '연구'였는지 '집착'이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두 달 후, 공용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나는 말했다. "그거 알아? 와비사비에서 '사비'가 원래 녹슬고 낡은 것에서 오는 아름다움이래. 처음엔 이상하다 싶었는데, 생각할수록 맞는 말 같아." 그 사람이 멈췄다. "어떻게 알아?" 그 순간, 나는 철학을 생각했다. --- ## ⚡ 니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기다림은 이미 포기다 니체는 수동성을 경멸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는 반복해서 묻는다 — 너는 너 자신을 극복했는가. 그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는 타인을 굴복시키는 욕망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창조적 충동이다. 짝사랑에서 가장 약한 형태의 의지는 '기다림'이다. 마음에 들면 언젠가 알아줄 것이라는 믿음 — 니체에게 이것은 노예 도덕의 언어다. 노예 도덕은 반응한다. 타인의 행동을 기다린 뒤 그것에 기대어 자신을 정의한다. 그 사람의 말 한마디를 기억하고, 직접 읽고, 매장을 걷고, 생각을 만들어낸 행위 — 니체는 이것을 Selbstüberwindung, 자기 극복이라 불렀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 사람을 통해 내가 몰랐던 아름다움의 형태를 배웠고, 그 배움이 나를 조금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첫 대화는 그 변화의 증거를 내미는 것이다. 하지만 이 해석에는 불편한 균열이 있다. --- ## 🪷 붓다가 끼...

💔 짝사랑을 혼자 삭히는 사람들의 심리 — 침묵을 선택한 이유

## 💬 고백하지 않는다는 것의 정확한 의미 나는 한 사람을 2년 동안 좋아했다. 그 사람이 핸드폰을 꺼낼 때 손목의 각도가 기억날 정도로 오래, 그리고 조용히. 고백하지 않은 이유를 나는 오래 '신중함'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그게 거짓말이었다는 걸 안다. 신중한 게 아니었다. 나는 통제권을 원했다. 고백하지 않는 한, 그 관계는 내가 상상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했다.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지, 거절할지, 무안해할지 — 그 모든 불확정성을 나는 침묵으로 막아두었다. 고백은 상대에게 결정권을 넘기는 행위다. 침묵은 그 결정권을 내 손에 쥐어두는 것이다. [짝사랑 혼자 삭히는 사람 특징](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짝사랑+혼자+삭히는+사람+특징) 중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은 두려움 이전에 이것, 즉 관계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유지하려는 의지다. --- ## 🔥 니체가 이 침묵에 던지는 질문 니체는 영원회귀를 이렇게 제시한다. "지금 이 순간을 무한히 반복해서 살기를 원하는가?" 짝사랑에 적용하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이 침묵을, 이 망설임을, 이 혼자 삭히는 감정을 — 영원히 반복해서 살기를 원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니체의 요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영원히 반복하기 싫다고 느껴지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충분히 살고 있지 않다는 신호다.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는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충동이다. 침묵으로 관계를 통제하는 것은 표면상 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장의 회피다. 상대에게 진실을 내보이고, 거절당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 — 그것이 니체적 의미에서 삶을 긍정하는 행위다. 침묵은 관계를 가상의 공간에 가두어 둠으로써 '지지 않는' 상태를 유지한다. 그것은 힘이 아니라 힘의 흉내다. 니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고백의 두려움보다, 고백하지 않는 삶이 영원히 ...

🥱 스마트폰이 훔쳐간 것: 하이데거의 '깊은 권태'는 왜 지금 불가능한가

## 🔋 배터리가 나간 열다섯 분 작년 봄, 지하철에서 배터리가 나갔다. 합정에서 이대까지, 열다섯 분 남짓 되는 거리였다. 충전기도 없었고, 옆 사람에게 폰을 빌릴 만큼 급한 일도 아니었다. 그냥 앉아 있었다. 처음 5분은 괜찮았다. 창밖을 봤고, 맞은편 사람들 표정을 훑었다. 그런데 그다음 5분부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시간과 내가 직접 맞닥뜨리고 있다는 감각이 슬금슬금 불안처럼 올라왔다. 지루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지루함에 도달하기도 전에 멈춰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중에 이 경험을 곱씹다가 하이데거의 [권태의 현상학](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권태의+현상학)을 떠올렸다. 그리고 왜 그 열다섯 분이 철학적으로 생산적인 지루함으로 이어지지 못했는지가 궁금해졌다. --- ## 🧠 하이데거가 구분한 권태의 세 층위 1929년에서 1930년 사이,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Die Grundbegriffe der Metaphysik)이라는 강의를 했다. 그 강의의 상당 부분이 '권태'(Langeweile) 분석에 할애되어 있는데, 하이데거는 권태를 세 층위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무언가에 의해 지루해지는 것'(Gelangweilt-sein-von)이다. 기차가 두 시간 늦는다, 약속이 취소됐는데 이미 카페에 와 있다. 지루함의 원인이 특정 상황에 있고, 그 상황이 나를 붙잡고 있다. 빠져나오고 싶지만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다. 두 번째는 '무언가와 함께하며 스스로 심심해지는 것'(Sich-langweilen-bei)이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자리에 앉아 있을 때, 우리는 심심함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 핸드폰을 꺼내 든다. 하이데거는 이를 'die Zeit vertreiben'—시간을 '몰아내기'라고 부른다. 권...

🗣️ 나는 왜 그 말을 삼켰는가 — 파레시아와 SNS의 진실 발화 구조

2022년 겨울, 나는 트위터 입력창 앞에서 약 3분을 멈춰 있었다. 대학 선배가 특정 복지 정책을 비판하는 긴 스레드를 올렸는데, 그가 인용한 OECD 수치가 원래 맥락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된 걸 알고 있었다. 정정 댓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손가락이 멈췄다. '이 선배는 팔로워가 3만 명이다. 그 팔로워들이 내 프로필을 클릭할 것이다. 내 과거 트윗들이 보일 것이다. 어떤 트윗이 오해받을 수 있다.' 나는 결국 댓글을 쓰지 않았다. 사흘 뒤 그 스레드는 3,200번 이상 리트윗됐다. 오류 포함으로. 그 3분 동안 내 안에서 무슨 계산이 이루어졌는지, 나는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 ## 🗣️ [파레시아](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파레시아): 위험을 감수하는 발화라는 기술 푸코는 1983년 버클리 강연—후에 《담론과 진실》(Discourse and Truth)로 출판된—에서 '파레시아(parrhesia)'를 단순한 진실 발화가 아닌 윤리적 실천으로 정의한다. 파레시아적 발화자는 세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말해야 하고, 그 발화로 인해 자신에게 어떤 위험—사회적, 관계적, 물리적—이 돌아올 것임을 알아야 하며, 그럼에도 말해야 한다. 푸코는 이것을 명시적으로 "용기의 문제"라 부른다. 아무런 대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파레시아가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파레시아는 구체적인 공간을 전제했다. 발화자는 특정 청자—왕, 시민 집회, 철학 학파의 제자—앞에서 말했다. 맥락이 있었고, 청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으며, 위험의 크기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푸코가 파레시아를 'tekhnē(기술, 실천)'라고 부른 것은 이 때문이다. 진실 말하기는 추상적 덕목이 아니라 구체적인 조건 속에서 연습되고 숙련되는 기예(技藝)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SNS라는 공간에서 이 기술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아니, 작동할 수 ...

🗣️ 파르헤시아: SNS 시대, 우리는 왜 진실을 말하지 않는가

## ✍️ 오늘도 나는 지우기를 눌렀다 몇 달 전의 일이다. 어떤 사회적 이슈에 대해 생각을 정리한 뒤, 트위터에 글을 올리려고 했다. 입력창에 세 문단쯤 써 내려갔을 때 손가락이 멈췄다. *이게 오해받으면 어쩌지.* 해명 스레드를 달아야 할 수도 있다. 맥락이 잘린 스크린샷이 돌아다니면? 결국 전체 선택, 삭제를 눌렀다. 그 순간을 나는 신중함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진짜 그랬을까. --- ## 🗣️ [파르헤시아](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파르헤시아): 말하는 자가 위험을 감수하는 행위 미셸 푸코는 1982년부터 1984년까지, 생애 마지막 강의들에서 고대 그리스 개념 하나를 파내기 시작했다. 강의록은 《자기와 타자의 통치》와 《진실의 용기》로 출간되었는데, 그 중심에 '파르헤시아(parrhesia)'가 있었다. pan(모두) + rhema(말)의 합성어, 문자 그대로는 '모든 것을 말하기'다. 푸코는 파르헤시아를 네 조건으로 정의한다. 화자는 자신이 말하는 것이 진실임을 믿는다. 그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자신에게 위험하다. 그 위험을 알면서도 의무감으로 말한다. 그리고 이 발화는 더 강한 위치에 있는 상대를 향한다—약자가 강자에게 말하는 구조다. 이 마지막 조건이 핵심이다. 파르헤시아는 강자가 약자에게 진실을 꺼내놓는 행위가 아니다. 발화로 인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더 강한 자에게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푸코는 이것을 아첨(kolakeia)의 정반대로 놓는다. 아첨꾼은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골라 한다. 파르헤시아스트는 상대가 듣기 싫어할 말을 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낀다. --- ## 🏛️ 민주 광장이 파르헤시아를 삼킨 방식 푸코 분석에서 가장 예리한 대목은 여기서부터다. 그는 파르헤시아가 민주정 아테네에서 꽃피었지만, 바로 그 민주정에 의해 내파(implosion)했다고 분석한다. 아테네의 민회(에클레시아)는 모든 시민에게 발언권을 부여했다. 광장에...

🖤 우리는 왜 두 달이 지나서야 슬퍼하는가 — 애도 철학이 말하는 상실, 감정, 그리고 치유

## 🧃 편의점 오렌지 주스와 두 달짜리 슬픔 친구 J를 잃은 건 2019년 겨울이었다. 장례식장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 마비감이 오히려 무서웠다. 3일 뒤 화장, 일주일 뒤 복직. 동료들이 "힘들었겠다"고 했고 나는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그게 전부였다. 두 달이 지난 화요일, 나는 편의점에서 J가 좋아하던 오렌지 주스를 보다가 그 자리에 서서 울어버렸다. 상한 음식 먹은 것처럼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J는 말이 빠르고 웃음이 컸다. 전화하면 항상 배경에 뭔가 끓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밥을 안 먹으면 못 견디는 사람이었다. 그 구체적인 질감들이 이제 어디도 없다는 것 — 그게 슬픔의 정체였다. 두 달을 나는 그걸 미뤄뒀던 거였다. --- ## ⏳ 슬픔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착각 한국 공무원 근조 휴가는 3일이다. 민간기업도 대부분 비슷하다. 이 숫자가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거슬러 올라가면 산업화 이후 노동력 관리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죽음을 처리하는 시간이 제도 안으로 포섭된 것이다. 프로이트는 1917년 「애도와 우울증(Mourning and Melancholia)」에서 '애도 작업(Trauerarbeit)'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정신적 투자를 서서히 철수해가는 내적 과정이 건강한 애도라는 것. 문제는 그 '서서히'가 얼마나 걸리는지 프로이트조차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사회는 그 불명확한 과정에 3일이라는 숫자를 붙였다. 제도는 슬픔의 적정 분량을 이미 결정해놓고 있었다. --- ## 🔍 5단계 모델이 숨기는 것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가 1969년에 제시한 '애도의 5단계 —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는 이후 수십 년간 심리학 교과서를 지배했다. 그런데 이 모델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연구들이 쌓였다. 조지 보나노(George Bonanno)는 2004년 *Ameri...

💓 짝사랑이 들킬 것 같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 그 순간 니체와 붓다의 완전히 다른 대답

## 💓 진동이 테이블을 타고 왔다 회의실에서였다. 그 사람이 내 왼쪽 두 자리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고, 나는 방금 그 사람에게 보낸 카카오톡 — 농담인 척 썼지만 사실은 고백에 가까웠던 그 메시지 — 이 화면에 뜰까봐 핸드폰을 뒤집어 놨다. 그런데 진동이 테이블을 탔다. 내 심장도 같이 탔다. 그 0.1초. 그 사람이 고개를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도 제대로 못 봤다. 숨을 참았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회의가 끝나고 화장실 거울을 보는데 얼굴이 평소랑 달랐다. 뭔가를 극도로 억누른 사람의 얼굴. 그때 이런 질문이 들어왔다. 이 순간이 이렇게 생생한 건 왜일까. 답하려다가, 두 개의 목소리가 완전히 반대 방향에서 들어왔다. 하나는 니체였고, 하나는 붓다였다. --- ## ⚡ 니체는 물을 것이다: 이 순간을 영원히 반복하겠느냐고 《즐거운 학문》 341절에서 니체는 이런 상상을 제안한다. "어느 날 밤, 악마가 네 등 뒤로 슬며시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을, 너는 앞으로도 무한히 반복해서 살아야 할 것이다." 니체는 이 명제를 공포로 던진 게 아니라 시험으로 던졌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긍정할 수 있다면, 영원히 반복해도 좋다고 말할 수 있다면 — 그게 자기 삶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진동의 순간을 영원히 반복하고 싶은가. 이상하게도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은 괴로웠다. 심장이 목까지 올라오는 느낌, 들킬지 모른다는 공포, 아무렇지 않게 연기해야 했던 긴장감. 그런데 동시에 그 0.1초는 내가 최근 몇 달 중 가장 살아있다고 느낀 순간이기도 했다. 니체의 논리는 여기서 불편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내가 그 순간 감정을 숨기려 했던 것 — 핸드폰을 뒤집고, 표정을 관리하고, 목소리 톤을 유지하려 했던 것 — 은 그가 말한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의 발현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이 개념을 억압이 아닌 창조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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