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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짝사랑 상대 퇴사 후 연락해도 될까: 무상과 영원회귀로 짜 본 첫 메시지와 답장 읽는 법

📑 목차 🚪 퇴사한 날, 이름 하나가 먼저 사라진다 ✉️ 첫 메시지는 새 관계의 언어로 쓴다 ⏳ 언제 보낼지, 근거가 있는 만큼만 🔁 영원회귀로 메시지를 걸러 내기 💬 답장을 읽는 법, 그리고 오지 않을 때 📚 참고 자료 🚪 퇴사한 날, 이름 하나가 먼저 사라진다 짝사랑에 관한 자료를 읽다 보면 비슷한 고민을 자주 보게 된다. 회사에서 오래 좋아하던 사람이 퇴사했는데 이제 연락해도 되느냐는 질문이다. 처음에는 용기의 문제라고 여겼다. 그런데 더 들여다보니 언어의 문제에 가까웠다. 퇴사한 날 사라지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고 '동료'라는 이름이다. 매일 마주치던 이유, 말을 걸 핑계, 탕비실에서 나누던 짧은 대화의 틀이 한꺼번에 없어진다. 불교에서는 이런 변화를 무상(無常)이라고 부른다. Tricycle의 해설 에 따르면 팔리어 니짜(nicca)는 늘 같고 영원한 것을 가리킨다. 무상(anicca)은 여기에 부정 접두사를 붙인 말이어서 '덧없음'보다 '한결같지 않음', '변하는 것'으로 옮기는 편이 더 정확하다고 한다. 같은 글에는 "우리가 사물에서 얻는 만족은 그것이 변할 때 무너지게 되어 있다"는 문장도 있다. 나는 이 문장을 첫 메시지를 쓰는 원칙으로 읽었다. 동료라는 관계에서 얻던 만족은 퇴사와 함께 이미 끝났다. 그러니 첫 메시지를 그 관계의 언어로 쓰면 어색해질 수밖에 없다. ✉️ 첫 메시지는 새 관계의 언어로 쓴다 퇴사한 사람에게 연락하려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고르는 핑계는 업무다. "그 파일 어디 있는지 아세요?", "후임자가 물어보는데요" 같은 말이다. 보내기는 쉽다. 하지만 이런 메시지는 상대를 이미 끝난 역할로 다시 불러들인다. 상대는 옛 직장 사람으로서 답장할 것이고, 대화도 그 틀 안에서 끝나기 쉽다. 업무 질문이 정말 필요하다면 그건 따로 처리하자. 마음이 담긴 연락에는 쓰지 않는 편이 낫다. 새 관계의 언...

💔 짝사랑 거리두기 타이밍 정하는 법: 2주 관찰, 5번 중 3번 규칙, 그리고 니체와 붓다의 조언

📑 목차 ⏳ 타이밍보다 먼저 정해야 할 것은 판단 단위다 📊 신호별 거리 조절, 날짜와 횟수로 적어 보기 📱 붓다가 보는 것: 휴대폰을 여는 손 ⚔️ 니체는 붓다를 존중했고, 그래서 거부했다 🔁 4주가 끝났을 때 던질 질문 하나 📚 참고 자료 ⏳ 타이밍보다 먼저 정해야 할 것은 판단 단위다 짝사랑 거리두기 타이밍을 다룬 글을 찾아 읽다가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사흘은 연락하지 마라", "답장은 한 시간 뒤에" 같은 숫자는 많았다. 그런데 그 숫자가 어디서 나왔는지 설명하는 글은 거의 없었다. 기준 없는 숫자는 결국 그날 기분이 정한다. 기분대로 움직이면 거리두기는 하루 만에 무너진다. 그래서 숫자보다 판단 단위를 먼저 정하기로 했다. 여기서 불교의 무상(無常)이 의외로 실용적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이 말을 짝사랑에 대 보면 결론은 간단하다. 상대의 오늘 반응도 변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다. 답장이 짧았던 저녁 한 번은 피곤한 하루였을 수도 있고 마음이 식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하나만 보고는 둘을 구분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메시지 한 통을 판단 단위로 쓰지 않는다. 단위는 2주, 그리고 그 사이에 오간 대화 몇 번이다. 2주는 연구에서 나온 숫자가 아니라 내가 정한 기준이다. 평범한 지인 사이라면 대화가 다섯 번쯤 오갈 만한 시간이다. 그 정도면 흐름을 읽을 수 있고, 마음이 지치기 전에 끝난다. 📊 신호별 거리 조절, 날짜와 횟수로 적어 보기 2주 동안 대화할 때마다 세 가지만 기록한다. 누가 먼저 말을 걸었는지, 상대의 답장이 질문으로 끝났는지(대화를 이어 갈 마음이 있는지), 만남 제안을 거절할 때 다른 날짜를 냈는지다. 최근 대화 다섯 번 가운데 세 번 이상 같은 방향이면 그걸 '흐름'으로 본다. 두 번 이하면 아직 잡음이다. 단계 들어가는 조건 실행 기간 관찰 처음 시작할 때 지금 빈도를 그대로 두고 세 가지만 기록 2주 줄이기 5번 중 3번 이상 내가 먼...

💬 연인 답장 말투가 달라지면 왜 이렇게 불안할까: 마침표 하나를 두고 붓다와 니체에게 물은 것

📑 목차 📱 '응.' 한 글자에 저녁이 기울어지는 이유를 찾아보다가 ⚖️ 왜 하필 나쁜 쪽으로 읽히는가 🏹 두 번째 화살, 그리고 니체가 이 처방을 의심한 이유 📝 해석하기 전에 해 보는 세 단계 점검 📚 참고 자료 📱 '응.' 한 글자에 저녁이 기울어지는 이유를 찾아보다가 "응 알겠어~"로 오던 답장이 어느 날 "응."으로 오면, 그 점 하나 때문에 저녁 내내 마음이 한쪽으로 기운다. 그냥 내 성격 탓이라고 넘겨 왔다. 그러다 자료를 찾아보면서 이 반응을 실험으로 다룬 연구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미국 빙엄턴대 Celia Klin 연구팀이 2016년 『Computers in Human Behavior』 55권에 낸 논문(Gunraj 외)이다. 초대하는 문자에 "Okay", "Sure", "Yup"처럼 한 단어로 답할 때 끝에 마침표가 붙으면 덜 진심으로 읽혔다. 같은 대화를 손으로 쓴 쪽지 형태로 보여 줬을 때는 그런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이 결과를 우리 이야기로 그대로 옮기기에는 걸리는 데가 있다. 참가자는 미국 대학생이었고, 읽은 문장은 연인이 아닌 상대의 짧은 영어 대답이었다. 한국어 문자에는 단서가 훨씬 촘촘하게 깔려 있다. '응'과 '응.'의 차이만 있는 게 아니다. 'ㅇㅇ'인지, 물결표가 붙었는지, 늘 따라오던 'ㅎㅎ'가 빠졌는지, 평소 쓰던 '~요'가 사라졌는지까지 다 읽힌다. 이런 단서를 연인 관계 안에서 직접 측정한 연구는 내가 확인한 범위에서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이 논문에서 가져올 수 있는 건 '마침표는 차갑다'는 규칙이 아니다. 표정과 억양이 빠진 매체에서는 작은 표기 하나도 감정 신호로 읽힌다는 점, 그리고 매체만 바꿔도 그 효과가 사라질 만큼 그 읽힘이 맥락에 크게 기대고 있다는 점 정도다. ⚖️ 왜 하필...

💼 같은 팀 동료 짝사랑, 티 안 내고 버틴 6개월과 니체·붓다 사이에서 9월에 내린 결론

📑 목차 🖥️ 3월, 모니터 너머에 한 사람이 앉았다 🧍 티를 안 내는 건 마음이 아니라 몸의 규칙이었다 🪷 사랑하는 것에서 슬픔이 생긴다 🔥 니체는 죄책감 대신 다른 일을 시켰다 🔁 6개월 차, 영원회귀에게 물었다 🖥️ 3월, 모니터 너머에 한 사람이 앉았다 올해 3월, 옆 파트에 있던 사람이 우리 팀으로 옮겨 왔다. 자리는 내 모니터 대각선 너머였다. 처음 몇 주 동안은 그냥 일 잘하는 동료였다. 4월 첫 주 주간회의에서 내가 대충 넘긴 데이터 오류를 그 사람이 조용히 짚었다. 그러면서 나를 깎아내리지 않고 "이건 제가 원본을 늦게 드려서 그런 것 같아요"라고 덧붙였다. 그날 퇴근길 지하철에서 그 문장을 세 번쯤 다시 떠올렸다. 같은 팀 짝사랑은 도망갈 데가 없다. 주 5일, 하루 아홉 시간을 같은 슬랙 채널과 같은 회의실에서 보낸다. 검색창에 ' 짝사랑 티 안 내는 법 직장 동료 '를 쳐 본 밤도 있었다. 나는 6개월 동안 티를 내지 않고 버텼고, 9월에 한 가지를 결정했다. 그동안 가방에는 책이 두 권 들어 있었다. 『법구경』과 니체였다. 🧍 티를 안 내는 건 마음이 아니라 몸의 규칙이었다 처음에는 마음만 다스리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마음은 말을 듣지 않았다. 효과가 있었던 건 몸에 거는 규칙이었다. 내가 지킨 규칙은 다섯 가지다. 메신저 답장은 다른 동료와 같은 속도로 한다. 어느 날 그 사람 메시지에만 30초 안에 읽음 표시가 뜬다는 걸 알아채고 소름이 돋았다. 그 뒤로 알림을 끄고, 다른 사람 메시지처럼 20~30분마다 몰아서 확인했다. 커피는 사 주지 않는다. 사게 되면 팀 전체 몫으로만 산다. 회의에서 그 사람이 말할 때 내가 몇 번 고개를 끄덕이는지 의식한다. 다른 사람이 말할 때도 똑같이 끄덕인다. 회식에서는 옆자리나 정면에 앉지 않고 대각선에 앉는다. 정면에 앉으면 눈이 너무 자주 마주친다. 퇴근 시간을 맞추지 않는다. 어쩌다 같이 나가게 되면 편의점에 들렀다 간다. ...

💬 짝사랑 상대 퇴사 후 연락 핑계를 찾던 나, 니체와 붓다 덕분에 보내려던 한 문장을 지웠다

📑 목차 🎂 마지막 출근날, 나는 박수만 쳤다 🪷 붓다가 먼저 물었다, 너는 무엇을 붙잡으려 하느냐고 📸 니체의 질문 앞에서 사진을 골랐다 🌡️ 답장의 온도는 어떻게 읽을까 ☕ 그래서 나는 어떻게 되었나 🎂 마지막 출근날, 나는 박수만 쳤다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출근한 날은 금요일이었다. 오후 다섯 시쯤 팀원들이 케이크를 들고 모였고, 나는 맨 뒤에 서서 박수를 쳤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 사람은 모두에게 똑같이 인사했고, 나한테도 똑같았다. 그날 밤 카카오톡 대화방을 열었다. 마지막 대화는 석 달 전 회의실 예약 건이었다. 같은 사무실에 있을 때는 연락할 이유가 굳이 필요 없었다. 복도에서 마주치고, 점심 메뉴를 고르고, 모니터 너머로 눈이 마주치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회사를 나가자 우리 사이에 남은 건 대화방 하나뿐이었다. 그 방은 누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조용히 목록 아래로 밀려난다. 그 주말 내내 짝사랑 상대 퇴사 후 연락 핑계 를 찾았다. 처음 떠올린 문장은 이랬다. "혹시 ○○ 거래처 정산 파일, 어느 폴더에 두셨어요?" 사실 나는 그 파일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 글은 결국 그 문장을 지우게 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 붓다가 먼저 물었다, 너는 무엇을 붙잡으려 하느냐고 『법구경』 277게에는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sabbe saṅkhārā aniccā)"라는 구절이 있다. 예전에는 그냥 체념하라는 말로 읽었다. 그 주말에 다시 읽으니 좀 다르게 들렸다. 같은 층에서 일하던 관계는 이미 끝났고, 나는 끝난 걸 끝나지 않은 척 이어 붙이려 하고 있었다. 거짓 인수인계 질문이 딱 그랬다. 그 문장은 우리가 아직 동료라는 전제로 쓰여 있다. 받는 사람은 이미 퇴사했는데 전 직장 일로 머리를 한 번 더 써야 하고, 나는 그 수고를 이용해 대화를 튼다. 불교에서 괴로움의 뿌리로 꼽는 집착(우파다나)이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이미 바뀐...

⏳ 답장을 기다리는 쪽이 늘 지는 이유: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기다림을 니체와 불교로 읽다

📑 목차 🌙 새벽 한 시, 숫자 1이 사라진 뒤 ⏳ 기다리게 하는 쪽은 왜 늘 이기는가 🪑 아흔아홉 번째 밤, 의자를 옆구리에 끼고 🪷 『법구경』은 물러서지 않는다, 대신 자애가 있다 ♾️ 이 기다림을 영원히 되풀이해도 좋은가 🌙 새벽 한 시, 숫자 1이 사라진 뒤 지난달 어느 새벽에 나는 카톡 대화창 하나를 스무 번쯤 열었다 닫았다. 보낸 메시지 옆의 1은 밤 열한 시 사십 분쯤 사라졌는데, 그 뒤로는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읽었다는 사실 하나로 그렇게 많은 해석이 생길 줄은 몰랐다. 피곤해서 잠들었겠지 하다가 금세 '읽고도 답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구나, 나는'으로 넘어갔다. 거기서 다시 내가 보낸 문장의 어미 하나를 붙들고 늘어졌다. '했어?' 말고 '했어ㅎㅎ'라고 보냈으면 달랐을까 하는 것들. 그날 책장에서 꺼낸 책이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었다. 1977년 쇠유(Seuil) 출판사에서 나온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이고, 나는 김희영 선생의 번역으로 처음 읽었다.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기다림 , 그러니까 '기다림(Attente)' 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 식으로 옮기면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릴 때 사소한 지연(약속, 전화, 편지, 귀가) 때문에 일어나는 고뇌의 소용돌이"다. 원문은 "Tumulte d'angoisse suscité par l'attente de l'être aimé, au gré de menus retards (rendez-vous, téléphones, lettres, retours)." 오십 년 전 파리 사람이 쓴 이 목록에 요즘 같으면 '읽씹' 하나만 더 넣으면 될 것 같았다. ⏳ 기다리게 하는 쪽은 왜 늘 이기는가 이 장에서 바르트가 가장 차갑게 쓴 문장은 이것이다. "기다리게 하기, 모든 권력이 변함없이 누려 온 특권, ...

💭 짝사랑 상대 인스타 스토리 반응 타이밍, 니체의 긍정과 붓다의 내려놓음 사이에서 찾은 답

📑 목차 👀 조회자 목록에는 몇 번 봤는지 나오지 않는다 🔥 붓다는 끄라고 하고, 니체는 긍정하라고 한다 ⏳ 24시간이라는 무상(無常), 플랫폼이 정해 둔 타이밍 💬 부담스러운 반응과 자연스러운 반응, 실제로 갈리는 지점 🌀 영원회귀로 보내고, 무집착으로 기다린다 👀 조회자 목록에는 몇 번 봤는지 나오지 않는다 작년 겨울 새벽 1시였다. 좋아하던 사람이 카페 창가 사진을 스토리에 올렸고, 나는 그 사진을 세 번 돌려 봤다. 화면 아래 하트를 누를지 말지 고민하다가 30분이 지났다. 그때 가장 무서웠던 건 이 생각이었다. '세 번이나 본 게 티 나면 어쩌지.' 나중에 알았는데, 인스타그램 스토리 조회자 목록에는 누가 봤는지만 나오고 몇 번 봤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한 번 보든 열 번 보든 그 사람 목록에는 내 이름이 한 줄로 남을 뿐이다. 세 번 돌려 본 건 나만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이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내가 두려워한 건 상대의 시선이 아니었다. 내 안에서 커지는 마음을 스스로 들킬까 봐 겁이 났던 거다. 그날부터 짝사랑 상대 인스타 스토리 반응 타이밍 문제를 연애 기술로만 보지 않고, 내 욕망을 어떻게 다룰지의 문제로 보게 됐다. 그 과정에서 가장 도움이 된 건 서로 정반대 말을 하는 두 사람, 니체와 붓다였다. 🔥 붓다는 끄라고 하고, 니체는 긍정하라고 한다 법구경 212~216게는 같은 구조를 되풀이한다. "사랑하는 것에서 슬픔이 생기고, 사랑하는 것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사랑하는 것에서 벗어난 이에게는 슬픔이 없는데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새벽 1시의 나에게 그대로 들어맞는 말이었다. 하트 하나에 30분을 쓴 이유는 결국 두려움이었고, 그 두려움은 좋아하는 마음에서 나왔다. 불교의 처방은 분명하다. 갈애(渴愛)가 괴로움의 뿌리이니 그 불을 끄라는 것이다. 니체는 반대 방향으로 간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이 사랑받을 만한 것은 그가 건너가는...

🪑 94일 동안 연락만 하고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 베칭 심리를 니체와 붓다 사이에서 읽다

📑 목차 📱 94일 동안 받은 카톡, 한 번도 잡히지 않은 약속 🪑 벤치에 앉혀 두는 사람의 속마음 📖 니체가 말한 '사랑이라 불리는 것들' ☸️ 붓다는 놓으라 하고, 니체는 긍정하라 한다 🌅 벤치에서 일어나던 날 📱 94일 동안 받은 카톡, 한 번도 잡히지 않은 약속 작년 가을에 휴대폰 대화 백업을 정리하다가 한 사람과 나눈 채팅방을 열었다. 첫 메시지부터 마지막 메시지까지 94일이었다. 스크롤을 끝까지 내리는 데만 한참 걸렸다. 검색창에 '만나'를 쳐 보니 결과는 여섯 개가 나왔다. 그중 네 번은 내가 먼저 꺼낸 말이었고, 나머지 두 번은 그가 "다음 주쯤 보자"라고 한 것이었다. 그 다음 주는 끝내 오지 않았다. 그는 늘 밤 열한 시 무렵에 "뭐 해?"로 말을 걸어왔다. 내가 "이번 토요일에 시간 돼?"라고 물으면 "아 이번 주 좀 정신없어ㅠ 담에 꼭!"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약속을 미룬 날에도 대화는 새벽 한 시까지 이어졌다. 거절당한 건지 아닌지도 모르는 채로 잠드는 밤이 하나둘 쌓여 갔다. 이런 관계를 부르는 이름이 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베칭(benching)이라는 말이다. 운동선수를 벤치에 앉혀 두듯 경기에는 내보내지 않으면서 명단에서 지우지도 않는 걸 가리킨다. 2016년 무렵 미국 온라인 매체 맨 리펠러(Man Repeller)의 칼럼에서 이 이름이 붙고 널리 퍼졌다고 알려져 있다. 고스팅은 상대가 사라져서 괴롭다. 베칭은 상대가 사라지지 않아서 괴롭다. 🪑 벤치에 앉혀 두는 사람의 속마음 그 사람이 나를 싫어했던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적당히 좋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 '적당히'에 있었다. 베칭하는 사람한테 연락은 돈이 거의 안 드는 투자다. 메시지 몇 줄만 보내면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확인을 받는다. 만남은 사정이 다르다. 시간을 내야 하고 옷을 골라야 하고, 무엇보다 이 관계가...

🦶 발이 낯설어지던 순간, 후설의 손과 메를로퐁티의 살(chair) 개념으로 다시 읽는 몸의 감각

🦶 깁스를 풀고 처음 디딘 바닥 작년 봄, 발목 인대가 끊어져서 6주를 깁스로 지냈습니다. 정작 이상했던 건 깁스를 풀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물리치료실에서 처음 그 발로 바닥을 디뎠을 때, 발이 분명 제 몸에 붙어 있는데도 남의 발처럼 느껴졌습니다. 시선으로는 내 발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지만, 체중을 실으면 어디에 힘을 줘야 할지 몸이 계산을 못 했습니다. 치료사는 "감각 지도가 흐려진 거예요"라고 짧게 설명했는데, 그 한마디가 오래 남았습니다. 나는 여전히 내 몸을 '가지고' 있는데, 왜 어느 순간 그 몸이 되지 못했던 걸까요. ✋ 손이 손을 만지는 순간, 후설이 본 균열 이 질문에 처음 정밀한 언어를 붙인 사람은 후설입니다. 『이념들 II』 36–37절에서 후설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만지는 상황을 분석합니다. 왼손은 '만져지는' 대상(Körper)으로 느껴지고, 동시에 오른손은 '만지는' 주체(Leib)로 느껴집니다. 그런데 주의를 옮기면 이 둘은 자리를 바꿉니다 — 왼손이 감각의 주체가 되고 오른손이 대상이 되는 식으로. 후설은 이 오갈 수는 있지만 결코 동시에 완전히 겹치지는 않는 현상을 이중감각(Doppelempfindung)이라 불렀습니다. 재활실에서 치료사가 바깥에서 제 발목을 눌러 "느껴지세요?"라고 물었을 때 있었던 그 미묘한 시차, 만져지는 감각과 만지는 감각이 어긋나던 그 틈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다만 제 경우엔 그 틈이 병적으로 늘어나 있었던 겁니다. 🌫️ 하이데거의 침묵, 메를로퐁티의 응답 흥미로운 건 후설 이후 이 문제가 한동안 방치됐다는 점입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다자인의 실존 분석을 펼치면서 몸에 대해서는 각주 하나로 스치듯 언급하고 넘어갑니다. 신체성은 그 자체로 고유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만 적어두고, 정작 그 문제를 다루지는 않습니다. 이 공백을 정면으로 파고든 사람이 메를로퐁티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 직장에서 세 번 고쳐 쓴 슬랙 문장으로 읽는 파레시아, 위험을 감수한 진실 말하기

⌨️ 화요일 밤, 커서만 깜빡였다 지난주 화요일이었다. 로드맵 리뷰 코멘트를 슬랙에 남기려고 세 번을 썼다 지웠다. 처음 쓴 문장은 이랬다. "이 지표를 이렇게 정의하면 3분기 숫자가 왜곡될 것 같은데요." 두 번 읽고 지웠다. 다음엔 "제가 잘 몰라서 그런데, 이 지표 정의가 좀 이상해 보여서요"로 바꿨다. 그것도 지웠다. 결국 보낸 문장은 "지표 정의 관련해서 잠깐 통화 가능하실까요?"였다. 하고 싶었던 말은 셋 다 같았는데, 위험은 매번 조금씩 줄었다. 세 번째 문장에는 애초에 내 의견이 없었다.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파레시아 라는 개념이 정확히 저 세 문장 사이의 거리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 파레시아는 용감한 말이 아니라 값을 치르는 말이다 푸코가 1983년 버클리 강연에서 정리한 파레시아는 그냥 "솔직함"이 아니다. 그는 파레시아를 수사학(레토릭), 아첨(콜라케이아)과 구분하면서 세 가지 조건을 건다. 화자가 그 말을 참이라고 진짜로 믿을 것, 그 말을 함으로써 관계나 지위나 신변에 위험이 실제로 발생할 것, 그리고 그 위험을 감수하는 게 화자의 의무처럼 느껴질 것. 이 셋 중 하나라도 빠지면 그건 파레시아가 아니라 그냥 발언이다. 수사학자는 청중을 설득하기 위해 자기가 안 믿는 말도 유창하게 할 수 있다. 아첨꾼은 위험 없이 듣기 좋은 말만 한다. 파레시아스트만 위험을 안고 믿는 바를 말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하나 있다. 회사들이 "심리적 안전감"을 만들어서 솔직한 피드백 문화를 조성하겠다고 할 때, 그건 사실 파레시아의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시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위험을 없애면 용기도 필요 없어진다. 위험이 없는 곳에서 하는 말은 편하게 하는 말이지, 목숨 걸고 하는 말이 아니다. 푸코의 정의대로라면 완벽하게 안전한 조직에서 나오는 발언은 엄밀히 파레시아가 아니다. 그냥 정보 공유다. 안전과 용기는 같은 방향의 두 단계가...

🌿에피쿠로스는 왜 80므나짜리 땅에 '정원' 공동체를 세웠을까 - 쾌락주의자라는 오해 바로잡기

🍽️ 오마카세 앞에서 에피쿠로스를 소환한 친구 얼마 전 친구가 한 끼에 이십만 원짜리 오마카세를 예약해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게 에피쿠로스지, 인생 뭐 있어." 나도 그때는 그냥 웃고 넘겼는데, 집에 가는 길에 계속 걸렸다. 정작 에피쿠로스 본인은 평생 그런 자리에 앉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세운 에피쿠로스 정원 공동체 의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느낀 건, 우리가 그 이름을 빌려 정당화하는 삶과 그가 실제로 살았던 삶 사이의 거리가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거였다. 🏡 정원은 얼마였을까 - 80므나짜리 반란 기원전 306년, 에피쿠로스는 아테네 성벽 바로 바깥, 아카데메이아로 가는 길목의 땅을 샀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전하는 값은 80므나. 당시 숙련 노동자 하루 품삯이 대략 1드라크마였고 100드라크마가 1므나였으니, 단순 계산으로도 노동자 한 명이 몇 년치 임금을 꼬박 모아야 살 수 있는 땅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 값비싼 부동산에 지은 건 신전도 강당도 아니고 채소밭과 몇 채의 숙소였다. 세네카가 서신 21번에서 전하는 정원 입구 문구는 이렇다. "나그네여, 여기서는 좋을 것이오. 여기서 최고선은 쾌락이니." 광고 카피처럼 읽히지만, 정작 안에서 벌어진 생활은 채소를 직접 길러 먹는 자급 공동체였다는 게 세네카가 이 문구를 인용한 맥락이다. 그는 이 말을 조롱하려고 인용한 게 아니라, 겉과 속이 다르다는 걸 짚으려고 인용했다. 👩‍🏫 레온티온이 남긴 것 - 정원의 여자들 정원의 특이함은 채소밭보다 구성원 명단에 있다. 레온티온은 원래 헤타이라, 그러니까 아테네의 고급 매춘부로 일하다가 정원에 들어와 철학자가 된 여성이다. 그가 테오프라스토스를 반박하는 글을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정작 그 글은 전하지 않고 키케로가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이걸 언급하며 남긴 게 유명하다. 키케로는 "일개 창녀 주제에 테오프라스토스를 공격하는 글을, 그것도 제법 아티카식 문체로 썼다...

💔 권태기 철학적 의미: 문자를 봐도 아무렇지 않던 밤, 사랑이 습관 벗고 존재가 되는 순간

❄️ 겨울, 이자카야에서 나는 그 사람의 문자를 봐도 아무렇지 않았다 2024년 12월 어느 목요일 밤이었다. 회사 앞 이자카야에서 그 사람 문자가 왔다. "오늘 늦어?" 딱 네 글자. 예전 같으면 화면 켜지는 진동만 느껴도 심장이 뛰었을 텐데, 그날은 그냥 "응"이라고 답하고 다시 동료랑 하던 얘기로 돌아갔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이상하게 죄책감이 밀려왔다. 사귄 지 이 년 조금 넘었을 때였다.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계속 그 생각만 했다. 이게 권태기 철학적 의미 라는 건가, 그럼 이제 끝나가는 건가. 친구한테 카톡으로 하소연했더니 "원래 3년 차쯤 다 그래, 도파민 떨어지는 거야"라는 답이 왔다. 인류학자 헬렌 피셔가 fMRI로 찍어본 결과 초기 연애의 강렬한 감정은 뇌의 보상 회로, 그러니까 중독 반응과 비슷한 부위를 자극하고 이게 대체로 시간이 지나며 가라앉는다고 한 게 바로 이 얘기다(《Why We Love》, 2004). 근데 그 설명을 들어도 마음이 편해지진 않았다. 도파민이 줄었다는 게 위로가 되나. 오히려 더 허무했다. 그럼 우리가 그때 느낀 건 진짜가 아니라 그냥 화학반응이었나. 🎭 니체라면 이 질문 자체가 틀렸다고 했을 것 같다 그 무렵 다시 펼친 책이 니체의 《즐거운 학문》이었다. 341번 잠언, 영원회귀 얘기가 나오는 부분. 어느 날 악마가 찾아와서 묻는다. 너는 지금 사는 삶을, 이 순간까지 포함해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무한히 반복해서 살아야 한다면 어떻겠냐고. 그 질문 앞에서 짓눌릴지, 아니면 "이보다 신성한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답할지, 그게 니체가 던진 시험이었다. 그날 밤 다시 그 순간을 떠올려봤다. 문자 보고 무덤덤하게 "응" 하고 넘어갔던 그 장면. 만약 그 순간이 앞으로 영원히 반복된다면, 나는 그걸 견딜 수 있을까. 이상하게도 답은 "그렇다"였다. 설렘이 없다는 것과 그 순간이 견딜 수 없다는...

🎙️ 회의에서 내가 먼저 낸 아이디어를 상사가 가로챈 날, 뒤늦게 배운 인식적 부정의의 의미

원본 텍스트에 "인식적 부정의"라는 정확한 문구가 없어서, 프리커의 책 제목(『Epistemic Injustice』) 첫 언급 부분에 한국어 병기로 자연스럽게 넣어 링크를 걸었다. 📦 바코드 두 개, 재고 하나 넉 달 차였다. 이천에 있는 물류센터에서 재고관리 업무를 맡은 지 얼마 안 됐을 때, 나는 오전 재고 대조 회의에서 손을 들고 말했다. "출고 완료 처리된 SKU 중에 바코드가 두 개짜리 상품이 섞여 있어요. 같은 바코드가 계절 상품이랑 상시 상품에 동시에 찍혀 있어서, 시스템상으로는 재고가 남아 있는데 실제 랙에는 없는 경우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다들 노트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넘어갔다. 십 분쯤 뒤, 부서장이 거의 같은 말을 했다. "제 생각엔 이중 바코드 문제 같아요. 계절 상품 SKU가 상시 코드랑 겹쳐서 잡히는 거 아닐까요." 팀장이 그 자리에서 "아, 그거네요. 바로 그거예요" 하며 화이트보드에 적었다. 그날 오후 부서장은 그 개선안으로 팀 내 공유 메일에 이름을 올렸다. 나는 그때 억울함보다 이상함을 느꼈다. 방금 내가 한 말인데. 그런데 사실 이 문제를 처음 알아챈 사람은 나도 아니었다. 그건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다. 🗣️ 증언적 부정의: 신뢰는 직급을 입고 온다 미란다 프리커는 2007년 저서 『Epistemic Injustice( 인식적 부정의 )』에서 이런 상황에 이름을 붙였다. 증언적 부정의(testimonial injustice)란, 화자의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편견 때문에 청자가 그 말에 마땅히 주어야 할 신뢰보다 적은 신뢰를 주는 것이다. 핵심은 '틀린 말을 해서' 무시당하는 게 아니라, 옳은 말인데도 말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신뢰도가 재조정된다는 점이다. 이게 감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데이터가 있다. 2017년 컴퓨터공학자 조슬린 테럴 등이 깃허브 오픈소스 저장소를 대규모로 분석한 논문에...

🔄 이 지루한 하루도 영원히 반복된다면?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으로 권태를 극복하는 방법을 찾다

🚉 신도림역 3번 출구 계단에서 2023년 7월 둘째 주 화요일 아침 8시 12분, 신도림역 2호선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는 통로였다. 그날따라 환승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있었고, 나는 늘 그렇듯 계단 왼쪽 두 번째 줄로 올라갔다 — 오른쪽은 급한 사람들이 뛰어 올라가는 자리라 왼쪽이 안전하다는 걸 몇 달 전부터 몸으로 익혔다. 계단 벽에는 몇 주째 똑같은 학원 광고가 붙어 있었고, 나는 그 문구를 이미 외우고 있었다. 그 순간 문득, 정말 아무 맥락 없이 이런 생각이 스쳤다. 어제도 이 계단을 이렇게 올랐고, 그저께도 그랬고, 아마 내일도 이 순서 그대로일 거라는. 뒤이어 조금 더 이상한 질문이 따라왔다 — 이 아침이, 이 계단이, 이 광고 문구까지 통째로 영원히 반복된다면 나는 견딜 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이 질문이야말로 니체 영원회귀 권태 극복법 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 계기였다. 이 질문은 내가 만든 게 아니다. 니체가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 341절 "가장 무거운 무게(Das größte Schwergewicht)"에서 던진 사고실험을 어설프게 흉내 낸 것에 가깝다. 원문에서 악마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을 너는 다시, 무수히 다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모든 고통과 모든 기쁨과 모든 생각과 한숨과, 네 삶의 이루 말할 수 없이 작고 큰 모든 것들이 같은 순서와 같은 차례로 네게 돌아올 것이다." 니체는 이 말을 듣고 바닥에 쓰러질지, 아니면 "너는 신이며 나는 이보다 더 신적인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답할지를 묻는다. 🌌 이건 우주론이 아니라 시험이다 학계에서는 이 영원회귀를 니체가 실제로 우주가 물리적으로 반복된다고 주장한 것으로 볼지, 순전히 윤리적·실존적 시험 장치로 볼지를 두고 오래 다퉈왔다. 발터 카우프만은 『Nietzsche: Philos...

🍎 에피쿠로스 아타락시아: 욕망을 없애라고 한 적 없다, 스크린타임 47분이 알려준 진짜 의미

📱 좋아요 38개, 확인 47번 — 스크린타임 앱이 보여준 숫자 작년 가을 어느 밤, 아이폰 설정에 들어가서 스크린타임을 열어봤다. 인스타그램: 하루 평균 47분, 앱을 연 횟수 38번. 눈뜨자마자, 지하철에서, 화장실에서, 자기 직전까지 하루에 38번씩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아래로 당기고 있었다는 얘기다. 뭘 보려고 그렇게 여러 번 들어갔는지 스스로도 설명이 안 됐다. 새 글이 딱히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손이 먼저 움직였다. 그날 앱을 지웠다. 사흘을 버텼다. 나흘째 되던 날 다시 깔았다. 부끄러워서 아무한테도 말 안 했는데, 이 글을 쓰면서 처음 털어놓는다. 문제는 의지력이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른 채 원하고 있었다는 거였다. 이 지점에서 에피쿠로스를 다시 읽게 됐다. 🚫 "욕망을 없애라"는 말, 어디에도 없다 에피쿠로스 하면 흔히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라"는 식으로 소개된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확하지도 않다. 그가 남긴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와 「쿠리아이 독사이(주요 교설)」를 보면, 욕망을 없애라는 말은 없다. 대신 욕망을 세 가지로 쪼갰다. (국내 번역으로는 오유석 옮김 『쾌락』, 문학과지성사, 1998에 실린 두 글을 참고했다. 「쿠리아이 독사이」 29~30번 항목이 이 분류를 다룬다.) 첫째,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욕망 —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는 것. 둘째, 자연스럽지만 필수적이지는 않은 욕망 — 같은 배고픔이라도 담백한 빵 대신 굳이 값비싼 음식을 찾는 것. 셋째, 자연스럽지도 필수적이지도 않은 욕망 — 명예, 권력, 남들보다 돋보이고 싶은 마음처럼 "공허한 의견"(케노독시아, kenodoxia)에서 생겨난 것. 그런데 이 분류에서 진짜 중요한 건 세 가지로 나눴다는 사실이 아니다. 나눈 기준이다. 배고픔은 밥 한 그릇을 먹으면 몸이 알아서 멈춘다. 몸이 신호를 보낸다. 반면 명예욕이나 인정욕구는 아무리 채워도 몸에서 "이...

🧊 감정을 없애는 게 아니라, 감정이 말 걸기 전에 멈추는 법 — 스토아 아파테이아 다시 읽다

😶 2019년 11월,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해 11월, 나는 이커머스 스타트업에서 결제 시스템을 레거시 PG사에서 새 PG사로 옮기는 마이그레이션을 맡고 있었다. 블랙프라이데이 트래픽이 몰리기 전에 끝내야 했고, 한 달 동안 새벽 1시 이후 퇴근한 날을 세어보니 스물두 번이었다. 그때 내가 진짜로 바랐던 건 야근이 끝나는 것도, 프로젝트가 성공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불안도, 짜증도, 동료에게 화가 나는 마음도 그냥 다 꺼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상태에 가까워지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감정을 죽이고 나니 오히려 실수가 늘었다. 결제 금액 단위를 잘못 옮긴 커밋을 그대로 배포했고, 롤백 순서를 착각해서 두 시간짜리 장애를 냈다. 무감각은 침착함이 아니었다. 그냥 신호를 못 듣는 상태였을 뿐이다. 몇 년이 지나 스토아철학을 다시 읽으면서, 그때 내가 착각했던 게 뭔지 알게 됐다. 🧠 스토아철학이 없애려 한 건 감정이 아니라 '정념'이었다 세네카는 「분노에 관하여(De Ira)」 2권 1~4장에서 아주 구체적인 예를 든다. 용감한 군인도 나팔 소리가 울리면 심장이 뛰고, 누구든 나쁜 소식을 들으면 얼굴이 창백해지며, 장례식에서는 눈물이 절로 난다. 세네카는 이걸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반응은 "의지가 개입하기 전에" 몸에서 자동으로 일어나는 최초의 흔들림(primi motus)이라고 못 박는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걸 '프로파테이아(propatheia)'라 불렀고, 이건 죄도 아니고 없앨 수도 없는 것이라 했다. 진짜 없애려던 건 그다음 단계, 즉 그 흔들림에 "이건 끔찍한 일이다"라는 판단이 달라붙어 부풀어 오른 상태 — '파토스(pathos)', 정념이었다. 즉 아파테이아 는 심장이 안 뛰는 상태가 아니라, 심장이 뛰는 것과 그 뒤에 붙는 이야기 사이에 틈을 유지하는 상태다. 이 틈이 없으...

🌊감정을 없애지 않고도 무너지지 않는 법 — 폭풍우 속 창백해진 스토아 철학자와 아파테이아

📞 해지방어팀에서 보낸 11개월 카드사 콜센터 해지방어팀에서 11개월을 일했다. 하는 일은 단순했다. 해지하겠다는 고객에게 전화가 넘어오면, 이런저런 혜택을 안내하며 최대한 붙잡는 것. 그러니 전화를 건 사람은 애초에 기분이 좋을 리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통을 아직도 기억한다. 남자였고, 연회비 문제로 화가 나 있었다. 내가 매뉴얼대로 "고객님, 정말 죄송합니다. 확인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너 이름 뭐야. 내가 게시판에 올릴 거야. 니들 같은 애들이 무슨 상담이야." 통화는 4분쯤 이어졌다. 전화를 끊고 나서 손이 떨리는 걸 느꼈는데, 헤드셋에서는 벌써 다음 콜이 대기 중이라는 알림음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숨 한 번 쉬고 톤을 한 옥타브 올려 "안녕하세요, 고객님" 하고 받아야 했다. 그 시절 나는 이걸 "감정을 죽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틀렸다. ⛵ 폭풍우 속에서 창백해진 철학자 로마의 문헌학자 아울루스 겔리우스는 『아티카의 밤』 19권 1장에서 이런 일화를 남겼다. 배를 타고 항해하던 한 스토아 철학자가 갑작스러운 폭풍우를 만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동승객들이 놀리듯 물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더니, 왜 그렇게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소?" 철학자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안색이 변하고 몸이 움츠러드는 건 판단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러운 반응이며, 이성이 진짜로 흔들려서 "이 배는 곧 침몰할 것이고 나는 끝장이다"라고 스스로에게 동의해버리는 것과는 다른 문제라고. 이 구분이 나는 "사건과 판단 사이에 틈이 있다"는 익숙한 문장보다 훨씬 유용했다. 스토아 철학은 감정을 세 겹으로 나눈다. 프로파테이아(propatheia), 즉 몸이 먼저 놀라는 첫 반응. 파테(pathē), 그 반응에 "이건 재앙이다"라는 잘못된 판단이 들러붙어 굳...

🏋️ 아크라시아: 알면서도 못하는 이유,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답한 의지박약의 정체와 극복법

💸 27만원짜리 헬스장, 여섯 번 다닌 계산 작년 3월 둘째 주, 나는 네 번째로 같은 헬스장 앱을 지웠다. 정확히 세어보니 2019년부터 끊은 회원권이 넷, 그중 가장 오래 다닌 것도 두 달을 못 채웠다. 마지막 계약은 3개월에 27만원, 실제로 간 건 여섯 번이었다. 한 번 갈 때마다 4만 5천원씩 낸 셈이다. 문제는 몰라서가 아니었다. 나는 근력 운동이 왜 필요한지, 유산소가 대사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남들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다. 관련 책도 열 권 넘게 읽었다. 그런데도 저녁 9시, 소파에 앉는 순간이 오면 그 지식은 전혀 힘을 못 썼다. 아는 것과 하는 것 사이에 뭔가 끊어져 있었다. 🎭 소크라테스의 도박: 그건 착시일 뿐이다 이 틈을 처음 정면으로 다룬 사람이 소크라테스다.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 352b 이후를 보면 그는 꽤 대담한 주장을 편다. 알면서 나쁜 쪽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은 사실 몰랐을 뿐이다. 근거는 이렇다. 사람이 물건의 실제 크기를 눈대중으로 잘못 재듯이, 가까이 있는 쾌락은 부풀려 보고 멀리 있는 대가는 쪼그라들어 보인다. 담배 한 대의 즐거움은 지금 눈앞에 있어서 크게 보이고, 폐암의 위험은 30년 뒤에 있어서 작게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이걸 순전히 거리의 착시라고 봤고, 해법도 간단했다. 정확히 재는 기술, 그가 말한 '측정의 기술'만 있으면 착시는 교정되고, 교정되고 나면 누구도 나쁜 쪽을 고르지 않는다. 그럼 헬스장을 안 가는 나는 운동의 가치를 정확히 몰랐던 것뿐이라는 얘기다. 듣기엔 위안이 되는데, 어딘가 석연치 않다. 📖 아리스토텔레스: 배우가 시를 외우듯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위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7권에서 그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드러난 사실과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못 박는다. 그가 보기에 아크라테스, 알면서 못 하는 사람은 대전제는 갖고 있다. '단 음식은 살찌운다'는 걸 안다. 문제는 그 순간 눈앞의 케이크를 향해 ...

🎲 도덕적 운: 가스불 끄고 나온 날, '살인자'라 부르는 순간 우리는 다른 걸 하고 있다

🔥 가스불을 켜놓고 나온 날 재작년 가을, 연희동에서 반지하 자취를 할 때였다. 김치찌개를 올려놓고 편의점에 담배를 사러 나갔다가, 계산대 앞에서 친구 전화를 받고 그대로 십오 분을 떠들었다. 방에 돌아와 문을 여는 순간 났던 그 탄내를 아직도 기억한다. 냄비 바닥은 새까맣게 눌어붙어 있었고, 손잡이는 만질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그날 아무 일도 없었다. 불이 나지 않았으니까. 다음 날 출근해서 이 얘기를 웃으며 했다. "나 완전 덜렁이야." 그걸로 끝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 십오 분 사이에 화재가 나서 옆집까지 번졌다면, 나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업무상실화죄로 기소되는 사람이 됐을 거다. 내가 한 행동은 정확히 똑같다. 가스불을 켜놓고 나갔다는 것. 달라지는 건 오직 그 십오 분 동안 세상에서 벌어진 일뿐이고, 그건 내 통제 밖에 있었다. 😔 죄책감이 아니라 '떠안음' 버나드 윌리엄스가 1976년 논문 「 도덕적 운 」에서 든 예는 사실 술 취한 운전자가 아니라 트럭 운전사다. 아무 잘못도 없이 규정 속도로, 신호도 지키며 운전하던 트럭 기사 앞에 아이가 갑자기 뛰어든다. 기사는 브레이크를 밟을 새도 없다.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그는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윌리엄스가 주목한 건 바로 그 지점이다. 비난받을 이유가 없는데도, 이 사람은 평생 그 순간을 안고 산다. 윌리엄스는 이걸 죄책감(guilt)과 구별해서 'agent-regret(행위자적 회한)'이라고 불렀다. 죄책감은 "내가 잘못했다"는 판단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 트럭 기사가 느끼는 감정은 판단이 아니라 사실에서 나온다. 자기 손이, 자기 발이, 그 사건의 한가운데 있었다는 사실.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는 명제와 "나는 그 일을 저질렀다"는 명제가 그의 안에서 동시에 참이고, 이 둘은 서로를 지우지 못한다. 내 가스불 얘기가 웃음으로 끝난 건 결과가 나를 ...

🧠 작심삼일은 의지력 문제가 아니라 아크라시아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벌인 철학 논쟁

📔 다이어리에 적힌 숫자들 올해 다이어리를 다시 펼쳤다. 1월 1일 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만보기 목표 10,000보, 실제 12,340보. 책 30쪽. 탄수화물 오후 6시 이후 금지. 기상 6시 30분." 1월 2일, 9,870보. 1월 3일, 6,210보에 "야근으로 조정"이라는 메모. 그리고 1월 4일부터는 그냥 빈칸이다. 볼펜으로 그은 요일 칸만 남아있고 숫자는 하나도 없다. 재밌는 건 나는 그 계획이 왜 틀렸는지 4일째에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거다. "야식 먹으면 다음날 컨디션 무너진다"는 걸 몰라서 치킨을 시킨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문장을 속으로 되뇌면서 주문 버튼을 눌렀다. 이 지점이 이상하다. 알면서 하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 🏛️ 소크라테스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단호하게 말한다. 아무도 알면서 나쁜 쪽으로 가지 않는다고. 그가 보기에 덕은 곧 앎이다. 야식이 나쁘다는 걸 '진짜로' 안다면, 그 순간 저울은 이미 야식을 먹지 않는 쪽으로 기운다. 그러니까 치킨을 시킨 나는 사실 몰랐던 거다. 그 순간엔 "이 정도는 괜찮다"는 계산이 진짜 내 지식이었고, "야식은 나쁘다"는 문장은 그냥 입으로만 왼 말이라는 거다. 소크라테스 식으로 보면 아크라시아 , 즉 알면서도 못 하는 상태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건 서로 다른 두 개의 앎이 충돌했을 때 더 강한 쪽이 이긴 것뿐이다. 이 설명은 깔끔하지만 뭔가 억울하다. 나는 분명 "이건 나쁜 선택이다"라는 문장을 그 순간에도 의식하고 있었으니까. 💤 아리스토텔레스: 지식이 잠들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7권에서 소크라테스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는 사람이 실천적 추론을 할 때 두 개의 전제를 쓴다고 봤다. 대전제는 보편적인 것("단 것은 건강에 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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