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무것도 아닌 순간이었는데
마흔셋이 되던 봄, 회사 건물 3층 계단을 오르다가 멈췄다. 왼발을 올려놓은 채로, 손잡이를 쥔 채로. 아무 이유 없이.
멈춘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극적인 계기는 없었다. 심장이 이상했던 것도 아니고, 누가 불렀던 것도 아니다. 그냥 어떤 감각이 왔다. 머릿속에 문장이 형성되기 전의 무언가. 굳이 말로 만들자면 이런 것: 나는 언젠가 이 계단을 다시는 오르지 못하는 날이 온다. 그것은 내가 무엇을 원하든 관계없이 온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죽음을 모르는 어른은 없으니까. 하지만 아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단어로서 아는 것과 — 중력처럼, 체온처럼 — 몸 전체로 한 번 통과되는 것은. 이것이 [유한성 자각](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유한성+자각)이다.
그 감각은 한 5초 정도 있다가 사라졌다. 나는 계단을 다 올라 사무실로 들어갔고 오전 회의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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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테뉴는 말에서 떨어져야 했다
미셸 드 몽테뉴는 말에서 떨어졌다. 1570년대 어느 날, 낙마 후 의식을 잃었고 죽어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중에 그 경험을 에세이로 썼다 — 「연습에 대하여」.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돌아온 자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라면서. 죽음에 가까워지자 공포 대신 이상한 평온이 왔다고 했다.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죽음을 알 수 없다고.
나는 이 대목에서 오래 걸렸다. 몽테뉴의 말은 옳다. 그런데 동시에 뭔가 이상하다. 나는 낙마하지 않았다. 사고도 없었고, 병 진단도 없었고, 누가 죽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화요일 오전, 3층 계단이었다.
그렇다면 내 경험은 몽테뉴보다 약한 것인가? 더 얕고, 덜 실재하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게 됐다. 몽테뉴에게는 말이 필요했다. 사고라는 외력이 그를 경계 앞으로 밀어붙였다. 나에게는 계단으로 충분했다. 아무 이유 없이, 평범한 화요일에, 아무런 촉매 없이.
이게 더 불편하다. 몽테뉴의 방식이라면 '큰일이 생길 때'만 잠깐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계단으로 충분하다면 — 이 감각은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다. 그것도 아무것도 아닌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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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다음 날 나는 또 회의에 갔다
계단에서 내려온 나는 그날 오후 3시에 별로 의미 없는 보고 회의에 앉아 있었다. 계단의 감각은 없었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데 찾으면 없고 — 그런 식으로.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죽음으로부터 "도망친다"고 썼다. 바쁨으로, 잡담으로, '언젠가는'이라는 말로. 처음 이것을 읽었을 때는 비판처럼 느꼈다. 도망치지 말라는. 하지만 다시 보니 그는 비판하는 게 아니라 서술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도망이 나쁜 게 아니다. 도망 없이는 3층 계단을 오를 수가 없다. 매 순간 '나는 언젠가 죽는다'를 실감하면서 살면 아무 일도 못 한다. 도망은 삶의 기술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렇게 잊고 나서 다시 계단에서 멈추는 일이 또 온다는 것이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주차장에서도 왔다. 편의점에서 줄을 서다가도 왔다. 아무 예고 없이, 한 5초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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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서 뭐가 달라졌냐고 묻는다면
공정한 질문이다. 달라진 게 없으면 그냥 계단에서 잠깐 이상했던 거다.
달라진 것을 하나만 말하면: 나는 그해 9월 회사 내부 멘토링 프로그램 참여 요청을 거절했다. 전에는 거절을 못 했다.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라는 이유 하나로, 실질적인 교류가 거의 없는 프로그램에 이름을 올려왔다. 그해 9월에 요청이 왔을 때 거절 메일을 쓰면서 이상하게 계단이 생각났다. 이건 내가 남은 화요일 오후들로 하고 싶은 일이 아니다. 그렇게 썼다 — 실제 메일에 그렇게 쓰진 않았지만, 거절하는 이유가 머릿속에서 그렇게 형성됐다.
또 하나: 아버지한테 전화를 더 자주 건다. 아버지가 일흔다섯이고 나는 마흔셋이다. 계산을 구체적으로 한다는 게 아니라 — 그냥 전화를 미루는 이유가 예전보다 훨씬 얕게 느껴진다. "바빠서"가 더 이상 충분한 이유가 아닌 것처럼.
이것들이 극적인 변화는 아니다. 계단에서의 감각이 인생 전체를 바꿔놓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 된다. 하지만 특정 순간에, 특정 선택 앞에서 그 감각이 작동했다. 그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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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계점은 한 번이 아니다
내가 계단에서의 경험을 단 한 번의 각성으로 서술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게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감각은 또 왔다. 그리고 또 사라졌다. 주차장에서 왔다가 3주 동안 없다가, 편의점 계산대에서 왔다가 또 없어졌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오늘 오전 회의를 준비하면서는 없었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한 도망의 의미일 것이다. 도망이 기본값이고, 잠깐씩 돌아오는 자각이 예외다. 그리고 의미 있는 것은 자각 그 자체가 아니라 — 그 자각이 이번에는 어느 선택에 닿았느냐 하는 것이다.
몽테뉴는 말에서 떨어져야 했다. 나는 계단으로 충분했다. 다음번에는 어쩌면 편의점 영수증 한 장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 순간이 찾아왔을 때 — 5초 동안이라도 — 그것을 밟고 지나가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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