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 카페에서 한 사람이 내 앞에 아메리카노를 슬며시 밀어줬다. "나 두 개 시켰는데 하나 마셔."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나는 그날 밤 그 짧은 문장을 열 번도 넘게 복기했다. 혹시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일부러 두 잔을 시킨 건 아닐까.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부드럽지 않았나.
문제는 그 사람이 실제로 나를 좋아했는지가 아니다. 내가 왜 그 행동에서 사랑을 읽어냈는지 — 그게 더 이상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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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인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본성
심리학자 Fritz Heider는 1958년 저서 《The Psychology of Interpersonal Relations》에서, 인간이 타인의 행동에 반드시 원인을 귀속시키려 한다는 것을 설명했다. 우리는 사건을 그냥 두지 못한다. 그래서 귀인(attribution)을 크게 둘로 나눴다 — 내부 귀인(그 사람의 성격이나 의도)과 외부 귀인(상황이나 우연). 아메리카노를 두 잔 주문한 건 외부 귀인이 훨씬 자연스럽다. 실수로 잘못 눌렀을 수도 있고, 그냥 목이 말랐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처음부터 내부 귀인을 향해 달려갔다.
왜 그랬을까. 심리학자 Ziva Kunda는 1990년 《Psychological Bulletin》에 발표한 "The Case for Motivated Reasoning"에서 이를 설명한다. 인간은 먼저 믿고 싶은 결론을 정해놓고, 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증거만을 선택적으로 수집한다. 원인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원하는 원인을 제조한다. 나는 그 커피 한 잔이 사랑의 신호이기를 원했고, 그래서 사랑의 신호로 읽었다.
그리고 이 왜곡은 감정의 강도와 비례한다. 상대에 대한 기대가 클수록, 작은 신호도 더 크게 읽힌다. 짝사랑인 쪽이 상대의 행동을 더 강하게 오귀인하는 건 어쩌면 구조적인 현상이다. 기대가 해석을 먹고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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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니체: 착각도 힘의 증거다
이 대목에서 니체라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착각인 게 뭐가 문제냐고.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독서와 글쓰기에 대하여'에서 썼다. *"Es ist immer etwas Wahnsinn in der Liebe. Es ist aber auch immer etwas Vernunft im Wahnsinn"* — 사랑에는 언제나 약간의 광기가 있다. 그러나 광기에도 언제나 약간의 이성이 있다. 그에게 착각은 제거해야 할 오류가 아니다. 상대의 행동에서 사랑을 읽는다는 것은, 관계를 창조하려는 의지의 행위다.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는 자아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며, 오귀인은 그 확장의 한 형태다. 해석 자체가 힘이다.
《즐거운 학문》 §341에서 제시된 영원회귀의 물음도 여기서 울린다. "이 삶을 다시, 그리고 무한히 반복해서 살아야 한다면?" — 그 카페의 밤, 아메리카노 한 잔 앞에서 가슴이 뛰던 그 순간을 다시 살겠느냐고. 니체의 논리대로라면, 그 착각이 삶을 긍정하게 만들었다면 착각도 가치가 있다. 오귀인이 나를 살아있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오류가 아니라 의지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멈추지 못했다. 니체의 대답이 너무 빠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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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교: 갈애가 신호를 만든다
붓다는 고통의 원인을 갈애(taṇhā, 渴愛)라고 불렀다. 팔리어 원전 《담마짝까빠왓따나숫따(Dhammacakkappavattana Sutta)》, 초전법륜경에서 고통이 발생하는 이유는 욕망에 대한 집착이다. 갈애는 단순한 바람이 아니다 —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있다고 붙드는 행위다.
불교의 시선에서 그날 밤 내가 한 짓은 명확하다. 나는 없는 것을 만들었다. 아메리카노에는 사랑이 없었다. 사랑은 내 갈애가 투사한 것이다. 무상(anicca)의 가르침대로, 그 커피 한 잔은 그냥 커피 한 잔이다 — 잠깐 뜨겁다가 식는. 거기에 영원한 의미를 붙이는 순간, 나는 이미 집착의 영토에 들어선 것이다.
불교적 처방은 명료하다. 갈애를 알아차리고, 있는 그대로를 보면 된다. 커피는 커피로, 나눔은 나눔으로. 그런데 이게 정말로 가능한가? 더 솔직히: 이게 정말로 원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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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철학이 충돌하는 자리, 그리고 해소되지 않는 것
여기서 니체와 불교가 단순히 "다른 길로 같은 곳"을 가는 게 아님이 드러난다. 둘은 자아에 대해 정반대의 전제를 가지고 있다.
니체에게 자아는 확장되어야 한다. 사랑의 착각, 오귀인은 그 강화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창조적 행위다. 착각조차 의지의 증거이며, 긍정의 재료다. 불교에게 자아는 해체되어야 한다. 자아가 실재한다는 착각 자체가 고통의 뿌리이며, 그 자아를 보호하고 확장하려는 모든 욕망이 갈애다. 상대에게서 사랑을 읽으려는 욕망은, "내가 사랑받고 싶다"는 자아의 갈애가 밖으로 투사된 것이다.
이 둘을 "결국 같은 말"이라고 정리하는 건 거짓말이다. 니체는 나에게 그 착각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라고 한다. 불교는 나에게 그 착각을 만들어낸 자아를 먼저 의심하라고 한다. 자아를 강화하라는 명령과 자아를 해체하라는 명령은 충돌한다. 나는 어느 쪽도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 없었고, 그래서 어느 쪽도 완전히 따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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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오귀인이 만나는 자리
마지막으로 이 생각이 남는다.
만약 상대도 동시에 오귀인하고 있었다면?
그 사람도 그날 밤, 내가 커피를 받으며 웃었던 걸 복기했을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웃었지. 혹시 나를?" — 두 사람이 서로의 중립적인 행동에서 각자의 사랑을 읽고 있다면, 그 관계를 어떻게 분류해야 할까. 둘 다 착각인데, 둘 다 같은 방향의 착각이라면.
[사랑의 귀인이론](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사랑의+귀인이론)은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오귀인은 오류지만, 오류가 현실을 만들 수도 있다. 두 사람의 착각이 서로를 향해 정렬될 때, 그것을 여전히 착각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어쩌면 사랑이란 처음부터 상호 오귀인의 다른 이름이었는지도.
사랑을 읽은 건 나였다. 하지만 그 사람도 나를 읽고 있었다면 — 우리가 서로를 착각으로 읽어내는 동안, 그 사이 어딘가에 진짜가 만들어지는 건 아닐까. 니체도 붓다도 이 역할 앞에서는 잠시 말을 멈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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