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답장이 세 시간 늦게 온 밤, 나는 시계를 봤다
2023년 여름, 자정이 넘도록 휴대폰 화면만 껐다 켰다 했다. 저녁 일곱 시에 보낸 "오늘 뭐 했어?"라는 문자는 세 시간이 지나서야 "그냥 집"이라는 네 글자로 돌아왔다. 나는 답장이 오기까지 걸린 시간을 쟀고, 내가 보낸 문자의 평균 길이와 상대가 보낸 문자의 평균 길이를 속으로 비교했다. 이상한 건, 그 순간 내가 하고 있던 일이 정확히 회계 장부를 맞추는 일이었다는 점이다.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대차대조표를 그리고 있었다.
이 글은 그 대차대조표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다만 "집착을 내려놓으면 편해진다"는 결론으로 가려는 건 아니다. 그 결론에 이르는 논증 자체가 대부분 허술하다는 게 문제였고, 나도 예전 글에서 그 허술함을 그대로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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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니체가 문제 삼은 건 '누가 더 사랑하냐'가 아니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를 짝사랑에 가져다 쓸 때 흔한 방식은 이렇다. "더 많이 원하는 쪽이 약자고, 덜 원하는 쪽이 권력을 쥔다." 틀린 말은 아닌데, 이건 니체가 실제로 논증하려던 것의 결론만 훔쳐 온 것에 가깝다. 니체가 『선악의 저편』 259절에서 말하려던 건 도덕적 처방이 아니라 존재론적 진단이었다. 그는 "생명이란 본질적으로 낯설고 더 약한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손상시키고, 제압하고, 자신의 형식을 강요하며 동화시키는 것"이라고 썼고, 이걸 "착취"라 부르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이 착취를 나쁜 것이라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오히려 "착취가 없는 사회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생명의 본질을 부정하는 일"이라고 봤다. 즉 힘에의 의지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이 이미 하고 있는 작용이다.
이걸 연애에 적용한다는 게 "누가 답장을 늦게 하느냐 게임에서 이긴다"는 뜻이 아니다. 정확히는, 상대를 향한 내 욕망 자체가 이미 하나의 전유(專有) 행위라는 뜻이다. 나는 그 사람의 시간, 그 사람의 관심, 그 사람의 배타적 애정을 원했다. 이건 상대의 세계의 일부를 내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였고, 그 시도가 상대에게도 동일한 크기로 존재해야 한다고 기대한 것 자체가 이상한 전제였다. 두 개의 살아있는 힘이 우연히 똑같은 방향, 똑같은 크기로 서로를 향할 확률은 애초에 낮다. [관계의 비대칭성](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관계의+비대칭성)은 관계가 실패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것이 살아있는 두 개의 의지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증거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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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원회귀는 위로가 아니라 시험이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 341절에서 어느 악마가 밤에 찾아와 이렇게 속삭이는 상상을 한다. "네가 지금 살고 이제까지 살아온 이 삶을 너는 다시 한번, 그리고 무수히 다시 살아야만 한다. 거기에 새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모든 고통과 모든 쾌락, 모든 생각과 한숨... 이 모든 것이 같은 순서와 계기로 네게 되돌아올 것이다." 그러고는 묻는다. 너는 이 말을 듣고 바닥에 쓰러져 이를 갈겠는가, 아니면 "이보다 더 신성한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답하겠는가.
이 사고실험을 짝사랑에 가져올 때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그 문자 하나까지도 사랑해야 완성된다"는 식으로 낭만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던진 질문은 더 냉정하다. 그건 그 순간을 좋아하라는 게 아니라, 그 순간을 포함한 삶 전체를 다시 살 의지가 있느냐는 질문이다. 세 시간 늦은 답장을 포함해서, 그 답장을 기다리며 시계를 보던 나 자신을 포함해서, 그 관계가 끝내 비대칭으로 남았다는 사실을 포함해서 — 이 전체를 다시 선택할 수 있는가. 나는 이 질문 앞에서 곧바로 그렇다고 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니체라면 그 대답을 다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것을 도달해야 할 결론이 아니라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제시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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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애가 원하는 건 그 사람이 아니라 고정됨이다
불교 쪽 설명도 흔히 왜곡된다. "집착하니까 괴로운 것이다, 내려놓으면 편해진다"는 문장은 초전법륜경의 두 번째 성스러운 진리를 절반만 옮긴 것이다. 원문이 가리키는 갈애(taṇhā)는 "다시 태어남으로 이끌고 즐거움과 탐욕을 동반하며, 여기저기서 기쁨을 찾아 헤매는 갈증"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핵심은 갈애의 대상이 '그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갈애가 진짜로 원하는 건 붙잡을 수 있는 고정된 실체, 다시 말해 "이 사람은 나를 이만큼 사랑한다"는 문장을 사실로 확정 짓고 그 자리에서 멈추고 싶은 충동이다.
무아상경(無我相經)이 오온(五蘊) 중 어느 것도 "이것은 나다"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고 논증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내가 상대의 애정을 재려 했던 저울은 두 개의 고정된 실체 — '나'라는 자아와 '그 사람의 마음'이라는 실체 — 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는 가정 위에서만 작동한다. 그런데 두 항 모두 조건에 따라 매 순간 다르게 발생하는 사건(緣起)이지, 무게를 잴 수 있는 고정된 덩어리가 아니다. 그러니 비대칭을 "고친다"는 발상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애초에 잴 두 개의 물체가 거기 있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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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서 나는 지금도 시계를 본다
이쯤에서 "그러니 재지 마라, 그러면 편해진다"고 마무리하고 싶지만, 그건 이 글이 비판하려던 바로 그 패턴이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극복하라고 말한 적이 없고, 나 역시 답장 시간을 재는 버릇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다만 지금은 그 저울질이 관계의 진실을 재는 도구가 아니라 내 갈애가 만들어낸 허구의 눈금이라는 걸 알아챌 뿐이다. 그 앎이 비대칭의 고통을 없애주지는 않는다. 다만 그 고통이 상대의 잘못이라는 착각, 혹은 내가 계산을 더 잘하면 풀릴 문제라는 착각에서는 벗어나게 해준다. 오늘 밤에도 문자는 늦게 올 것이고, 나는 아마 또 시계를 볼 것이다. 그걸 그만두라고 말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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