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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포케(epoché)와 판단중지: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시대,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것이 지혜다

## ⚡ 판단이 너무 쉬워진 세계 3월이었는지 4월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지인 한 명이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는 폭로 글이 피드에 올라왔을 때, 나는 그 글을 세 번 읽었다. 댓글은 이미 수백 개가 달려 있었다. 절반은 피해자를 지지하는 분노였고, 나머지 절반은 "한쪽 말만 들어서는 안 된다"는 유보였다. 나는 공유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내렸다. 뭔가가 걸렸다. 이 감각이 비겁함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를 나는 한동안 알지 못했다. 지금은 안다. 그 감각의 이름은 [에포케(epoché)와 일상의 판단중지](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에포케(epoché)와+일상의+판단중지)다. --- ## 🏛️ 피론이 2400년 전에 발견한 것 기원전 4세기, 엘리스의 피론(Pyrrho of Elis)은 이런 주장을 했다. 어떤 주장에 대해서도 그와 동등하게 설득력 있는 반론이 존재하며, 이 사태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은 결국 판단을 보류하게 된다고. 그는 이것을 에포케—'중지' 혹은 '보류'를 뜻하는 그리스어—라 불렀다. 피론주의의 핵심 개념은 이소스테네이아(isostheneia), 번역하면 '동등한 힘'이다. 어떤 논쟁에서든 상반된 주장들을 저울에 올리면 양쪽이 정확히 동등한 무게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 균형을 정직하게 감지한 사람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 이유가 없다. 그래서 에포케가 발생한다. 판단을 내리지 않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아직 내릴 수 없다는 인식이다. 피론은 이 에포케가 아타락시아(ataraxia)—마음의 평정—로 이어진다고 봤다. 섣부른 판단이 빚어내는 불안과 후회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 ## 🤖 알고리즘이 이소스테네이아를 지운다 문제는 오늘날의 정보 환경이 이소스테네이아를 경험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SNS 알고리즘이 '나쁜 정보를 보여준다'는 비판은 너무 단순하다. 더 ...

🔍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짜 아는 것이다 — 아포파틱 인식론

## 🔍 틀렸다는 걸 깨달은 날 대학원 1학년 때였다. 나는 지도교수 앞에서 발표를 마치고 뿌듯하게 앉았다. 그런데 교수가 한마디를 던졌다. "그래서 자네는 이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겠나?" 나는 자신 있게 답했다. 막혔다. 문장이 나오다 멈췄다. 내가 그토록 유창하게 설명했던 그 개념을, 나는 사실 단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었다. 그 순간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잘 모르는 거네. 좋아, 거기서 시작하면 돼." 나는 그게 칭찬인지 모욕인지 한동안 구분 못했다. 지금은 안다. 그건 내 학문적 삶에서 받은 가장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였다. '모른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앎의 진짜 출발점이라는 것. 철학에는 이 직관을 수천 년 전부터 정교하게 다듬어온 전통이 있다. '[아포파틱 인식론](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아포파틱+인식론)(apophatic epistemology)'이라 불리는 그것이다. --- ## 🔄 부정으로 진리에 다가서는 방법 '아포파틱(apophatic)'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apophasis*, 즉 '부정해서 말하기'에서 왔다. 원래는 신학의 언어였다. 5세기 신학자 위-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Pseudo-Dionysius the Areopagite)는 신을 정의하려 할 때마다 언어가 무너진다고 보았다. 신은 '선하다'고 할 수 없다 — 우리가 아는 선함보다 무한히 크기 때문에. 신은 '존재한다'고도 할 수 없다 — 우리가 아는 존재 개념을 넘어서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무엇이 아닌가를 하나씩 지워나가는 방식으로, 역설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 방법은 신학에만 머물지 않았다. 12세기 유대 철학자 마이모니데스(Maimonides)는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안내서』에서 이렇게 썼다. "신에 대한 모든 긍정적 속성 부여는 신의 본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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