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짝사랑 티 안 나게 관리하는 법, 3주 침묵 끝에 니체와 붓다에게 커피 11잔의 답을 구하다
☕ 11번의 커피, 그리고 아무 말도 못한 3주
지난 8월 한 달 동안 나는 옆자리 팀원 것까지 커피를 열한 번 내렸다. 다이어리에 체크 표시를 해뒀으니 틀림없다. 8월 14일엔 그 사람이 컵을 받으며 "오늘 원두 바꾸셨어요? 유난히 맛있네요"라고 물었고, 나는 "어, 그냥 다 떨어져서 아무거나 샀어요"라고 거짓말했다. 원두는 안 바꿨다. 그날따라 물 온도를 더 신경 써서 내렸을 뿐이다. 이 사소한 거짓말 하나에 죄책감보다 묘한 쾌감이 먼저 올라왔던 게,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다. 들키기 싫으면서 동시에 알아채주길 바라는 마음. 이 모순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라서 니체와 불교 경전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 니체는 사실 불교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여기서 오해를 하나 바로잡아야 한다. 니체와 불교를 나란히 놓고 "둘 다 좋은 말이니 섞어보자"는 식으로 쓰는 글을 많이 봤는데, 정작 니체 본인은 『안티크리스트』 20~23절(박찬국 옮김, 아카넷)에서 불교를 꽤 냉정하게 다룬다. 그는 불교가 기독교처럼 원한(르상티망)에서 나온 도덕은 아니라서 "역사가 보여준 유일하게 실증적인 종교"라고 일부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생리적 피로와 권태에서 나온 데카당스, 즉 삶에 지친 자들의 진통제라고 깎아내린다. 갈망(갈애)을 끊어 고통을 없애자는 발상 자체가 니체 눈에는 삶의 에너지를 줄이는 방향이었다. 힘에의 의지는 정반대다. 욕망을 없애는 게 아니라 욕망을 있는 그대로 짊어지고 더 강하게 태어나라는 쪽이다. 그러니 이 둘을 아무 설명 없이 붙여놓으면 애초에 서로를 겨눈 창인 셈이다.
🔥 그런데도 나는 두 태도가 동시에 필요했다
문제는 내가 철학 시험을 보는 게 아니라 실제로 옆자리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거다. 힘에의 의지 쪽으로 완전히 기울면 나는 그 마음을 숨기지 않고 밀어붙였어야 한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 팀 프로젝트가 10월까지 걸려 있었고, 고백했다가 어색해지면 매일 얼굴 봐야 하는 6개월이 지옥이 된다. 그래서 나는 니체가 정말 싫어했을 법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영원회귀 사고실험. "지금 이 짝사랑을, 커피 열한 잔과 거짓말 한 번까지 통째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무한히 반복해도 좋은가." 이건 "이 습관 계속할 거야 말 거야" 같은 손익계산이 아니다. 니체가 『즐거운 학문』 341절에서 던진 질문은 삶 전체를 그대로 다시 살 수 있느냐는 존재론적 긍정 테스트다. 내 대답은 뜻밖에도 "그렇다"였다. 들키지 않으려 애쓰던 그 어설픔까지 포함해서. 그 순간 나는 감정을 숨기는 행위 자체를 긍정하게 됐고, 이건 회피가 아니라 오히려 니체적인 자기긍정에 가까웠다.
🍃 무상은 포기가 아니라 타이밍의 문제였다
동시에 나를 붙잡아준 건 불교의 무상(無常) 개념이었다. 『숫타니파타』(전재성 역, 한국빠알리성전협회)는 갈애(渴愛, taṇhā)가 고통의 뿌리라고 하지만, 그건 감정을 죽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감정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계속 변한다는 사실을 보라는 뜻에 가깝다. 8월의 내 마음과 10월의 내 마음은 이미 다르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이 감정의 강도도, 상대와의 관계도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이걸 인정하니 "지금 당장 고백 안 하면 큰일 난다"는 조급함이 줄었다. 니체식으로 이 순간을 영원히 반복해도 좋다고 긍정하면서, 동시에 불교식으로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도 받아들인 거다. 둘을 화해시켰다기보다, 그냥 그 긴장을 안고 살기로 했다.
☕️ 결국 열두 번째 커피는 다르게 내렸다
9월 첫 출근일, 나는 커피를 내리면서 굳이 원두 이름을 라벨에 적어 컵 옆에 뒀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8/14에 맛있다고 하셨던 거 다시 사왔어요." 티가 나든 말든 상관없었다. 직장 짝사랑 티 안 나게 관리하는 법을 찾다가, 결국 내가 배운 건 숨기는 기술이 아니라 이 감정이 언제 끝나도 후회 없도록 매 순간을 대하는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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