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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포케(epoché)와 판단중지: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시대,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것이 지혜다

⚡ 판단이 너무 쉬워진 세계 3월이었는지 4월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지인 한 명이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는 폭로 글이 피드에 올라왔을 때, 나는 그 글을 세 번 읽었다. 댓글은 이미 수백 개가 달려 있었다. 절반은 피해자를 지지하는 분노였고, 나머지 절반은 "한쪽 말만 들어서는 안 된다"는 유보였다. 나는 공유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내렸다. 뭔가가 걸렸다. 이 감각이 비겁함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를 나는 한동안 알지 못했다. 지금은 안다. 그 감각의 이름은 에포케(epoché)와 일상의 판단중지 와+일상의+판단중지)다. 🏛️ 피론이 2400년 전에 발견한 것 기원전 4세기, 엘리스의 피론(Pyrrho of Elis)은 이런 주장을 했다. 어떤 주장에 대해서도 그와 동등하게 설득력 있는 반론이 존재하며, 이 사태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은 결국 판단을 보류하게 된다고. 그는 이것을 에포케—'중지' 혹은 '보류'를 뜻하는 그리스어—라 불렀다. 피론주의의 핵심 개념은 이소스테네이아(isostheneia), 번역하면 '동등한 힘'이다. 어떤 논쟁에서든 상반된 주장들을 저울에 올리면 양쪽이 정확히 동등한 무게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 균형을 정직하게 감지한 사람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 이유가 없다. 그래서 에포케가 발생한다. 판단을 내리지 않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아직 내릴 수 없다는 인식이다. 피론은 이 에포케가 아타락시아(ataraxia)—마음의 평정—로 이어진다고 봤다. 섣부른 판단이 빚어내는 불안과 후회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 알고리즘이 이소스테네이아를 지운다 문제는 오늘날의 정보 환경이 이소스테네이아를 경험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SNS 알고리즘이 '나쁜 정보를 보여준다'는 비판은 너무 단순하다. 더 정확한 진단은 이것이다: 알고리즘은 당신이 이미 기울어진 방향과 일치하는 주장의 설득력만을 반복적으로 체험하게 하고, 반론이...

🔍 에포케(epoché)란 무엇인가 — 후설 현상학이 말하는 판단 중지의 의미와 실천 방법

2023년 가을, 가자 전쟁이 시작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피드는 폭격 영상과 국기 이모지와 '지금 침묵하는 자는 공범'이라는 문장들로 가득 찼다. 나는 분노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분노하는 것은 그 사건에 대한 것인가, 아니면 분노하는 타인의 게시물에 대한 반응인가, 아니면 분노하지 않으면 연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분위기에 대한 반응인가. 세 가지가 분리되지 않았다. 그 분리 불가능성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 무렵 나는 후설(Edmund Husserl)의 『이념들 I』(*Ideen zu einer reinen Phänomenologie*, 1913)을 다시 열었다. 에포케(epoché)란 무엇인가 란+무엇인가)라는 개념이 갑자기 추상적인 철학 용어가 아니라, 내가 방금 경험한 그 혼란에 대한 정확한 진단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 자연적 태도: 우리가 의심하지 않는 것들 후설이 에포케를 도입하기 위해 먼저 지목한 것은 '자연적 태도(natürliche Einstellung)'다.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내 앞에 있는 것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아무런 이유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떠서 방이 존재함을 확인하지 않는다. 그냥 방 안에 있다. SNS는 이 자연적 태도를 극도로 활용한다. 피드에 올라온 분노, 슬픔, 공포가 '세계의 상태'처럼 보인다. 알고리즘이 선별하고 증폭한 것임을 이성적으로는 알지만, 그 앎은 경험의 층위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알면서도 느낀다. 이것이 자연적 태도의 힘이다. ⏸️ 판단중지: '존재'를 괄호 안에 넣는다는 것 에포케는 이 자연적 태도를 방법론적으로 중단시키는 절차다. 후설은 『이념들 I』 §32에서 이것을 "세계의 존재 정립을 작동 불능 상태로 만든다(außer Aktion setzen)"라고 표현했다.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아니다. 존재에 대한 ...

🔍 에포케란 무엇인가 — 판단중지, 폰 내려놓기와 다른 진짜 이유

☕ 멈췄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카페에서 폰을 뒤집어 놓은 적이 있다. 화면이 바닥을 향하게 놓고, 손도 치우고, 아메리카노만 마셔보려고 했다. 두 모금쯤 지났을까. 손은 저절로 테이블 위를 훑고 있었다. 알림이 왔는지 확인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냥 손이 거기 있어야 한다는 듯이 움직였다. 그 무렵 ' 에포케(epoché)와 일상의 판단중지 와+일상의+판단중지)'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다. 디지털 디톡스 콘텐츠에서 후설의 개념을 가져다 쓰는 것들이었다. '판단을 괄호 안에 넣어라,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라, 폰을 내려놓아라.' 읽으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그 이상함이 어디서 오는지는 나중에야 알았다. 에포케는 스마트폰 내려놓기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혼동되는 방식 자체가, 에포케가 실제로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 후설이 말한 에포케는 무엇인가 에드문트 후설은 1913년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I』(이하 『이념들 I』) §32에서 에포케를 이렇게 서술한다: "우리는 자연적 태도의 본질에 속하는 일반 정립을 작동 중지시키고(außer Aktion setzen), 그것이 존재 방식과 관련하여 포함하는 것 모두를 괄호 안에 넣는다." '자연적 태도(natürliche Einstellung)'란 우리가 살아가면서 취하는 전-반성적 전제다. 세계는 그냥 거기 있고, 저 사람은 나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내가 보지 않아도 사물은 계속 있다는 전제. 에포케는 이 전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 자체를 일단 유보하는 것이다. 그 이후에 오는 것이 초월론적 환원(transzendentale Reduktion)이고, 이것은 세계로 향하던 시선을 순수 의식 — 그 세계를 구성하는 선험적 주관성 — 으로 돌리는 것이다. 에포케와 초월론적 환원은 다른 두 단계다. 팝-철학에서 이 구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

🤔 모르겠다고 말할 용기 — 피론의 에포케가 정보 홍수 시대에 건네는 위로

📱 하루에 몇 번이나 '판단'을 강요당하는가 얼마 전 저녁, 나는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었다가 20분 만에 내려놓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어떤 정치인에 대한 입장, 특정 식품의 건강 효과, 어느 나라의 외교 전략, 요즘 뜨는 투자 종목까지 —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스스로 뭔가 판단하려 애쓰고 있었다. 피로했다. 정보를 소화한 것이 아니라 정보에 짓눌린 기분이었다. 그때 문득 학부 때 읽었던 한 이름이 떠올랐다. 피론(Pyrrho of Elis).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철학자. 그는 '아무것도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결론을 삶의 방식으로 끌어올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방식의 핵심에 피론의 에포케(epoché) )가 있었다. 🏛️ 피론은 왜 판단을 멈추었는가 에포케는 원래 그리스어로 '보류', '정지'를 뜻한다. 피론과 그의 후계자들이 발전시킨 고대 회의주의(Pyrrhonism)에서 에포케는 단순한 지적 겸손이 아니었다. 어떤 명제에 대해서도 동의하거나 반대하지 않는, 완전한 판단의 유보였다. 피론의 제자 티몬(Timon of Phlius)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스승은 이렇게 가르쳤다. "사물은 본질적으로 구별되거나 측량되거나 판단될 수 없다. 따라서 감각도 의견도 참이거나 거짓이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도 신뢰해서는 안 되며, 판단 없이, 기울지 않고,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들으면 허무주의처럼 들린다. 그런데 피론이 이 판단 중지를 통해 도달하고자 했던 것은 파괴가 아니라 '아타락시아(ataraxia)', 즉 마음의 평온이었다. 판단을 멈추자 불안이 사라졌다. 확신을 추구하기를 그만두자 오히려 마음이 고요해졌다는 것이다. 후대 철학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는 이를 그림자에 비유했다 — 형체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에포케를 따라 평온이 뒤따라온다고. 🧠 우리가 판단 피로에 빠지는 구조 현대의 ...

🏠 두 달 만에 돌아온 내 집이 낯설었다 — 슈클롭스키 '낯설게하기'가 설명하는 인식의 철학

🏠 귀환의 이상함 작년 겨울, 두 달짜리 출장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이상한 감각이 왔다. 열쇠는 맞고, 고양이가 반겼고, 짐도 그대로였는데 — 어딘가 모르는 집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벽지가 이 패턴이었나. 주방 조명이 이렇게 노랬나. 욕실이 이렇게 좁았나. 나는 몇 분 동안 내 거실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이틀이 지나자 그 감각은 사라졌다. 나는 다시 무의식적으로 조명을 켜고, 냉장고를 열고, 소파에 쓰러졌다. 다시 집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집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틀 동안의 감각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철학은 종종 그런 감각에서 시작된다고들 하는데, 왜 하필 그 감각인지는 잘 설명하지 않는다. 🐴 슈클롭스키가 말을 빌린 이유 러시아 형식주의자 빅토르 슈클롭스키는 1917년 「예술, 기법으로서」에서 '낯설게하기(остранение)'를 설명하며 톨스토이의 소설 「홀스토메르」를 예로 든다. 화자가 인간이 아니라 늙은 얼룩말인 소설이다. 그 말이 '소유'라는 개념을 이해하려 애쓰는 장면이 있다. 사람들은 "내 말", "내 땅", "내 아내"라고 말하는데, 말의 눈에 이것이 이상하다. 마부는 자신을 타고, 마굿간지기는 자신을 먹이고, 주인은 어딘가에서 서류에 서명한다. 그런데 그 누구도 말 자신이 자기 다리와 맺는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말은 다리로 뛴다. 그 다리는 말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것도 실제로 '갖지' 않으면서 '내 것'이라고 말한다. 슈클롭스키는 이 장면을 통해 문학 기법을 설명하려 했지만, 이 장치가 작동하는 방식은 더 근본적이다. '내 것'이라는 말이 실은 어떤 물리적 실체도 없이 사회적 약속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 우리는 그 개념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볼 수 없게 됐고, 그것을 처음 보는 존재의 시점을 빌려야 비로소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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