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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도 냉장고는 따로 썼다, 에피쿠로스 정원학교가 알려주는 공동체 생활의 오랜 지혜

🧊 냉장고 칸 하나 때문에 시작된 이야기 2019년 봄, 서울 합정동의 4층짜리 셰어하우스에 6개월쯤 산 적이 있다. 방 다섯 개짜리 집에 다섯 명이 살았고, 냉장고는 한 대, 칸은 다섯 개로 나뉘어 있었다. 문제는 그 칸이 균등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제일 위 칸을 쓰던 사람 — 편의상 민석이라고 하자 — 이 야식을 자주 시켜 먹으면서 자기 칸이 부족하다고 아래 칸까지 슬금슬금 넘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배달 온 치킨 상자 하나였다가, 나중엔 각종 반찬통이 쌓였다. 결국 집주인이 중재에 나서서 칸마다 이름표를 붙이는 걸로 끝났는데, 그 이름표 하나 붙이는 데 두 달이 걸렸다. 부엌 하나, 냉장고 하나를 같이 쓰는 것과 그 안의 칸까지 완전히 섞는 것 사이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었다. 같이 사는 건 됐는데, 뭘 같이 쓰고 뭘 따로 둘지에 대한 합의가 없으니까 매번 부딪혔다. 🌿 "정원"은 코뮌이 아니었다 에피쿠로스 얘기가 나오면 보통 원조 미니멀리스트, 최초의 코리빙 공동체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틀린 말은 아닌데, 정작 핵심은 다른 데 있다. 기원전 306년쯤 에피쿠로스는 아테네 성벽 바깥 한적한 곳에 땅을 사서 학교 겸 거주 공간을 차렸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10권에서 전하는 바로는 이 땅값이 80미나였다고 한다. 1미나가 100드라크마이니 8천 드라크마, 숙련 노동자 일당이 1드라크마 안팎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상당한 액수다. 즉 에피쿠로스 개인이 자기 돈으로 땅을 매입한 것이지, 제자들이 돈을 모아 공동 소유한 게 아니었다. 이 지점이 피타고라스 학파와 결정적으로 다르다. 피타고라스 공동체는 재산을 완전히 공유하는 걸 원칙으로 삼았던 걸로 유명한데, 에피쿠로스 정원학교 는 그러지 않았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대화하되, 소유권은 각자의 것으로 남겨뒀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그대로 옮겨 적은 에피쿠로스의 유언장(10권 16~21절 부근)을 보면 이 구조가 얼마나 꼼꼼하게 설계...

🏛️ 에피쿠로스는 왜 재산을 공유하지 말라고 했을까 — 정원학교의 진짜 구조와 공동체 설계 비밀

📦 당근마켓에 짐을 다 풀어놓고 작년에 이사하면서 당근마켓에 물건을 한 사흘 내내 올렸다. 안 입는 재킷, 사놓고 펼치지도 않은 전공서적, 왜 샀는지 기억도 안 나는 커피용품들. 물건이 하나씩 팔려나가면서 방이 비는 걸 보는데, 이상하게 홀가분한 것과 별개로 조금 허전하기도 했다. 그러다 이 감정이 뭔가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작 그 이유를 알게 된 건 몇 달 뒤 에피쿠로스의 '정원(케포스, Kepos)'에 대해 읽으면서였다. 다만 지금 와서 보니 그때 내가 느낀 건 미니멀리즘이라기보다는, 물건을 줄이는 것과 함께 사는 방식 자체에 대한 질문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이 글은 '비우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뻔한 이야기 대신, 에피쿠로스가 실제로 어떻게 공동체를 설계했는지를 좀 파보려 한다. 🚪 정원 대문에 붙어 있던 문구 기원전 306년, 에피쿠로스는 아테네 성벽 밖에 땅을 사서 학교 겸 거주 공동체를 만든다. 세네카가 『도덕서한』 21번에서 전하길, 그 정원 입구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나그네여, 여기 머물면 좋을 것이다. 여기서는 쾌락이 최고선이다." 아카데메이아나 리케이온처럼 귀족 자제들이 다니는 엘리트 교육기관과 나란히 놓고 보면, 이 광고 문구 자체가 이미 도발이다. 게다가 정원에는 여성(헤타이라 출신인 레온티온), 노예(뮈스) 도 정식 구성원으로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그리스 철학 공동체에서는 거의 유일한 사례다. 여기까지만 보면 "역시 진보적인 코뮌이었구나" 싶은데, 실제 운영 방식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정반대 지점에서 흥미로워진다. 🤝 "친구의 재산은 공동의 것"이라는 말을 에피쿠로스는 거절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모든 것이 공동이다"라는 원칙으로 유명했다. 재산을 공동 소유로 묶는 방식이다. 그런데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전하는 에피쿠로스의 편지에는 이 원칙에 대한 명시적인 반박이 ...

🌿에피쿠로스 정원학파, 2300년 전 아테네가 먼저 살았던 '조용한 삶'의 진짜 의미를 다시 묻다

🔕 알림을 끄던 밤, 그런데 왜 이렇게 허전했을까 작년 가을 어느 저녁이었다. 회사 단톡방, 인스타그램, 뉴스 푸시까지 하루 종일 울려대던 휴대폰을 보다가 홧김에 알림을 죄다 꺼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밤, 개운하기는커녕 좀 허전했다. 조용해진 방 안에서 나는 뭘 놓친 기분이었을까. 요즘 유행하는 '조용한 삶(quiet living)'이라는 말도 비슷한 온도로 다가온다. 알고리즘과 비교, 성과 압박에서 벗어나 작은 삶으로 물러나자는 제안. 그런데 이걸 처음 실천한 사람들이 2300년 전 아테네에 있었다는 걸 알고 나서, 나는 이 유행어를 다시 보게 됐다. 🏛️ 아테네 변두리, 이상한 공동체 하나 기원전 306년, 에피쿠로스는 아테네 성벽 밖 어딘가에 땅을 사서 학교를 세운다. 흔히 에피쿠로스 정원학파 의 '정원(Kepos)'이라 불리는 곳이다. 당시 아테네 철학계의 중심이던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나 아리스토텔레스 계열의 리케이온과 비교하면 이 정원은 지리적으로도, 구성원 면에서도 변방이었다. 여기엔 시민만 있는 게 아니라 여성도, 심지어 노예 신분인 사람도 함께 공부했다. 아테네 시민 남성만 정식 구성원이 될 수 있던 다른 학파들과는 완전히 다른 그림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쓴 「저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10권(에피쿠로스 편)에 이 공동체 구성원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남아 있다. 🙊 "숨어 살라"는 말, 사실은 반대였다 에피쿠로스의 유명한 모토 중에 "λάθε βιώσας(라테 비오사스)", 흔히 "숨어서 살라"로 번역되는 말이 있다. 나도 처음엔 이걸 '은둔형 외톨이가 되라'는 뜻으로 오해했다. 그런데 이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글을 쓴 사람이 있다. 그리스 출신의 전기작가이자 수필가인 플루타르코스다. 그는 시인이 아니라 「영웅전」을 쓴 것으로 유명한 산문가인데, 「모랄리아」에 실린 「'숨어서 살라'는 말은 옳은가...

🍲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쾌락 대신 남긴 유산: 우정과 매달 스무날의 특별한 약속

🍱 반찬통에 붙어있던 포스트잇 2년 전 11월, 아버지가 담낭 쪽 수술을 받고 두 달 가까이 입원해 계셨다. 회사 끝나고 병원 들렀다가 집에 오면 자정이 다 되어 있었고, 냉장고를 열어봐야 반쯤 마른 계란 두 알이 전부였던 시기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현관 앞에 반찬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대학 동기 정은이가 다녀간 거였다. 소고기무국이랑 멸치볶음, 그리고 통 옆에 붙은 포스트잇에는 "국 데워서 밥 챙겨 먹어, 자책하지 말고"라고 적혀 있었다. 국을 냄비에 옮겨 담는데 아직 미지근한 온기가 남아 있어서, 숟가락도 안 들고 그 앞에 한참 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 정작 정은이한테 전화해서는 고맙단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딴소리만 늘어놨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 뻔하다면 뻔한 장면을 기원전 3세기 아테네에서 이미 정교하게 이론화해 놓은 사람이 있다. 쾌락을 인생의 목표로 선언해서 지금까지도 오해받는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남긴 것이 바로 에피쿠로스 우정론 이다. 🧮 쾌락주의자가 계산기를 두드리자 나온 답 에피쿠로스 철학의 핵심은 사실 방탕이 아니라 계산이다. 쾌락을 늘리고 고통을 줄이는 게 목표라면, 뭐가 제일 효율 좋은 투자처인지 따져봐야 한다. 그가 남긴 『주요 교설』(퀴리아이 독사이) 27번은 이렇게 말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전하는 원문을 시릴 베일리가 1926년에 영역한 걸 옮기면 이렇다. "지혜가 일생 전체의 행복을 위해 마련해주는 것들 가운데, 우정을 얻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다(Of all the things which wisdom acquires to produce the blessedness of the complete life, far the greatest is the possession of friendship)." 돈도 권력도 명예도 아니고 우정이 1등이라는 거다. 이유는 다음 교설에서 좀 더 풀리는데, 고통 중에서 가장 큰 건 눈앞의 통증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는 게 에피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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