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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랍은 열었지만,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 — 반 게넵의 통과의례로 읽는 애도의 인류학 이야기

🗄️ 서랍 앞에서 여섯 달,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반년쯤 지난 어느 일요일, 나는 결국 옷장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미리 말해두자면 이 글은 그 순간 뭔가 극적인 걸 발견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안에는 오래된 영수증 뭉치, 다 닳은 휴대폰 충전기, 쓰다 만 안경닦이 천 같은 게 들어 있었다. 눈물이 왈칵 나거나 아버지의 어떤 진심을 발견하는 그런 장면은 없었다. 그냥... 좀 허무했다. 여섯 달을 못 연 게 민망할 정도로. 그런데 이상하게 그 허무함이 오래갔다. 나는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서 애도의 인류학 책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슬픔을 개인의 감정으로만 보면 "왜 별것도 아닌 서랍을 그렇게 오래 못 열었나"에 대한 답이 안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찾다 보니, 이 감정을 개인이 아니라 절차와 구조로 설명하려 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 반 게넵의 세 단계, 그런데 그건 원래 '함께' 치르는 것 아르놀드 반 게넵은 1909년 『통과의례』에서 인생의 큰 전환 — 출생, 성인식, 결혼, 죽음 — 을 세 단계로 나눴다. 분리(séparation), 경계(marge), 재통합(agrégation). 죽음의 경우 상주는 상복을 입고 일상에서 분리되고(분리), 장례 기간 동안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머물다가(경계), 탈상과 함께 다시 사회로 복귀한다(재통합)는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반 게넵이 관찰한 통과의례는 기본적으로 '공동체가 함께 목격하는' 절차다. 상복, 곡, 조문, 탈상제 — 전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벌어진다. 그런데 내가 서랍을 연 건 일요일 오후, 아무도 모르게, 혼자였다. 반 게넵의 틀을 그대로 갖다 대면 이 행동은 어느 단계에도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다. 이건 이론이 나를 설명해준 게 아니라, 이론과 내 경험 사이에 틈이 있다는 걸 알려준 것에 가깝다. 🦴 에르츠의 이중장례, 그리고 그 이론의 한계 로베르 에르츠는 ...

😢 우는 법을 잊어버린 우리에게 — 곡(哭)이라는 오래된 지혜와 슬픔의 인류학이 건네는 위로

열두 살 때였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고, 나는 생전 처음으로 어른들 장례식장에 갔다. 조문객을 맞이하는 것도 낯설었는데, 제일 당황스러웠던 건 갑자기 터져 나오는 그 소리였다. 아주머니들이 관 앞에서 "어이, 어이—" 하고 소리 내어 우는 것. 솔직히 조금 무섭기도 했고, 철없이도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하지?' 싶었다. 그 기억이 최근에 다시 떠올랐다. 친한 친구가 부모님을 잃었고, 나는 장례식장 한쪽 구석에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울고 싶었는데 어떻게 울어야 할지를 몰랐다. 어색해서 참았다. 그 이후로 한동안 그 어색함이 마음에 걸렸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부터 우는 법을 잊어버린 걸까. 🌍 슬픔에도 방언이 있다 문화인류학자 폴 로젠블라트(Paul Rosenblatt)가 1976년 발표한 연구는 78개 문화권의 애도의 인류학 방식을 비교했는데, 결론이 흥미롭다. 슬픔의 감정 자체는 보편적이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문화마다 극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발리 섬에서는 장례식에서 웃음과 농담이 권장된다. 클리퍼드 기어츠(Clifford Geertz)가 『문화의 해석』에서 기록한 것처럼, 발리인들은 슬픔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망자의 영혼이 불안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일부러 가볍게, 심지어 유쾌하게 행동한다. 멕시코의 '망자의 날(Día de los Muertos)'은 또 다르다. 해골 분장을 하고, 고인이 좋아하던 음식을 차리고, 노래를 튼다. 슬픔이 축제의 형태를 띤다. 아일랜드의 '웨이크(wake)'는 관을 가운데 두고 밤새 술을 마시며 고인의 이야기를 웃으며 나누는 방식이다. 반면 이집트와 고대 로마에는 직업적 통곡사(professional mourners)가 있었다. 돈을 받고 장례식에서 대신 울어주는 사람들. 지금 기준으로는 이상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슬픔의 깊이를 공동체에 전달하는 합법적인 언어였다. 이 모든 사례가 보여주는 건 하나다. 슬픔의 언어는 하나가...

💀 서류에 손이 떨렸다: 죽음을 공부한다는 것, 왜 하필 지금 '타나톨로지'를 읽어야 하나

✍️ 서명하는 손이 떨렸던 날 작년에 아버지가 폐렴으로 입원했을 때, 담당의가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연명의료계획서였다. "심폐소생술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자연스러운 임종을 원하십니까." 문장은 담담했는데 손이 떨렸다. 그 순간 깨달은 게 있다. 나는 태어나는 법, 사랑하는 법, 돈 버는 법에 대해서는 어디선가 조금씩 배웠는데, 죽는 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때부터 '죽음학'이라는 단어를 검색하기 시작했고, 곧 ' 타나톨로지 (thanatology)'라는 낯선 영어 단어와 마주쳤다. 🌐 타나톨로지는 왜 굳이 영어 이름을 쓸까 죽음학이라는 한글 표현이 이미 있는데도 왜 굳이 '타나톨로지'라는 수입 용어가 매체와 강좌 이름에 자꾸 등장하는 걸까. 이건 단순한 허영이 아니라 학문의 계보 문제다. 타나톨로지는 1959년 심리학자 허먼 파이펠이 편집한 《The Meaning of Death》, 이어 1969년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On Death and Dying》을 기점으로 심리학·의학·사회학·인류학이 각자 따로 다루던 죽음을 하나의 학제로 묶으면서 붙은 이름이다. 즉 '죽음학'이 민간에서 오래 써온 느슨한 표현이라면, '타나톨로지'는 제도권 학문으로서의 계보와 방법론을 함께 데려오는 이름이다. 한국에서 이 단어가 다시 호출되는 건, 죽음을 다루는 기존의 언어—장례 절차, 상조 상품, 종교적 위로—로는 감당 안 되는 새로운 질문들이 쌓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 초고령사회·웰다잉법·팬데믹이 만든 '언어 공백' 행정안전부가 2024년 12월 발표한 주민등록인구 통계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처음으로 20%를 넘어서면서 한국은 그 시점에 국제 기준상 초고령사회에 들어섰다. 여기서 중요한 건 숫자 자체가 아니라, 이 숫자가 만들어내는 '죽음의 위치 이동'이다. 통계청 사망원인통계를 보면 국내 사망자의 다수가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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