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직장 상사 티 안 내는 법, 니체의 심연과 불교 경전에서 찾은 정체를 마주한 이유

☕ 탕비실에서 커피를 세 번째 타러 갔던 날

솔직히 말하면 나는 커피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팀장님이 탕비실에 있을 시간대를 나도 모르게 계산하고 있었다. 하루에 세 번, 넉 잔짜리 믹스커피를 다 마시지도 못하면서 타러 갔다. 문제는 커피가 아니라 내가 그 계산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숨기고 있었다는 거다. 티를 안 내려고 애쓰다 보니 오히려 내 행동 패턴이 너무 뚜렷해져서, 나조차 그걸 못 본 척하고 있었다.

이 글은 짝사랑 직장 상사 티 안 내는 법을 니체와 불교 경전 두 개의 렌즈로 다시 들여다본 기록이다. 위로가 아니라 해부에 가깝다.


🌌 니체가 말한 심연, 자기기만부터 막아야 하는 이유

니체는 『선악의 저편』 146절에서 이렇게 쓴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과정에서 자신마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그대를 들여다본다." 나는 이 문장을 '들키지 않으려는 노력' 자체가 심연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읽었다. 티를 안 내려는 강박이 길어지면, 그 강박을 감추는 데 쓰는 에너지가 원래 감정보다 더 커진다. 내가 겪은 게 정확히 그거였다.

같은 책 68절에는 더 냉정한 문장이 있다. "기억은 말한다, '내가 그렇게 했다'고. 자존심은 물러서지 않으며 말한다, '내가 그렇게 했을 리 없다'고. 결국 기억이 굴복한다." 이건 자기기만이 작동하는 순서를 정확히 짚은 문장이다. 감정이 먼저 있고, 자존심이 그걸 부정하고, 결국 기억(사실)이 자존심 쪽으로 휘어진다. 나도 "그냥 예의 바르게 대하는 것뿐"이라고 몇 주 동안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 영원회귀, 이 감정을 다시 살아도 되는가

니체의 영원회귀는 『즐거운 학문』 341절, "최대의 무게"라는 제목의 사유실험에서 나온다. 어느 날 밤 악마가 찾아와 말한다. 네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을, 이 고통과 이 기쁨을 포함해서 한 치의 다름도 없이 무수히 다시 살아야 한다면, 너는 땅에 엎드려 이를 갈며 그 악마를 저주하겠는가, 아니면 "너는 신이다, 나는 이보다 더 신적인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답하겠는가.

이건 습관을 점검하는 자기계발식 질문이 아니다. 존재 전체를 긍정할 수 있는지를 묻는 무게 그 자체다. 그래서 나는 이 질문을 가볍게 쓰지 않으려고 한다. "이 탕비실 루틴을 계속해도 될까" 같은 걸 물은 게 아니라, "이 마음을 품었던 시간 전체를 한 치의 수정 없이 다시 살 수 있는가"를 물었다. 답은 '예'였다. 다만 그 긍정은 상사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와는 무관했다. 짝사랑이라는 경험 자체를, 결과와 분리해서 긍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고, 그걸 분리하고 나니 결과에 대한 초조함이 줄었다.


🕉️ 숫타니파타, 동요라는 단어

『숫타니파타』 제1장 「무소의 뿔 경」(Khaggavisāṇa Sutta, 게송 35~75)은 대부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후렴으로 끝난다. 그중 벗과 동료에 관한 게송은 이렇게 말한다. "벗이나 동료와 사귀며 삶을 즐기는 데 팔려 있는 자는 자신의 이익을 소홀히 한다. 이러한 위험을 보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경은 인간관계를 끊으라는 말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기대가 자기 안의 중심을 대신하게 두지 말라는 경고로 읽힌다.

불교에서 집착이 만드는 것은 '동요(動搖)'다. 붙잡으려는 마음이 있는 한 흔들림이 생기고, 흔들림은 밖으로 티가 난다. 내가 탕비실을 세 번씩 들락거린 건 감정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감정을 붙잡고 결과를 통제하려던 집착 때문이었다. 감정은 무상(無常)해서 원래 왔다가 간다. 문제는 감정이 아니라 그걸 붙잡으려는 손이었다.


📅 내가 실제로 실패했던 지점, 그리고 6주

실전에서 나는 꽤 오래 실패했다. 석 달 가까이 하루 세 번 탕비실에 갔고, 결국 팀장님이 "요즘 커피 자주 드시네요"라고 웃으며 물었을 때 얼굴이 빨개졌다. 그 순간 알았다. 티를 안 내려는 노력 자체가 패턴이 되면 그게 곧 티라는 걸.

바뀐 건 질문을 줄이면서부터다. 업무 관련 질문을 하루에 몇 번이든 던지던 걸, 정리해서 주 2~3회로 묶었다. 동시에 보고서를 팀장님 코멘트 없이 두 번 연속 통과시켰다. 그 이후 약 6주 동안, 따로 찾아가 질문할 일이 자연스럽게 줄었고 회의에서 마주치는 정도로도 충분해졌다. 접점이 줄어드니 초조함도 같이 줄었다. 결과가 좋아서 좋았던 게 아니라, 붙잡을 이유가 하나 줄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완전히 해탈한 건 아니다. 다만 심연을 들여다볼 때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감정을 부정하는 대신 그 감정을 붙잡는 손부터 놓아야 한다는 걸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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