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답장을 기다리는 쪽이 늘 지는 이유: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기다림을 니체와 불교로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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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한 시, 숫자 1이 사라진 뒤
지난달 어느 새벽에 나는 카톡 대화창 하나를 스무 번쯤 열었다 닫았다. 보낸 메시지 옆의 1은 밤 열한 시 사십 분쯤 사라졌는데, 그 뒤로는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읽었다는 사실 하나로 그렇게 많은 해석이 생길 줄은 몰랐다. 피곤해서 잠들었겠지 하다가 금세 '읽고도 답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구나, 나는'으로 넘어갔다. 거기서 다시 내가 보낸 문장의 어미 하나를 붙들고 늘어졌다. '했어?' 말고 '했어ㅎㅎ'라고 보냈으면 달랐을까 하는 것들.
그날 책장에서 꺼낸 책이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었다. 1977년 쇠유(Seuil) 출판사에서 나온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이고, 나는 김희영 선생의 번역으로 처음 읽었다.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기다림, 그러니까 '기다림(Attente)' 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 식으로 옮기면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릴 때 사소한 지연(약속, 전화, 편지, 귀가) 때문에 일어나는 고뇌의 소용돌이"다. 원문은 "Tumulte d'angoisse suscité par l'attente de l'être aimé, au gré de menus retards (rendez-vous, téléphones, lettres, retours)." 오십 년 전 파리 사람이 쓴 이 목록에 요즘 같으면 '읽씹' 하나만 더 넣으면 될 것 같았다.
⏳ 기다리게 하는 쪽은 왜 늘 이기는가
이 장에서 바르트가 가장 차갑게 쓴 문장은 이것이다. "기다리게 하기, 모든 권력이 변함없이 누려 온 특권, '인류가 천 년 동안 즐겨 온 소일거리'." (Faire attendre : prérogative constante de tout pouvoir, « passe-temps millénaire de l'humanité ».) 관공서 창구나 병원 대기실, 합격자 발표일을 떠올려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시간을 쥔 쪽이 힘을 쥔다. 바르트는 사랑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고, 오히려 이 구조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라고 본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가? 그렇다, 나는 기다리고 있으니까." (Suis-je amoureux ? — Oui, puisque j'attends.) 그리고 바로 이렇게 덧붙인다. "상대방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L'autre, lui, n'attend jamais.)
이 두 문장을 나란히 놓고 보니 새벽 한 시에 내가 왜 그렇게 비참했는지 설명이 됐다. 기다림이 사랑의 증상이라면 더 오래 기다리는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한 쪽이 된다. 답장을 늦게 보낸 사람이 일부러 그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잠들었어도 나는 그 사람의 시간표에 묶여 있었다.
그런데 니체를 옆에 두고 다시 읽으면 이 구조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부 '자기 극복에 대하여'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힘에의 의지를 발견했다. 섬기는 자의 의지 속에서도 주인이 되려는 의지를 발견했다." (Wo ich Lebendiges fand, da fand ich Willen zur Macht; und noch im Willen des Dienenden fand ich den Willen, Herr zu sein.) 기다리는 쪽도 힘을 원한다는 말이다. 그날 밤 내가 한 일을 돌아보면 맞는 말이다. 나는 얌전히 기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그 사람을 몇 번이고 새로 만들었다. 지금 누구와 있는지, 내 메시지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내일 어떤 변명을 할지까지 대본을 다 썼다. 그러고는 '다음엔 나도 하루 묵혔다가 답해야지' 같은 대사를 속으로 연습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 제1논문 10절에서 원한(ressentiment)을 설명한다. 진짜 반응, 곧 행동이 막힌 존재가 "상상 속의 복수로만 스스로를 달래는" 태도라는 것이다. 노예 도덕을 두고 한 말이지만 새벽 한 시의 나에게도 그대로 들어맞았다. 기다리는 사람의 힘은 행동이 아니라 상상 속에서만 쓰인다. 상대를 내 머릿속 무대에 세워 놓고 연출하는 힘이다. 바르트도 기다림을 막과 대사와 무대 장치가 있는 연극처럼 묘사한다. 그러니 기다리는 사람은 약자인 동시에, 아무도 보지 않는 무대에서 혼자 음습한 연극을 쓰는 극작가다.
🪑 아흔아홉 번째 밤, 의자를 옆구리에 끼고
이 장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은 중국 관리 이야기다. 한 관리가 기녀를 사랑했다. 기녀는 "제 창문 아래 정원에서 의자에 앉아 백 일 밤을 기다려 주신다면 당신 사람이 되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흔아홉 번째 밤에 관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옆구리에 끼고 가 버렸다. (Mais, à la quatre-vingt-dix-neuvième nuit, le mandarin se leva, prit son tabouret sous son bras et s'en alla.)
이 장면은 흔히 기다림의 주도권을 되찾은 결단으로 읽힌다. 마지막 순간에 떠나 버림으로써 기다리게 하는 권력을 무효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나도 한동안 그렇게 읽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읽을 때는 자꾸 의자가 눈에 걸렸다. 그는 의자를 두고 가지 않았다. 옆구리에 끼고 갔다.
바르트는 같은 장에서 이렇게 쓴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성은 다름 아닌 이것이다.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다." (L'identité fatale de l'amoureux n'est rien d'autre que : je suis celui qui attend.) 이 문장을 붙여 읽으면 관리가 백 번째 밤을 피한 이유가 달라 보인다. 기녀를 거부해서라기보다, 백 번째 밤이 오면 '기다리는 나'가 끝나 버리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는 기다림을 그만둔 게 아니라 챙겨 간 것이다. 다른 창문 아래에 내려놓기만 하면 언제든 다시 앉을 수 있게, 들고 다닐 수 있는 기다림으로.
불교에는 이 상태를 꽤 정확하게 가리키는 말이 있다. 집착, 빨리어로 우빠다나(upādāna)다. 경전은 이것을 넷으로 나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계율과 의례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아라는 관념에 대한 집착(attavādupādāna)이다. 나는 오랫동안 짝사랑의 괴로움이 첫 번째, 그러니까 그 사람을 갖고 싶은 욕망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새벽에 대화창을 스무 번 열던 내가 실제로 붙들고 있던 건 그 사람이라기보다 '답을 기다리는 나'라는 역할이었다. 그 역할 안에 있는 동안 나는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이고,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관리가 들고 간 의자는 그 역할이 물건의 모양을 한 것이다.
🪷 『법구경』은 물러서지 않는다, 대신 자애가 있다
여기서 불교를 끌어오면 늘 같은 벽에 부딪힌다. 『법구경』 212게송은 이렇게 말한다. "아끼는 것에서 슬픔이 생기고, 아끼는 것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아끼는 것에서 벗어난 이에게는 슬픔이 없으니, 두려움이 어디 있으랴." (piyato jāyatī soko, piyato jāyatī bhayaṃ.) 글자 그대로 읽으면 답은 간단하다. 기다리고 싶지 않으면 아끼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이 게송을 억지로 다르게 읽고 싶지 않다. 경전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고, 그 말이 틀리지도 않았다. 새벽 한 시의 두려움은 정확히 그 '아끼는 마음(piya)'에서 나왔다.
다만 불교가 사랑을 한 덩어리로 보지 않는다는 점은 짚어 두고 싶다. 붓다고사는 『청정도론(Visuddhimagga)』 9장에서 자애(mettā)를 설명하며 '먼 적'과 '가까운 적'을 나눈다. 자애의 먼 적은 성냄이다. 이건 누구나 안다. 그런데 가까운 적은 탐욕(rāga), 곧 애착이다. 겉모습이 자애와 너무 닮아서 자애인 줄 알고 키우다 보면 어느새 애착이 되어 있다는 경고다. 212게송이 말하는 piya는 이 가까운 적 쪽을 가리킨다고 나는 이해한다. 불교가 내려놓으라고 하는 건 상대의 반응을 조건으로 걸고 붙드는 마음이지, 상대가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다.
이 구분을 바르트의 기다림에 대 보면 둘이 부딪히던 지점이 풀린다. 바르트가 그린 기다림은 철저하게 애착의 구조다. 답장이 와야 내가 안심하고, 상대가 늦으면 내가 무너진다. 이때 상대는 내 불안을 끝내 줄 장치로서 기다려진다. 자애의 마음에는 기다릴 대상이 없다.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든 편안하기를"이라는 바람은 답장을 요구하지 않는다. 답이 오든 안 오든 이미 끝맺어진 문장이다. 같은 사람을 똑같이 생각하는데도 한쪽 마음은 시간을 저당 잡히고, 다른 쪽 마음은 그렇지 않다.
♾️ 이 기다림을 영원히 되풀이해도 좋은가
니체는 『즐거운 학문』 341절에서 악마 하나를 등장시킨다. 악마는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을 한 치도 다르지 않게 무한히 다시 살아야 한다고 속삭인다. 그 말을 듣고 이를 갈며 저주하겠는가, 아니면 "당신은 신이다, 이보다 더 신성한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고 답하겠는가.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의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 10절에서 인간의 위대함을 재는 공식으로 운명애(amor fati)를 내놓는다. "아무것도 달라지기를 바라지 않는 것.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히." (dass man nichts anders haben will, vorwärts nicht, rückwärts nicht, in alle Ewigkeit nicht.)
처음에는 이 질문이 기다림 앞에서 너무 가혹하게 느껴졌다. 그 새벽 한 시를 영원히 반복하라니. 그런데 며칠을 곱씹다 보니 질문을 조금 바꿔 보게 됐다. 기다림 자체는 없앨 수 없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동안에는 기다림이 반드시 온다. 그렇다면 물어야 할 것은 기다릴지 말지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 기다리는 나를 영원히 되풀이하고 싶은가다. 대화창을 스무 번 열면서 복수 대사를 연습하는 나라면 한 번도 더 살고 싶지 않다. 그건 니체가 말한 원한의 기다림이고, 붓다고사가 말한 가까운 적의 기다림이다. 하지만 그 사람을 떠올리고, 그 사람의 하루가 괜찮았기를 바라고, 그런 다음 내 일로 돌아가는 기다림이라면 천 번이라도 다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니체의 운명애와 불교의 자애가 전혀 다른 전통에서 나왔는데도 이 지점에서 만난다는 게 나는 조금 신기했다.
그래서 요즘 내가 해 보는 건 거창하지 않다. 대화창을 다시 열고 싶어지면 그 충동이 무엇을 원하는지부터 들여다본다. 답장을 원하는 건지, 아니면 '기다리는 나'라는 자리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은 건지. 대개는 후자다. 그럴 때는 휴대폰을 여는 대신 속으로 답이 필요 없는 문장 하나를 말한다. "오늘 너무 지치지는 않았기를" 같은 것. 이상하게도 그 말을 하고 나면 대화창을 열 이유가 조금 줄어든다. 머릿속에서 복수 대본이 시작되면 억누르지 않고 '아, 지금 섬기는 자가 주인이 되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이름을 붙여 준다. 니체의 문장을 이런 데 써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이름이 붙고 나면 그 대본은 대개 2막을 넘기지 못한다.
가끔 관리의 의자를 생각한다. 나는 아직 그 의자를 내려놓지 못했다. 아마 누군가를 좋아하는 동안에는 계속 들고 다닐 것 같다. 다만 요즘은 그 의자에 앉아 창문만 올려다보고 있지는 않는다. 창문 너머 사람이 편히 잠들었기를 잠깐 바라다가 그냥 일어나 집으로 간다. 그날 새벽의 답장은 다음 날 점심때 왔다. 깜빡 잠들었다고, 미안하다고. 나도 조금 늦게 답을 보냈다. 복수하려던 게 아니라 마침 밥을 먹고 있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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