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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포리아: 막혔다는 것, 그게 사실은 시작이었다 — 소크라테스와 메논이 만든 철학적 막힘

📞 전화를 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몇 년 전 가을,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우리는 오 년 넘게 만나지 않았고, 마지막 만남은 좋지 않게 끝났다.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하기를 반복했다. 전화를 걸면 부담을 주는 것 같았고, 걸지 않으면 외면하는 것 같았다. 두 선택 모두 틀린 것처럼 느껴지는 그 자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막혔다'는 감각을 몸으로 알았다. 철학에서는 이 상태를 아포리아 (aporia)라고 부른다. 그리스어 어원을 풀면 a(없음) + poros(길)이다. 길이 없는 상태.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모르겠다'는 것과 다르다. 아포리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더 깊이 막히는 특수한 막힘이다. 두 방향 모두 나름의 논리를 갖고 있어서, 그 논리들이 서로를 취소시킨다. ⚡ 납작가오리의 마비 플라톤의 『메논』에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덕(virtue)이 무엇인지 묻던 메논이, 소크라테스의 거듭된 질문에 몇 번 답하다가 결국 두 손을 든다. "소크라테스, 당신은 마치 납작가오리 같아요. 전기가오리처럼 접촉하는 사람을 마비시키잖아요." (『메논』 80a) 메논은 항의하는 척하면서 사실 항복하고 있다. 덕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확신했는데, 소크라테스와 이야기하다 보니 그 확신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메논이 말하는 '마비'가 바로 아포리아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 자신도 당신을 마비시키면서 동시에 마비되어 있다오"라고 말하며, 마비를 실패가 아닌 진지한 탐구의 표시로 읽는다. 『메논』의 또 다른 유명한 역설이 이 장면 바로 다음에 등장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탐구할 수 있는가? 만약 안다면 탐구할 필요가 없고, 모른다면 탐구할 수도 없다." (80d–e) 막혔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탐구의 조건 자체가 흔들린다. 이것이 메논의 역설이고, 소크라테스...

💐 죽음 이후에도 관계는 끝나지 않는다 — 애도의 철학이 풀어주는 상실과 위로의 진짜 의미

💬 위로가 거짓말처럼 들릴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한 달쯤 지났을 때, 지인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세상을 떠났어도 마음속에 살아 있잖아요. 관계는 끝나지 않아요."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근데 이상하게, 위로가 되기는커녕 어딘가 붕 떠있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속에 살아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나는 몰랐다. 할머니 목소리가 가물가물해질 때마다, 냄새가 기억나지 않을 때마다, 그 말은 오히려 내가 뭔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처럼 들렸다. 관계가 끝나지 않는다면 왜 이렇게 멀어지는 것 같지? 철학자들도 이 질문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애도의 철학 이 내놓는 답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그래서 훨씬 정직했다. 🧠 프로이트가 틀린 것 애도에 관한 가장 유명한 이론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1917년 쓴 논문 〈애도와 멜랑콜리〉(Trauer und Melancholie)에서 나왔다. 프로이트는 애도를 일종의 심리적 탈착 작업으로 봤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쏟아붓던 심리적 에너지를 천천히 회수해서 새로운 대상으로 옮겨야 건강한 애도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애도의 과업이 완수되면, 자아는 다시 자유로워지고 억제에서 벗어난다." 요컨대 잘 애도한다는 것은 잘 '보내는' 것이었다. 이 모델은 한동안 심리학 교과서의 표준이었다. 그런데 1996년, 데니스 클라스·필리스 실버만·스티브 닉맨이 편집한 연구서 《지속적 유대》(Continuing Bonds)가 이 패러다임을 정면으로 흔들었다. 이들은 자녀를 잃은 부모 모임(Compassionate Friends) 회원 69명을 포함해 다양한 사별 경험자를 장기 추적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고인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 — 여전히 말을 걸고, 조언을 구하고, 사진 앞에서 감정을 나누는 사람들 — 이 심리적으로 더 건강하게 기능하는 경우가 많았다. '보내기'가 아니라 '함께 가져가기'가 더 자연스러운...

😶 레비나스 타자의 얼굴 앞에서 나는 왜 무장해제되었는가 - 엄마와의 다툼이 남긴 철학적 순간

🚪 문을 열자 마주친 얼굴 작년 11월 어느 저녁 8시쯤이었다. 설거지를 안 했다는 엄마의 잔소리로 시작된 말다툼이었다. "너는 맨날 그런 식이야"라는 내 말에, 엄마는 오래전 아버지 제사 준비를 나 혼자 다 떠맡겼던 일, 형만 챙긴다고 서운했던 기억들을 한꺼번에 꺼냈다. 나는 밥그릇을 싱크대에 던지듯 넣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형광등이 웅웅거리는 소리, 냉장고 모터 도는 소리만 들리는 방 안에서 한 시간쯤 씩씩거리다가, 목이 말라 문을 열었다. 거실엔 엄마가 있었다. 화장이 반쯤 지워진 얼굴로, 개다 만 빨래를 손에 쥔 채 멍하니 TV를 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서 있었다. 화가 안 풀린 것도 아닌데, 눈두덩이 붉어진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뭔가가 턱 걸렸다. 나중에 레비나스를 읽으면서 그 순간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그가 말한 '얼굴(visage)'을 마주친 거였다. 🌀 '얼굴'은 눈코입이 아니라 균열이다 레비나스 타자의 얼굴 은 생김새가 아니다. 그는 얼굴을 내가 상대를 파악하려는 순간 그 파악을 빠져나가는 것, 그가 '전체성(totalité)'이라 부른 나의 인식 틀을 찢고 나오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우리 엄마는 원래 저래"라는 문장은 전체성이다. 엄마를 내가 다 안다고 규정해버리는 틀이다. 그런데 그 순간 거실에서 본 엄마의 얼굴은 그 틀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화장 지워진 눈가, 개다 만 수건, 그 헐거운 자세 — 그건 내가 알던 '엄마'라는 카테고리보다 컸다. 레비나스는 이걸 얼굴이 "너는 나를 죽이지 못할 것이다"라고 명령한다고 표현한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이전에, 얼굴 자체가 이미 그 금지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철학책 여러 권에 나오는 얘기다. 진짜 질문은 그다음부터다. ✋ 그런데 그 얼굴이 나를 붙잡아 두는 손이라면 레비나스 윤리의 핵심은 비대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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