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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적 운: 가스불 끄고 나온 날, '살인자'라 부르는 순간 우리는 다른 걸 하고 있다

🔥 가스불을 켜놓고 나온 날 재작년 가을, 연희동에서 반지하 자취를 할 때였다. 김치찌개를 올려놓고 편의점에 담배를 사러 나갔다가, 계산대 앞에서 친구 전화를 받고 그대로 십오 분을 떠들었다. 방에 돌아와 문을 여는 순간 났던 그 탄내를 아직도 기억한다. 냄비 바닥은 새까맣게 눌어붙어 있었고, 손잡이는 만질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그날 아무 일도 없었다. 불이 나지 않았으니까. 다음 날 출근해서 이 얘기를 웃으며 했다. "나 완전 덜렁이야." 그걸로 끝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 십오 분 사이에 화재가 나서 옆집까지 번졌다면, 나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업무상실화죄로 기소되는 사람이 됐을 거다. 내가 한 행동은 정확히 똑같다. 가스불을 켜놓고 나갔다는 것. 달라지는 건 오직 그 십오 분 동안 세상에서 벌어진 일뿐이고, 그건 내 통제 밖에 있었다. 😔 죄책감이 아니라 '떠안음' 버나드 윌리엄스가 1976년 논문 「 도덕적 운 」에서 든 예는 사실 술 취한 운전자가 아니라 트럭 운전사다. 아무 잘못도 없이 규정 속도로, 신호도 지키며 운전하던 트럭 기사 앞에 아이가 갑자기 뛰어든다. 기사는 브레이크를 밟을 새도 없다.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그는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윌리엄스가 주목한 건 바로 그 지점이다. 비난받을 이유가 없는데도, 이 사람은 평생 그 순간을 안고 산다. 윌리엄스는 이걸 죄책감(guilt)과 구별해서 'agent-regret(행위자적 회한)'이라고 불렀다. 죄책감은 "내가 잘못했다"는 판단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 트럭 기사가 느끼는 감정은 판단이 아니라 사실에서 나온다. 자기 손이, 자기 발이, 그 사건의 한가운데 있었다는 사실.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는 명제와 "나는 그 일을 저질렀다"는 명제가 그의 안에서 동시에 참이고, 이 둘은 서로를 지우지 못한다. 내 가스불 얘기가 웃음으로 끝난 건 결과가 나를 ...

😶 레비나스 타자의 얼굴 앞에서 나는 왜 무장해제되었는가 - 엄마와의 다툼이 남긴 철학적 순간

🚪 문을 열자 마주친 얼굴 작년 11월 어느 저녁 8시쯤이었다. 설거지를 안 했다는 엄마의 잔소리로 시작된 말다툼이었다. "너는 맨날 그런 식이야"라는 내 말에, 엄마는 오래전 아버지 제사 준비를 나 혼자 다 떠맡겼던 일, 형만 챙긴다고 서운했던 기억들을 한꺼번에 꺼냈다. 나는 밥그릇을 싱크대에 던지듯 넣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형광등이 웅웅거리는 소리, 냉장고 모터 도는 소리만 들리는 방 안에서 한 시간쯤 씩씩거리다가, 목이 말라 문을 열었다. 거실엔 엄마가 있었다. 화장이 반쯤 지워진 얼굴로, 개다 만 빨래를 손에 쥔 채 멍하니 TV를 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서 있었다. 화가 안 풀린 것도 아닌데, 눈두덩이 붉어진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뭔가가 턱 걸렸다. 나중에 레비나스를 읽으면서 그 순간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그가 말한 '얼굴(visage)'을 마주친 거였다. 🌀 '얼굴'은 눈코입이 아니라 균열이다 레비나스 타자의 얼굴 은 생김새가 아니다. 그는 얼굴을 내가 상대를 파악하려는 순간 그 파악을 빠져나가는 것, 그가 '전체성(totalité)'이라 부른 나의 인식 틀을 찢고 나오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우리 엄마는 원래 저래"라는 문장은 전체성이다. 엄마를 내가 다 안다고 규정해버리는 틀이다. 그런데 그 순간 거실에서 본 엄마의 얼굴은 그 틀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화장 지워진 눈가, 개다 만 수건, 그 헐거운 자세 — 그건 내가 알던 '엄마'라는 카테고리보다 컸다. 레비나스는 이걸 얼굴이 "너는 나를 죽이지 못할 것이다"라고 명령한다고 표현한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이전에, 얼굴 자체가 이미 그 금지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철학책 여러 권에 나오는 얘기다. 진짜 질문은 그다음부터다. ✋ 그런데 그 얼굴이 나를 붙잡아 두는 손이라면 레비나스 윤리의 핵심은 비대칭...

🧠 알면서도 잘못을 반복하게 되는 이유 — 아크라시아 철학이 설명하는 의지와 행동 사이의 간극

🍗 치킨과 철학자 저녁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날이었다. 두 시간을 썼다. 그 수고가 아직 몸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냉장고를 열었고, 어젯밤 먹다 남긴 치킨이 있었다. 나는 먹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방금 전까지 '왜 나는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가'를 자책하며 뛰었다. 하지만 나는 먹었다. 다 먹었다. 이 장면이 이상한 이유는, 내가 몰라서 먹은 게 아니라는 점이다. 아는 것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이 틈새를 철학은 오래전부터 ' 아크라시아 철학 (akrasia)'라 불렀다. 의지박약이라 번역되지만 더 정확히는 '자기 판단에 반하는 행위'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진정으로 안다면 그릇되게 행동할 수 없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말이 틀렸다고 반박했다. 나는 매일 아리스토텔레스가 옳다는 증거를 생산하며 산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단: 앎에도 층위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1147a에서 아크라시아의 구조를 해부한다. 핵심은 이것이다. 우리는 동시에 두 종류의 앎을 가질 수 있으며, 그것이 충돌할 때 아크라시아가 발생한다. 첫째는 보편 명제다. "야식은 건강에 해롭다." 이건 내가 명제적으로 완전히 알고 있다. 시험에 나오면 맞출 수 있다. 둘째는 특수 명제다. "지금 이 치킨이 바로 그 해로운 것이다." 욕구가 강렬할 때, 이 두 번째 앎이 흐려진다. 치킨은 그냥 치킨이 된다. '건강에 해로운 야식'이 아니라. 보편 명제는 머릿속에 있지만 특수 명제가 욕구에 덮이면, 삼단논법의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잠든 사람이 수학 공리를 외우는 것에 비유했다. 말은 하지만, 실은 모르는 상태. 이 진단은 탁월하다. 내 경험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나는 치킨을 먹으면서 '해롭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어딘가 먼 곳에 있었다. 행동을 제지할 수 있는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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