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비대칭성: 덜 사랑하는 쪽이 쥔 힘의 정체, 최소 관심의 원칙과 연구로 본 연애의 저울

⚖️ 저울 위에 올라간 연애

'최소 관심의 원칙'이라는 말은 연애 심리 자료를 찾아보다 처음 봤다. 사회학자 윌러드 월러가 1938년 『The Family: A Dynamic Interpretation』에서 내놓은 개념이다. 관계에 관심이 덜한 쪽이 관계의 조건을 정한다는 뜻이다. 술자리에서 흔히 듣는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진다"는 말에 학문적인 이름이 붙어 있었던 셈이다.

숫자로 보면 이런 기울기가 얼마나 흔한지 알 수 있다. 사회학자 다이앤 펠믈리는 1994년에 미국 성인 413명을 조사했다. 여성이 더 깊이 빠져 있다고 답한 사람이 39%, 남성 쪽이라고 답한 사람이 21%였다(위키백과 'Principle of least interest'). 둘을 더하면 60%다. 열 명 중 여섯 명은 자기 관계가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고 느낀다는 말이다.

2006년에는 수전 스프레처, 마리아 슈멕클, 펠믈리가 이 원칙을 커플 단위로 다시 검증했다. 미국의 이성애 연인 101쌍을 4년 가까이 따라가며 여러 번 조사한 종단 연구였다. 결과는 이렇다. 감정의 불균형은 흔했고, 시간이 지나도 잘 바뀌지 않았다. 덜 빠진 쪽은 관계를 이어 갈지 말지를 자기가 더 쥐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감정이 비슷할수록 만족도와 안정성이 높았다(Penn State 연구 초록).

여기까지는 통념을 확인해 준 것에 가깝다. 내가 오래 붙들고 있었던 건 그다음 질문이다. 덜 사랑하는 쪽이 쥐고 있다는 그 '힘'은 도대체 어떤 힘일까.


💪 월러의 힘과 니체의 힘은 같은 말이 아니다

'힘'이라고 하면 니체의 힘에의 의지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월러가 말한 힘과 니체가 말한 힘을 같은 것으로 보면 안 된다. 둘은 거의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월러의 힘은 상대적이다. 내 힘은 상대가 나를 얼마나 필요로 하느냐에서 나온다. 한쪽 접시가 내려가야 다른 쪽이 올라가는 저울과 같아서, 한 사람의 힘은 곧 다른 사람의 의존이다. 게다가 이 힘을 실제로 쓰는 방법은 사실상 하나뿐이다. 떠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스프레처의 연구에서 덜 빠진 쪽이 쥐고 있다고 느낀 것도 정확히 '관계를 계속할지'였다. 이 힘은 관계를 끝낼 수는 있어도, 관계 안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자기 극복에 대하여」에서 말한 힘에의 의지는 다르다. 살아 있는 것은 늘 자기를 넘어서려 하고, 그 넘어섬 자체가 힘이다. 비교 대상은 남이 아니라 어제의 나다.

이 관점에서 보면 최소 관심의 힘은 묘한 처지에 놓인다. 그 힘을 지키려면 계속 덜 사랑해야 한다. 마음이 깊어지는 순간 저울이 기울고 힘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힘은 자기 감정이 자라지 못하게 스스로 막아야만 유지된다. 니체의 말로 하면 자기를 넘어서는 힘이 아니라 자기를 묶어 두는 힘이다.

나는 바로 여기에 "덜 사랑하는 쪽이 이긴다"는 말의 맹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긴 쪽도 그 자리를 지키려면 계속 덜 사랑해야 한다. 승자의 자리가 감옥과 닮아 있다. 감정이 비슷할 때 만족도가 높았다는 결과를 나는 두 사람 모두 그 감옥에서 나와 있는 상태로 읽는다.


🍂 무상(無常)은 저울이 뒤집힌다는 약속이 아니다

짝사랑을 하거나 기울어진 연애를 할 때는 불교의 무상을 위로 삼고 싶어진다. 모든 건 변하니까 이 기울기도 언젠가 바뀔 거라고. 하지만 이 위로는 앞의 데이터와 정면으로 부딪힌다. 스프레처의 연구에서 '누가 더 빠져 있는가'에 대한 인식은 시간이 지나도 대체로 그대로였다. 4년 가까이 지켜봐도 기울기는 좀처럼 뒤집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상은 틀린 말일까. 나는 내가 무상을 잘못 쓰고 있었다고 본다. "언젠가 그 사람도 나만큼 사랑하게 될 거야"라는 기대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의 변화만 움켜쥐는 것이다. 그건 무상의 가르침이 아니라 갈애(渴愛)가 모양만 바꾼 것이다. 『법구경』 214게송은 "집착에서 슬픔이 생기고, 집착에서 두려움이 생긴다"고 말한다(Access to Insight, 『법구경』 16장). 기울기가 언젠가 바로잡히리라는 희망도 집착일 수 있다.

무상이 실제로 흔드는 건 저울의 눈금이 아니라 저울 위에 서 있는 '나'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자리를 내 고정된 정체성으로 삼는 순간, 나는 그 역할을 연기하기 시작한다. 연구에서 나타난 '오래가는 불균형'에도 이런 연기가 조금은 섞여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건 내 추측이고 데이터로 확인된 건 아니다. 다만 기울기 자체는 바뀌지 않더라도, 그 기울기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 주는 증거로 삼지 않을 수는 있다.


🔄 영원회귀 앞에서 묻는 것

이런 장면을 떠올려 보자. 메시지를 보내 놓고 답장이 올 때까지 휴대폰을 몇 번이고 뒤집어 보는 사람이 있다. 늘 먼저 연락하는 쪽이 자기라는 걸 알기에 이번엔 참아 보려 하지만, 결국 또 먼저 보낸다. 기울어진 연애를 해 본 사람에게는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 341절에서 묻는다. 지금의 삶을 똑같이, 끝없이 다시 살아야 한다면 너는 그것을 원하겠느냐고. 이 질문을 저 장면에 대 보면 쉽게 답하기 어렵다. 휴대폰을 뒤집던 그 초조함까지 영원히 되풀이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전의 나는 이 질문을 시험지처럼 썼다. 되풀이하고 싶으면 괜찮은 사랑이고, 아니면 떠나라는 신호라고. 하지만 니체가 276절에서 말한 운명애(amor fati)는 그런 양자택일이 아니다. 그는 필연적인 것을 아름답게 보는 법을 더 배우고 싶다고 썼다. 운명애는 좋은 부분만 골라 받아들이는 게 아니다. 초조함과 굴욕까지 포함한 전체를 내 것으로 긍정하는 일이다.

여기서 하나를 구분해야 한다. 긍정한다는 것과 머문다는 것은 다르다. 내가 더 많이 사랑했던 시간을 통째로 긍정하면서도, 오늘 그 관계를 떠나기로 할 수 있다. 오히려 지나간 기울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깨끗하게 떠날 수 있다. 그 시간을 부정하는 사람은 떠난 뒤에도 머릿속에서 그 관계를 계속 다시 산다. 지난 사랑이 끝없이 되돌아오는 걸 멈추려면, 먼저 그 사랑을 통째로 긍정해야 한다는 역설이다.


🌱 저울에서 내려오는 연애

결국 '누가 더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은 사랑을 저울 위에 올릴 수 있는 양으로 본다. 월러의 힘은 그 저울 위에서만 존재한다. 니체와 불교는 전혀 다른 길로 같은 말을 한다. 저울에서 내려오라는 것이다. 니체는 힘을 재는 기준을 상대와의 격차에서 자기 극복으로 옮긴다. 불교는 격차를 재고 또 재는 마음 자체를 집착으로 본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건강한 태도는 기울기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연구가 보여 주듯 기울기는 흔하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바꿀 수 있는 건 무엇을 재느냐다. "내가 더 사랑하나?" 대신 "이 사랑이 나를 넓히고 있나, 좁히고 있나?"를 묻는 것이다.

더 많이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 덕분에 더 섬세해지고 더 용감해지고 있다면, 니체의 뜻에서 힘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덜 사랑하는 쪽이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마음을 계속 눌러 두고 있다면, 저울에서는 이겨도 삶에서는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 사랑이 나를 좁히기만 한다면, 그 시간을 긍정한 채로 저울에서 내려오면 된다. 앞 절에서 말한 운명애가 바로 그 일을 가능하게 해 준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 14절에서 소유욕으로서의 사랑을 날카롭게 비판한 뒤, '우정'이라는 말로 글을 맺는다. 두 사람이 서로를 차지하려는 대신 함께 자기들 위의 더 높은 무언가를 향하는 사랑이다. 감정이 비슷한 커플이 더 만족한다는 연구 결과도 나는 이 방향으로 읽는다. 두 사람의 사랑이 정확히 같은 양이어서라기보다, 둘 다 저울을 보지 않고 같은 쪽을 바라보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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