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이 정체성인 게시물 표시

🌱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 질베르 시몽동 개체화 철학이 알려준 미완성 존재의 진짜 비밀

🗓️ 스무 살의 내가 쓴 문장 앞에서 지난달 이사 준비를 하다가 오래된 상자에서 대학교 2학년 때 쓰던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2011년 3월 14일 자 페이지에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오늘도 지원이한테 말 못 걸었다. 편의점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왔다. 나는 왜 매번 이럴까. 스물다섯 되면 좀 달라져 있겠지." 열다섯 해가 지났다. 나는 그날의 편의점 골목을 여전히 기억하지만, 그 문장을 쓴 사람과 지금의 나 사이에 무슨 연속성이 있는지 한참을 생각했다. 세포는 다 바뀌었고, 소심함도 그때와는 다른 모양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도 다이어리를 읽는 내내 "이건 분명 나다"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 감각이 어디서 오는지 설명해준 건 뜻밖에도 철학책이었다. 🧬 개체가 아니라 개체화 질베르 시몽동 의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황수영 옮김, 그린비, 2017)를 처음 펼쳤을 때 당황했던 건, 이 책이 "개체(individu)"라는 명사가 아니라 "개체화(individuation)"라는 동사적 과정을 주어로 삼는다는 점이었다. 서론에서 시몽동은 서양 철학이 오랫동안 저지른 실수를 지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이든 원자론이든, 다들 완성된 개체를 먼저 세워두고 그 개체가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나중에야 부차적으로 묻는다는 것이다. 그는 순서를 뒤집는다. 먼저 있는 건 완결된 사물이 아니라 아직 풀리지 않은 긴장, 그가 "준안정 상태(état métastable)"라 부르는 것이다. 결정화되지 않은 과포화 용액처럼, 서로 다른 크기의 질서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퍼텐셜 에너지만 가득한 상태. 개체는 이 긴장이 국소적으로 풀리면서, 즉 결정화(cristallisation)를 통해 튀어나오는 사건이지 처음부터 준비되어 있던 완성품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결정화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정 하나가 만들어...

🕊️ 형용사를 지우자 내가 보였다 — 케노시스가 가르쳐준 자기비움과 자아의 역설, 그 새벽의 발견

🌙 자기소개서에서 형용사를 지우던 밤 이직을 준비하면서 자기소개서를 고치던 밤이 있었다. 화면에는 "전략적 사고를 바탕으로", "능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팀을 이끄는 리더십을 발휘해온" 같은 문장들이 빼곡했다. 다 지웠다. 하나씩. 형용사부터, 그다음 부사, 그다음 자랑처럼 들리는 동사까지. 새벽 두 시쯤 되니 문서에는 내가 실제로 한 일들, 그러니까 "6개월간 매주 고객 열댓 명을 직접 인터뷰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기능 우선순위를 바꿨다" 같은 밋밋한 문장들만 남았다. 이상한 건 그 다음이었다. 수식어를 다 걷어내고 남은 문장이 오히려 더 나답게 느껴졌다. 포장을 벗겨낼수록 내가 더 잘 보였다. 그때 처음으로, 자아라는 게 채워서 완성되는 게 아니라 걷어내서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신학 공부를 하다가 이 감각에 이름이 있다는 걸 알았다. 케노시스(자기비움) ), 그리스어로 "비움"이다. 👑 케노시스, 권력이 스스로를 지운 사건 빌립보서 2장은 이렇게 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초대 교회는 이 구절을 두고 오래 다퉜다. 19세기 신학자 고트프리트 토마지우스는 성육신 순간 신이 전능이나 편재 같은 속성을 실제로 내려놓았다고 주장했고, 정통 교의학은 그렇게 되면 신의 불변성 자체가 무너진다며 반박했다. 신이 신이기를 잠깐 멈출 수 있는가, 라는 형이상학 퍼즐이다. 솔직히 나는 이 논쟁의 승패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내가 눈여겨보는 건 방향이다. 이 텍스트가 그리는 건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존재가 자리를 지키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내려놓는 쪽을 택했다"는 그림이다. 그런데 요즘 자기계발서에서 케노시스를 인용할 때는 보통 반대 논리를 쓴다. "자아를 비우면 더 ...

🔍 '아닌 것'을 알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 아포파티즘을 일상에 들이는 법

✍️ 자기소개서 앞에서 막힌 이유 2019년 겨울, 나는 채용 공고 앞에서 이상한 막막함에 빠진 적이 있다. 자기소개서 첫 칸, '자신을 한 문장으로 표현해보세요'라는 항목이었다. 열다섯 분이 지나도 커서는 깜박이기만 했다. 문장을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면서 뭔가를 깨달았다 — 나는 나를 '무엇'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무능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쓰는 모든 문장이 즉시 반례를 불렀다. '나는 끈기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썼다가, 중도에 그만둔 일들을 떠올리고 지웠다. 그 막막함은 사실 철학적으로 꽤 정직한 반응이었다. 우리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규정하는 데 익숙하다. '나는 ~이다'의 문법으로. 그런데 그 문법 자체가 자아를 왜곡하는 틀일 수 있다는 오래된 생각이 있다. 이것을 아포파티즘 일상 적용 (apophaticism), 혹은 부정의 길(via negativa)이라고 부른다. 🏛️ 신학에서 출발한 부정의 논리 아포파티즘은 원래 신학에서 왔다. 5세기 신학자 위(僞)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Pseudo-Dionysius the Areopagite)는 신에 대해 '전능하다', '선하다', '지혜롭다'와 같은 긍정적 서술이 오히려 신을 축소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언어로 규정되는 순간, 신은 그 언어의 한계 안에 갇힌다. 그래서 그는 반대 방향을 택했다 — 신은 이것이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부정의 축적을 통해 도달하는 어떤 경계. 그것이 오히려 더 정직한 접근이라는 것이다. 이 논리가 신학 바깥에서도 작동한다는 것을 비트겐슈타인이 다른 언어로 보여줬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silent)." 이 문장은 흔히 불가지론의 선언으로 읽히지만, 사실 그 앞에 전제가 있다. 언어는 세계...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로스트아크] 제작 효율 최적화 위한 영지 세팅

[로스트아크] 로스트아크 생활 도구 옵션

한국 핵무장 논의와 방위산업 관련주: 핵무기 개발 과정과 유망 종목 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