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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용사를 지우자 내가 보였다 — 케노시스가 가르쳐준 자기비움과 자아의 역설, 그 새벽의 발견

## 🌙 자기소개서에서 형용사를 지우던 밤 이직을 준비하면서 자기소개서를 고치던 밤이 있었다. 화면에는 "전략적 사고를 바탕으로", "능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팀을 이끄는 리더십을 발휘해온" 같은 문장들이 빼곡했다. 다 지웠다. 하나씩. 형용사부터, 그다음 부사, 그다음 자랑처럼 들리는 동사까지. 새벽 두 시쯤 되니 문서에는 내가 실제로 한 일들, 그러니까 "6개월간 매주 고객 열댓 명을 직접 인터뷰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기능 우선순위를 바꿨다" 같은 밋밋한 문장들만 남았다. 이상한 건 그 다음이었다. 수식어를 다 걷어내고 남은 문장이 오히려 더 나답게 느껴졌다. 포장을 벗겨낼수록 내가 더 잘 보였다. 그때 처음으로, 자아라는 게 채워서 완성되는 게 아니라 걷어내서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신학 공부를 하다가 이 감각에 이름이 있다는 걸 알았다. [케노시스(자기비움)](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케노시스(자기비움)), 그리스어로 "비움"이다. --- ## 👑 케노시스, 권력이 스스로를 지운 사건 빌립보서 2장은 이렇게 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초대 교회는 이 구절을 두고 오래 다퉜다. 19세기 신학자 고트프리트 토마지우스는 성육신 순간 신이 전능이나 편재 같은 속성을 실제로 내려놓았다고 주장했고, 정통 교의학은 그렇게 되면 신의 불변성 자체가 무너진다며 반박했다. 신이 신이기를 잠깐 멈출 수 있는가, 라는 형이상학 퍼즐이다. 솔직히 나는 이 논쟁의 승패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내가 눈여겨보는 건 방향이다. 이 텍스트가 그리는 건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존재가 자리를 지키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내려놓는 쪽을 택했다"는 그림이...

🔍 '아닌 것'을 알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 아포파티즘을 일상에 들이는 법

## ✍️ 자기소개서 앞에서 막힌 이유 2019년 겨울, 나는 채용 공고 앞에서 이상한 막막함에 빠진 적이 있다. 자기소개서 첫 칸, '자신을 한 문장으로 표현해보세요'라는 항목이었다. 열다섯 분이 지나도 커서는 깜박이기만 했다. 문장을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면서 뭔가를 깨달았다 — 나는 나를 '무엇'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무능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쓰는 모든 문장이 즉시 반례를 불렀다. '나는 끈기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썼다가, 중도에 그만둔 일들을 떠올리고 지웠다. 그 막막함은 사실 철학적으로 꽤 정직한 반응이었다. 우리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규정하는 데 익숙하다. '나는 ~이다'의 문법으로. 그런데 그 문법 자체가 자아를 왜곡하는 틀일 수 있다는 오래된 생각이 있다. 이것을 [아포파티즘 일상 적용](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아포파티즘+일상+적용)(apophaticism), 혹은 부정의 길(via negativa)이라고 부른다. --- ## 🏛️ 신학에서 출발한 부정의 논리 아포파티즘은 원래 신학에서 왔다. 5세기 신학자 위(僞)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Pseudo-Dionysius the Areopagite)는 신에 대해 '전능하다', '선하다', '지혜롭다'와 같은 긍정적 서술이 오히려 신을 축소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언어로 규정되는 순간, 신은 그 언어의 한계 안에 갇힌다. 그래서 그는 반대 방향을 택했다 — 신은 이것이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부정의 축적을 통해 도달하는 어떤 경계. 그것이 오히려 더 정직한 접근이라는 것이다. 이 논리가 신학 바깥에서도 작동한다는 것을 비트겐슈타인이 다른 언어로 보여줬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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