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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에서 세 번 고쳐 쓴 슬랙 문장으로 읽는 파레시아, 위험을 감수한 진실 말하기

⌨️ 화요일 밤, 커서만 깜빡였다 지난주 화요일이었다. 로드맵 리뷰 코멘트를 슬랙에 남기려고 세 번을 썼다 지웠다. 처음 쓴 문장은 이랬다. "이 지표를 이렇게 정의하면 3분기 숫자가 왜곡될 것 같은데요." 두 번 읽고 지웠다. 다음엔 "제가 잘 몰라서 그런데, 이 지표 정의가 좀 이상해 보여서요"로 바꿨다. 그것도 지웠다. 결국 보낸 문장은 "지표 정의 관련해서 잠깐 통화 가능하실까요?"였다. 하고 싶었던 말은 셋 다 같았는데, 위험은 매번 조금씩 줄었다. 세 번째 문장에는 애초에 내 의견이 없었다.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파레시아 라는 개념이 정확히 저 세 문장 사이의 거리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 파레시아는 용감한 말이 아니라 값을 치르는 말이다 푸코가 1983년 버클리 강연에서 정리한 파레시아는 그냥 "솔직함"이 아니다. 그는 파레시아를 수사학(레토릭), 아첨(콜라케이아)과 구분하면서 세 가지 조건을 건다. 화자가 그 말을 참이라고 진짜로 믿을 것, 그 말을 함으로써 관계나 지위나 신변에 위험이 실제로 발생할 것, 그리고 그 위험을 감수하는 게 화자의 의무처럼 느껴질 것. 이 셋 중 하나라도 빠지면 그건 파레시아가 아니라 그냥 발언이다. 수사학자는 청중을 설득하기 위해 자기가 안 믿는 말도 유창하게 할 수 있다. 아첨꾼은 위험 없이 듣기 좋은 말만 한다. 파레시아스트만 위험을 안고 믿는 바를 말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하나 있다. 회사들이 "심리적 안전감"을 만들어서 솔직한 피드백 문화를 조성하겠다고 할 때, 그건 사실 파레시아의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시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위험을 없애면 용기도 필요 없어진다. 위험이 없는 곳에서 하는 말은 편하게 하는 말이지, 목숨 걸고 하는 말이 아니다. 푸코의 정의대로라면 완벽하게 안전한 조직에서 나오는 발언은 엄밀히 파레시아가 아니다. 그냥 정보 공유다. 안전과 용기는 같은 방향의 두 단계가...

🤐 댓글을 지운 그 3초—푸코의 파레시아로 읽는 SNS 시대의 침묵

🗑️ 그날 나는 왜 댓글을 지웠을까 몇 달 전 일이다. 지인이 SNS에 올린 글이 영 찜찜했다. 틀린 정보는 아니었다. 다만 절반만 말한 진실—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더 교묘한 거짓이었다. 나는 댓글창을 열고, 다섯 문장쯤 썼다가 지웠다. 썼다가 또 지웠다. 결국 이모지 하나만 남겼다. 뭐가 무서웠던 걸까. 그 글에는 이미 수백 개의 공감이 달려 있었고, 댓글들은 하나같이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내 말은 분명 튀어 보일 것이었다. 괜히 관계가 껄끄러워질 수도 있었다. 그냥 넘어가는 게 현명해 보였다. 나만 그런 게 아닌 것도 안다.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가 2020년 미국 SNS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48퍼센트가 "원래 쓰려던 내용을 수정하거나 삭제한 적 있다"고 답했다. 거의 절반이다. 쓰다가 멈춘 말들이 이 세계에 얼마나 쌓여 있을까. 🎯 파레시아 : 진실은 위험을 동반해야 한다 푸코(Michel Foucault)는 말년에 '파레시아(parrhesia)'라는 고대 그리스 개념을 다시 꺼냈다. 1983~84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 사후에 『진실의 용기(Le Courage de la vérité)』로 묶인 그 강의에서 그는 파레시아를 단순한 '솔직함'과 구분했다. 파레시아에는 세 조건이 붙는다. 말하는 사람이 그 진실을 진심으로 믿을 것. 그 말이 말하는 사람에게 실제 위험을 초래할 것. 그럼에도 말하는 것이 의무라는 인식에서 비롯될 것. 두 번째 조건이 핵심이다. 푸코가 든 예는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는 권력자들 앞에서 그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했고 사형을 받았다. 반면 상사가 부하에게 "네 기획서 별로야"라고 말하는 건 파레시아가 아니다.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파레시아는 구조적으로 약자가 강자에게, 또는 동등한 관계에서 상대가 듣기 싫어할 말을 꺼내는 행위다. SNS 시대의 우리는 파레시아를 실천하고 있을까. 🌀 SNS가...

🗣️ 나는 왜 그 말을 삼켰는가 — 파레시아와 SNS의 진실 발화 구조

2022년 겨울, 나는 트위터 입력창 앞에서 약 3분을 멈춰 있었다. 대학 선배가 특정 복지 정책을 비판하는 긴 스레드를 올렸는데, 그가 인용한 OECD 수치가 원래 맥락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된 걸 알고 있었다. 정정 댓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손가락이 멈췄다. '이 선배는 팔로워가 3만 명이다. 그 팔로워들이 내 프로필을 클릭할 것이다. 내 과거 트윗들이 보일 것이다. 어떤 트윗이 오해받을 수 있다.' 나는 결국 댓글을 쓰지 않았다. 사흘 뒤 그 스레드는 3,200번 이상 리트윗됐다. 오류 포함으로. 그 3분 동안 내 안에서 무슨 계산이 이루어졌는지, 나는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 파레시아 : 위험을 감수하는 발화라는 기술 푸코는 1983년 버클리 강연—후에 《담론과 진실》(Discourse and Truth)로 출판된—에서 '파레시아(parrhesia)'를 단순한 진실 발화가 아닌 윤리적 실천으로 정의한다. 파레시아적 발화자는 세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말해야 하고, 그 발화로 인해 자신에게 어떤 위험—사회적, 관계적, 물리적—이 돌아올 것임을 알아야 하며, 그럼에도 말해야 한다. 푸코는 이것을 명시적으로 "용기의 문제"라 부른다. 아무런 대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파레시아가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파레시아는 구체적인 공간을 전제했다. 발화자는 특정 청자—왕, 시민 집회, 철학 학파의 제자—앞에서 말했다. 맥락이 있었고, 청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으며, 위험의 크기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푸코가 파레시아를 'tekhnē(기술, 실천)'라고 부른 것은 이 때문이다. 진실 말하기는 추상적 덕목이 아니라 구체적인 조건 속에서 연습되고 숙련되는 기예(技藝)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SNS라는 공간에서 이 기술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아니, 작동할 수 있는가. 🌀 침묵의 나선은 디지털에서 어떻게 진화했는가 노엘레-노이만(Elisabeth ...

🗣️ 그날 회의실에서 침묵했던 나, 고대 그리스 철학 '파레시아'를 알았다면 인생이 달라졌을까

🤐 "그거 진짜 이대로 가도 되는 거예요?"라고 묻지 못한 날 2019년 가을, 그러니까 지금 다니는 회사로 옮기기 전 마지막 직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팀장님이 야심 차게 밀어붙이던 게 '전사 협업툴 자체 개발' 프로젝트였다. 슬랙이나 노션 같은 거 다 놔두고 우리 손으로 만들어 쓰자는 거였는데, 개발 인력이라곤 나 포함 세 명이 전부인 마케팅 부서 산하 TF였다. 첫 킥오프 회의에서 일정표를 봤을 때 이미 머릿속에선 "이거 6개월 안에 절대 안 끝난다"는 계산이 끝나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동료 진우(가명)가 나한테 속삭였다. "형, 저거 내년 이맘때도 데모 화면 하나 못 띄울 것 같지 않아요?" 나도 똑같이 생각했다고 답했다. 근데 거기까지였다. 회의실로 돌아가서 손을 들고 "팀장님, 이 일정 자체가 비현실적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 프로젝트는 8개월을 끌다가 예산 재검토 명목으로 조용히 묻혔고, 그사이 우리 셋 중 둘이 퇴사했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 푸코가 다시 꺼낸 오래된 그리스어, 파레시아 이 기억이 다시 떠오른 건 최근에 미셸 푸코의 1983년 버클리 강의록 《담론과 진실》을 읽으면서다. 푸코는 고대 그리스 '파레시아'(거침없이 말하기) 개념과 현대 직장 내 솔직함 +개념과+현대+직장+내+솔직함)이라는 말이 단순히 '말을 잘한다'는 뜻이 아니었다고 짚는다. 어원을 풀면 '판(pan, 모든)'과 '레시스(rhesis, 말)'가 합쳐진 단어로, 직역하면 '모든 것을 말하기'에 가깝다. 흥미로운 건 푸코가 정리한 파레시아의 조건이다. 그는 파레시아가 성립하려면 ① 화자가 그 말이 사실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어야 하고 ② 그 말을 함으로써 청자와의 관계나 자기 위치가 위태로워질 위험을 감수해야 하며 ③ 그럼에도 비판이나 충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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