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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으로 끌려 내려가는 마음에게: 시몬 베유가 말한 중력과 은총, 지친 마음을 위한 회복법

## 🌙 화요일 밤 11시, 배포 버튼을 누르고 나서 작년 가을, 10개월 끌던 앱 리뉴얼 프로젝트를 화요일 밤 11시에 배포했다. 마지막 커밋을 올리고 나니 몸이 텅 빈 캔처럼 가벼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노트북을 덮고 눕기는커녕, 40분 뒤 다시 열어서 다음 분기 할 일 목록을 만들고 있었다. 딱히 급한 일도 아니었다. 그냥 뭐라도 계획해두지 않으면 불안했다. 그 다음 사흘도 마찬가지였다. 퇴근하면 저녁마다 새 할 일을 하나씩 추가했는데, 나중에 세어보니 그중 실제로 다음 달까지 필요했던 항목은 하나도 없었다. 쉬어야 할 몸이 대신 계획을 만들고 있었다는 게, 그때는 이상하다고 느끼지도 못했다. --- ## 📖 베유가 "중력"이라는 단어를 가져온 이유 『중력과 은총』은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시몬+베유+중력과+은총)가 1943년 서른네 살에 죽은 뒤, 생전에 쓴 노트(cahiers)를 귀스타브 티봉이 추려 1947년에 처음 묶어낸 책이다. 원래 완결된 논증서가 아니라 단상 모음이라, 티봉이 직접 "중력과 은총", "공백과 보상" 같은 제목을 붙여 장을 나눴다. 책의 첫 문장으로 알려진 구절은 이렇다. > "Tous les mouvements naturels de l'âme sont régis par des lois analogues à celles de la pesanteur matérielle. La grâce seule fait exception." 내가 옮기면 "영혼의 모든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물리적 중력과 유사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은총만이 예외다" 정도가 된다. 번역서마다 표현이 조금씩 다를 수 있으니 정확한 어감은 원문 대조가 필요하지만, 핵심 구도는 분명하다. 욕망, 불안, 자기주장 같은 것은 사과가 떨어지듯 저절로 아래로 끌려간다는 것. 노...

📝 짝사랑 감정일지 쓰는 법: 열두 번의 프로필 확인과 한 줄 기록으로 마음 다스리는 방법

## 🌙 카톡 프로필을 열두 번째 확인하던 밤 작년 가을 어느 화요일, 나는 그 사람 카톡 프로필을 몇 번이나 열어보는지 직접 세어봤다. 열두 번이었다. 손가락으로 앱을 켰다 끄는 그 동작 자체를 세면서, 이게 얼마나 반복적인 몸짓인지 처음 실감했다. 답장이 늦으면 손바닥에 땀이 났고, 답장이 오면 그 문장을 세 번쯤 다시 읽었다. 문제는 이 패턴을 안다고 해서 멈춰지지 않았다는 거다. 알아차림과 통제는 다른 능력이었다. 그날 밤 메모장 대신 A5 노트를 하나 꺼냈다. 감정을 정리해보겠다는 거창한 결심은 아니었다. 그냥 다음번에 프로필을 열 때, 그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줄이라도 적어보고 싶었다. --- ## 📝 적은 건 감정이 아니라 '몇 시, 무슨 일'이었다 처음엔 "설렌다" "불안하다" 같은 형용사를 적었는데, 사흘 만에 그만뒀다. 형용사는 매번 비슷해서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대신 형식을 바꿨다. 시각, 직전에 있었던 일, 몸에서 일어난 감각, 그리고 내가 실제로 한 행동.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10월 14일 22:47 — 그 사람이 다른 사람 인스타에 댓글 단 걸 봄. 명치가 조여옴. 프로필 3번 새로고침함. 10월 16일 09:12 — 아침에 연락 없음. 별생각 없이 출근함. 특이사항 없음. 한 달을 이렇게 적고 나서야 패턴이 보였다. 불안은 무작위로 오지 않았다. 거의 매번 '그 사람이 다른 누군가와 상호작용하는 걸 목격한 직후'에만 왔다. 상대가 나한테 무관심했던 순간엔 오히려 불안하지 않았다. 이건 형용사만 적었을 땐 절대 안 보였을 구조였다. --- ## 😈 니체라면 이 페이지를 다시 읽고 싶어 했을까 니체는 「즐거운 학문」 341절에서 어느 악마가 찾아와 이렇게 말하는 상상을 한다. 네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을, 이 밤을, 사소한 것 하나 안 빠뜨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아야 한다면 너는 그 악마를 저주할 것인가, 아니면 신으로 떠...

💔 불안형 애착유형 연애패턴: 왜 나는 매번 같은 방식으로 상처받는가

## 💬 상대의 읽음 표시 하나에 온 우주가 흔들릴 때 연락이 뜸해지면 나는 이미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카톡 읽음 표시가 뜬 지 두 시간이 지나도 답이 없으면, 나는 상대가 바빠서가 아니라 나를 싫어하게 됐다는 결론부터 꺼내 들었다. 이유를 찾는 게 아니라 최악의 결론에서 역추적하는 방식으로. 그러다 답장이 오면 잠깐 안도했다가 — 다음 연락까지 또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한동안 이게 내가 더 사랑하는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경험한 건 사랑의 크기가 아니라 사랑이 어떤 구조로 작동하는가의 문제였다. 나는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확인받고 있었다. 그 차이가 전부였다. --- ## ⚡ 니체가 말한 '반응하는 자의 사랑'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부 「자기극복에 대하여」에서 쓴다. "살아 있는 것이 있는 곳마다 나는 힘에의 의지를 발견했다.(Wo ich Lebendiges fand, da fand ich Willen zur Macht.)" 여기서 힘에의 의지는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려는 충동, 자기 안에서 무언가를 창조하려는 에너지다. 그런 맥락에서 [애착유형 불안형 연애패턴](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애착유형+불안형+연애패턴)은 힘에의 의지가 안쪽을 향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위탁된 상태다. 내가 사랑받는지 여부가 내 존재의 가치를 결정하게 되면, 나는 더 이상 창조자가 아니라 반응자가 된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 1논문에서 분석한 르상티망(ressentiment)이 이 구조와 닮아 있다. 르상티망은 자기 안에서 힘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의 행동을 원인으로 삼아 자기 감정을 설명하는 패턴이다. 상대가 답장을 늦게 보냈다 → 나를 싫어하는 거다 →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다. 이 연쇄가 반응하는 자의 사랑이다. 같은 책 2부 「밤의 노래」에서 차라투스트라는 ...

💔 짝사랑인지 외로움인지 구별하는 법: 감정의 대상이 그 사람인지 진단하기

## 💌 어떤 겨울의 문자 한 통 작년 겨울, 같은 독서 모임에 나오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책을 항상 연필로 읽었다—밑줄을 긋고, 여백에 짧은 메모를 남기는 방식이었다. 한번은 그 사람이 가져온 카뮈의 『이방인』을 잠깐 들었다가 여백에서 "오늘도 태양은 뜨겁다"라는 메모를 발견했다. 왜인지 그 문장이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그 사람이 한 주를 빠진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주 내내 핸드폰을 특별한 이유 없이 자꾸 확인했다. 12월의 목요일 오후, "이번 주 책 어떠셨어요?"라는 문자가 왔을 때 나는 그 짧은 문장을 세 번 읽었다. 그리고 확신했다—이건 사랑이다. 그런데 그게 정말 사랑이었을까. 지금 돌아보면, [짝사랑인지 외로움인지 구별하는 법](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짝사랑인지+외로움인지+구별하는+법)은 생각보다 미묘하다—그 확신이 흔들리는 지점이 있다. --- ## 🤔 니체의 질문: 원하는 것이 그 사람인가, 원함 자체인가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1부 「선사하는 덕에 대하여」(Von der schenkenden Tugend)에서 두 종류의 사랑을 암묵적으로 구분한다. 하나는 충만함에서 흘러넘치는 사랑—내가 무언가로 가득 차 있어서 그것을 줄 수밖에 없는 상태. 다른 하나는 결핍에서 비롯되는 사랑—안에 빈 공간이 있고, 그 공간을 채울 무언가를 찾는 상태. 그 겨울 내가 그 사람을 그리워했던 방식이 어느 쪽이었는지 생각해봤다. 그 사람의 부재 자체가 고통스러웠던 게 아니라, 주말 오후 두 시의 고요함이 견디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 사람이 빠진 주에 핸드폰을 자꾸 본 건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 고요 때문이었을 수 있었다.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는 니체에게 팽창하고 창조하는 힘이다—결핍을 채우려는 충동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에서 더 많은 것을 만들어내려는 운...

🔍 '아닌 것'을 알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 아포파티즘을 일상에 들이는 법

## ✍️ 자기소개서 앞에서 막힌 이유 2019년 겨울, 나는 채용 공고 앞에서 이상한 막막함에 빠진 적이 있다. 자기소개서 첫 칸, '자신을 한 문장으로 표현해보세요'라는 항목이었다. 열다섯 분이 지나도 커서는 깜박이기만 했다. 문장을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면서 뭔가를 깨달았다 — 나는 나를 '무엇'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무능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쓰는 모든 문장이 즉시 반례를 불렀다. '나는 끈기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썼다가, 중도에 그만둔 일들을 떠올리고 지웠다. 그 막막함은 사실 철학적으로 꽤 정직한 반응이었다. 우리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규정하는 데 익숙하다. '나는 ~이다'의 문법으로. 그런데 그 문법 자체가 자아를 왜곡하는 틀일 수 있다는 오래된 생각이 있다. 이것을 [아포파티즘 일상 적용](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아포파티즘+일상+적용)(apophaticism), 혹은 부정의 길(via negativa)이라고 부른다. --- ## 🏛️ 신학에서 출발한 부정의 논리 아포파티즘은 원래 신학에서 왔다. 5세기 신학자 위(僞)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Pseudo-Dionysius the Areopagite)는 신에 대해 '전능하다', '선하다', '지혜롭다'와 같은 긍정적 서술이 오히려 신을 축소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언어로 규정되는 순간, 신은 그 언어의 한계 안에 갇힌다. 그래서 그는 반대 방향을 택했다 — 신은 이것이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부정의 축적을 통해 도달하는 어떤 경계. 그것이 오히려 더 정직한 접근이라는 것이다. 이 논리가 신학 바깥에서도 작동한다는 것을 비트겐슈타인이 다른 언어로 보여줬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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