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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짝사랑도 권태기가 온다: 3년 2개월 만에 알아챈 무감각의 신호들, 짝사랑 권태기 극복법

🌙 화요일 밤 9시,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는데 아무 느낌이 없었다 지난주 화요일, 카톡 목록을 내리다가 그 이름 옆에 뜬 작은 느낌표를 봤다.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다는 표시. 재작년 12월이었다면 나는 그 사진을 3분 동안 확대했다 축소했다 했을 거다. 배경에 누가 있는지, 어디서 찍었는지, 저 옷은 처음 보는 건지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그런데 이번엔 그냥 눌러 확인하고 다시 목록을 내렸다. 3초. 그게 다였다. 집에 와서 계산해보니 3년 2개월째였다. 처음 좋아하게 된 날짜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이 감정이 얼마나 오래 내 일상의 배경음이었는지 보여준다. 그런데 그 배경음이 어느 순간 꺼져 있었다. 슬픈 것도 아니고 후련한 것도 아닌, 그냥 무음. ⏳ 리머런스는 원래 유통기한이 있다 — 상대가 나를 좋아하든 말든 이 무감각을 설명해줄 첫 번째 단서는 도로시 테넌브(Dorothy Tennov)의 1979년 저서 『Love and Limerence』다. 테넌브는 약 500명을 인터뷰와 설문으로 조사해서 '리머런스(limerence)'라는 개념을 정리했는데, 이 강렬한 몰입 상태가 평균 18개월에서 3년 사이에 자연 소멸하고 4년을 넘기는 경우는 드물다는 결론을 냈다. 중요한 건 이 수치가 짝사랑이든 연애든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헬렌 피셔와 아서 아론 연구팀이 2005년 《Journal of Neurophysiology》에 발표한 fMRI 연구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열렬한 연애 초기 상태에 있는 17명(여성 10명, 남성 7명)의 뇌를 스캔했더니 복측피개영역(VTA)과 미상핵이 활성화됐는데, 이 부위는 코카인 같은 중독 물질에 반응하는 보상 회로와 겹친다. 즉 설렘은 '상대가 나를 좋아해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불확실성과 새로움에 도파민이 반응하는 신경학적 현상에 가깝다. 짝사랑이 유독 오래갈 것 같지만, 사실 응답받지 못한 채로도 이 회로는 언젠가 지친다. 상대의 반응 여부는 이 소멸 시계에 큰 영향을...

💔 권태기 철학적 의미: 문자를 봐도 아무렇지 않던 밤, 사랑이 습관 벗고 존재가 되는 순간

❄️ 겨울, 이자카야에서 나는 그 사람의 문자를 봐도 아무렇지 않았다 2024년 12월 어느 목요일 밤이었다. 회사 앞 이자카야에서 그 사람 문자가 왔다. "오늘 늦어?" 딱 네 글자. 예전 같으면 화면 켜지는 진동만 느껴도 심장이 뛰었을 텐데, 그날은 그냥 "응"이라고 답하고 다시 동료랑 하던 얘기로 돌아갔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이상하게 죄책감이 밀려왔다. 사귄 지 이 년 조금 넘었을 때였다.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계속 그 생각만 했다. 이게 권태기 철학적 의미 라는 건가, 그럼 이제 끝나가는 건가. 친구한테 카톡으로 하소연했더니 "원래 3년 차쯤 다 그래, 도파민 떨어지는 거야"라는 답이 왔다. 인류학자 헬렌 피셔가 fMRI로 찍어본 결과 초기 연애의 강렬한 감정은 뇌의 보상 회로, 그러니까 중독 반응과 비슷한 부위를 자극하고 이게 대체로 시간이 지나며 가라앉는다고 한 게 바로 이 얘기다(《Why We Love》, 2004). 근데 그 설명을 들어도 마음이 편해지진 않았다. 도파민이 줄었다는 게 위로가 되나. 오히려 더 허무했다. 그럼 우리가 그때 느낀 건 진짜가 아니라 그냥 화학반응이었나. 🎭 니체라면 이 질문 자체가 틀렸다고 했을 것 같다 그 무렵 다시 펼친 책이 니체의 《즐거운 학문》이었다. 341번 잠언, 영원회귀 얘기가 나오는 부분. 어느 날 악마가 찾아와서 묻는다. 너는 지금 사는 삶을, 이 순간까지 포함해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무한히 반복해서 살아야 한다면 어떻겠냐고. 그 질문 앞에서 짓눌릴지, 아니면 "이보다 신성한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답할지, 그게 니체가 던진 시험이었다. 그날 밤 다시 그 순간을 떠올려봤다. 문자 보고 무덤덤하게 "응" 하고 넘어갔던 그 장면. 만약 그 순간이 앞으로 영원히 반복된다면, 나는 그걸 견딜 수 있을까. 이상하게도 답은 "그렇다"였다. 설렘이 없다는 것과 그 순간이 견딜 수 없다는...

💔 사랑의 항상성: 권태와 재생 사이, 관계는 왜 제자리로 돌아올까

🌙 화요일 밤, "알겠어" 세 글자 작년 11월 둘째 주 화요일, 밤 11시였다. "오늘 좀 늦게 끝나서 미안, 낼 보자"라고 쓰다가 세 번을 지웠다. 결국 보낸 건 "알겠어" 딱 세 글자였다. 3년을 만난 사람한테 보낼 문장은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일주일 동안 우리는 필요한 말만 했다. 저녁을 먹자고 하면 "그래", 영화를 보자고 하면 "아무거나". 딱 그 정도의 온도. 그리고 12월이 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왔다. 누가 먼저 사과한 것도, 대단한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다. 그냥 시간이 지나니 다시 서로에게 농담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그때 궁금해졌다. 관계가 흔들렸다가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이 과정에 이름이 있을까. 찾아보니 있었다. 항상성, 원래는 체온이나 혈당처럼 신체가 일정 범위를 벗어나면 스스로 되돌리는 생리 작용을 가리키는 말이다. 🧪 관계에도 설정값이 있다는 연구 이게 그냥 비유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심리학자 필립 브릭먼과 도널드 캠벨의 1971년 논문 「쾌락적 상대주의와 좋은 사회의 계획」을 읽고 나서다. 두 사람은 로또 당첨자와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사람들의 행복도를 추적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양쪽 다 사건 이전의 행복 수준 근처로 돌아왔다. 이른바 쾌락 적응, 혹은 쾌락의 트레드밀이라 불리는 현상이다. 존 가트맨의 부부관계 연구소에서도 비슷한 걸 관찰했다. 안정적인 커플일수록 싸운 뒤 원래의 상호작용 패턴, 즉 각자의 '설정값'으로 돌아오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설정값 자체가 관계마다 다르고, 한번 크게 흔들리면 새로운 설정값에 정착해버리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항상성은 관계가 저절로 좋아진다는 보장이 아니라, 그 관계가 지금 어떤 자리로 돌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신호에 가깝다. 💧 갈애, 원래대로 돌아갈 곳이 없던 시절 이 항상성이 처음부터 있는 건 아니다. 연애 초반...

🏺 다섯 번 싸우고 아홉 번 물레 돌린 뒤 깨달은 권태기의 변증법적 해석과 관계의 다음 단계

🏺 화요일 저녁 7시반, 도자기 물레 앞에서 든 생각 지난주 화요일도 어김없이 공방에 갔다. 아홉 번째 수업이었다. 6월 초에 시작했으니까 딱 두 달 반, 매주 화요일 7시 반, 회당 4만 5천원. 처음엔 그냥 손으로 뭔가 만드는 게 좋아서 갔는데 요즘은 좀 다른 이유로 간다. 그 시간만큼은 아무도 나한테 연락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다. 물레를 돌리다가 흙이 자꾸 한쪽으로 쏠렸다. 선생님이 "힘을 균등하게 주셔야 돼요, 한쪽만 세게 누르면 무너져요" 하시는데 갑자기 남자친구 생각이 났다. 우리 얘기 같아서. 사귄 지 1년 7개월. 지난해 10월 둘째 주부터였던 것 같다, 뭔가 달라졌다고 느낀 게. 그날 그 사람 생일이었는데 저녁 약속을 두 번이나 미뤘다. 회사 일 때문이라고 했고 나도 이해했는데, 그 뒤로 11월부터 1월까지 석 달 동안 같은 얘기로 다섯 번을 싸웠다. 연락이 뜸하다, 데이트 계획을 나만 짠다, 뭐 그런 거. 다섯 번이라고 정확히 세는 내가 웃기긴 한데 셌다. 메모장에. 🧠 헤겔을 갖다 붙이기 전에 그냥 지겨웠다는 얘기부터 권태기 변증법적 해석 을 얘기할 때 사람들은 꼭 헤겔의 정반합을 갖다 쓴다. 사랑이라는 정(正)이 있고, 권태라는 반(反)이 있고, 그걸 통과하면 더 성숙한 관계라는 합(合)이 온다고. 지양(止揚), 아우프헤벤(Aufhebung), 버리면서 동시에 끌어안는다는 그 말. 근데 솔직히 이 도식이 좀 의심스럽다. 내가 겪은 다섯 번의 싸움 중에 세 번은 그냥 똑같은 싸움의 재방송이었기 때문이다. 뭔가 지양된 게 없었다. 화해하고 이틀 지나면 또 그 사람은 연락이 뜸해졌고 나는 또 서운해했다.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변증법이 아니라 그냥 같은 자리를 도는 원이었다. 그래도 딱 하나, 지양이라고 부를 만한 순간이 있긴 했다. 1월 말 네 번째 다툼 끝나고, 내가 처음으로 "연락 횟수" 얘기를 안 하고 "나는 확인받고 싶은 게 아니라 네가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실감이 필요한 거...

🔥 3년 사귄 애인과의 권태기, 실은 사랑이 식은 게 아니라 니체의 르상티망(원한)이 쌓인 거였다

🍜 3년 사귄 애인이 밥 먹는 소리마저 거슬리기 시작했을 때 작년 이맘때쯤이었나. 3년을 만난 사람이랑 밥을 먹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국물 마시는 소리가 너무 거슬리는 거다. 예전엔 귀엽다고 생각했던 습관들이 어느 순간부터 하나씩 신경을 긁기 시작했다. "우리 권태기인가 봐" 하고 넘어갔는데, 곱씹어보니 이상했다. 그 사람이 변한 게 아니었다. 국물 마시는 소리는 3년 내내 똑같았으니까. 변한 건 나였다. 정확히는 내 안에 뭔가가 쌓이고 있었다. 그러다 니체를 다시 읽으면서 무릎을 쳤다. 이거, 니체 르상티망 권태기 (ressentiment)이잖아. 📖 르상티망은 그냥 '원한'이 아니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말하는 르상티망은 단순히 화가 났다는 뜻이 아니다. 핵심은 행동으로 발산되지 못하고 안으로 쌓이는 반응 이라는 데 있다. 그는 이걸 노예 도덕의 기원으로 설명하는데, 직접 맞서 싸울 힘이 없는 자가 상대를 '악'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자기 무력함을 정당화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이라는 거다. 유명한 비유가 있다. 니체는 르상티망에 사로잡힌 인간을 "포도에 손이 닿지 않으니 저 포도는 실 거야"라고 말하는 여우에 비유한다. 원하는 걸 가질 힘이 없으니, 원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그 대상을 깎아내리는 것. 중요한 건 이게 대상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자기 무력감의 위장이라는 점이다. 연애로 옮겨 생각해보면 소름 돋는다. 권태기의 짜증은 대개 상대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내가 이 관계 안에서 표현하지 못하고 눌러온 무언가의 축적이다. 서운했던 순간, 말하지 못한 불만, 맞춰주느라 삼킨 욕구들. 그게 국물 소리라는 만만한 대상을 찾아서 터져나온 거다. 🤔 왜 하필 상대의 사소한 습관을 미워하게 될까 니체는 르상티망의 특징으로 "반응적(reactive)"이라는 표현을 쓴다. 능동적인 힘은 스스로 원하는 걸 향해 나아가지만, 반응적인 힘은 외부 ...

🕯️ 권태기 정상화 : 사랑이 식은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박제해버린 걸 깨달은 연애 심리 이야기

🧻 11월 14일, 그가 물수건으로 테이블을 두 번 접던 순간 정확히 기억한다. 사귄 지 2년 7개월째, 그러니까 작년 11월 14일 저녁 7시 반. 을지로의 한 국숫집이었다. 그가 물수건을 펼쳐 손을 닦고 그걸 정확히 반으로, 또 반으로 접어서 테이블 구석에 올려놓았다. 처음 보는 행동이 아니었다. 첫 데이트 때도 그는 그렇게 했다. 2년 넘게 봐온 동작인데 그날따라 그게 견딜 수 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 사람,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이상한 건 새로운 걸 발견해서가 아니라 너무 익숙해서 무섭다는 감각이었다. 나는 그 순간 우리 관계가 끝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집에 와서 곱씹어보니 이상했다. 나는 뭘 잃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습관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문제는 상실이 아니라 고정 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를 '물수건을 두 번 접는 사람'으로 박제해두고, 더는 새로 보지 않고 있었다. 🔗 집착은 대상이 아니라 이미지에 들러붙는다 불교에서 고통의 원인을 설명할 때 쓰는 개념이 갈애(渴愛, taṇhā)다. 사성제의 두 번째 진리, 집제(集諦)가 말하는 게 바로 이거다.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그 대상을 붙잡아두려는 마음이 문제라는 것. 나는 이걸 오랫동안 "사람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정도로 뭉뚱그려 이해했는데, 을지로 국숫집 사건 이후로 다르게 읽히기 시작했다. 내가 붙잡고 있던 건 그 사람이 아니라 2년 전에 내가 만든 그 사람의 이미지 였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설렘이 최고조였던 그 순간의 그를 어딘가에 박제해두고, 지금 눈앞의 그를 그 박제와 계속 대조하고 있었던 거다. 무상(無常, anicca)은 세상 모든 조건 지어진 것이 변한다는 삼법인의 첫 번째 진리인데, 정작 내가 거부하고 있던 무상은 그 사람의 변화가 아니라 내 기억 속 그의 고정성 이 흔들리는 것이었다. 권태는 그가 변해서 온 게 아니라, 내가 변하지 않은 그를 계속 요구했기 때문에 온 ...

💔 연애 유통기한의 심리학 완벽 정리: 설렘이 사라진 자리, 니체와 불교로 다시 읽는 사랑의 심리

💔 답장이 "ㅇㅇ"로 줄어들던 계절 3년 4개월. 사귄 기간을 이렇게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헤어지고 나서 한동안 달력 앱을 켜고 그 숫자를 세어봤기 때문이다. 처음 만난 날 그 사람은 카페에 10분 일찍 나와 있었고, 나는 문자 하나에 심장이 내려앉아 답장을 세 번 고쳐 썼다. 그런데 2년쯤 지나자 "오늘 뭐 먹었어?"라는 내 질문에 돌아오는 답은 "ㅇㅇ" 두 글자였다. 배신감보다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질문 자체가 틀렸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사라지는 감정이 있다는 걸, 그땐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다. 🧪 숫자로 확인된 설렘의 유통기한 연애 유통기한 심리학 을 처음 숫자로 증명한 건 이 연구였다. 이탈리아 피사대학의 정신과 의사 도나텔라 마라찌티는 1999년 『Psychological Medicine』에 발표한 연구에서, 최근 6개월 이내 사랑에 빠진 사람 20명, 강박장애(OCD) 환자 20명, 일반 대조군 20명의 혈소판 세로토닌 수용체 밀도를 비교했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새로 사랑에 빠진 그룹의 세로토닌 수치는 대조군보다 유의미하게 낮았고, 오히려 강박장애 환자군과 통계적으로 구분되지 않았다. 콩깍지가 씌었다는 표현이 은유가 아니라 신경생물학적 사실에 가까웠던 셈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후속 조사다. 12~24개월 뒤 같은 사람들을 다시 측정하니, 여전히 연애 중이었던 이들의 세로토닌 수치는 정상 범위로 돌아와 있었다. 즉 설렘은 관계가 실패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 신체가 원래 그 상태를 오래 유지하도록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난다. 심리학자 도로시 테넌브가 1979년 저서 『Love and Limerence』에서 제시한 개념도 같은 결을 가리킨다. 코네티컷 브리지포트대학 심리학과 교수였던 테넌브는 상사병 같은 강렬한 몰입 상태를 '리머런스(limerence)'라 이름 붙였고, 이 상태의 평균 지속 기간을 18...

💔 짝사랑이 아플 때 니체와 부처를 소환하는 이유: 권태기가 알려주는 사랑의 철학적 의미와 태도

📱 3년 전, 답장 없는 카톡을 보다가 한 사람을 1년 넘게 혼자 좋아한 적이 있다. 매일 그 사람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확인하고, 별 뜻 없는 답장 한 줄에 하루 기분이 결정되던 시기였다. 그때 나는 이 감정이 부끄러웠다. "왜 이렇게 못 놓지, 왜 이렇게 집착하지" 하면서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러다 우연히 니체의 책과 불교 경전을 거의 동시에 붙잡고 읽었는데, 신기하게도 이 두 완전히 다른 사유 체계가 짝사랑이라는 유치해 보이는 감정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었다. 하나는 그 감정을 긍정하라 하고, 하나는 그 감정을 놓으라 한다. 이 글은 그 사이에서 내가 찾은 태도에 관한 것이다. 🧘 불교: 짝사랑의 고통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에서 온다 불교의 핵심 개념 중 하나가 무상(無常)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뜻이다. 감정도, 상대의 마음도, 나의 마음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짝사랑을 할 때 우리는 정반대의 짓을 한다. "이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형태로 감정을 고정시킨다. 초기 불교 경전인 『담마빠다』에는 "집착에서 슬픔이 생기고, 집착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집착에서 자유로운 이에게는 슬픔도 두려움도 없다"는 구절이 있다. 짝사랑의 고통을 뜯어보면 사실 상대를 향한 사랑 자체보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나의 기대와 그게 무너질 때의 낙차가 더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답장이 늦으면 불안한 것도, 그 사람의 SNS를 강박적으로 확인하는 것도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 만드는 반응이다. 불교는 이걸 없애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이것도 지나간다"는 사실을 자각하라고 한다. 그 자각만으로도 감정의 밀도가 달라진다. 🔥 니체라면: 그 마음도 힘에의 의지다, 부끄러워하지 마라 여기서 니체는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들어온다. 니체는 인간의 근원적 충동을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라고 불렀다. 이는 단순한 권력욕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확장...

🔥권태기, 견디지 말고 이용하라 — 니체와 불교가 알려주는 권태기 극복법과 사랑의 진짜 의미

🍙 삼각김밥처럼 앉아 있던 저녁 3년 사귄 사람과 마주 앉아 밥을 먹는데 문득 할 말이 없었다. 설렘은커녕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고르듯 무덤덤했다. 그날 느낀 건 슬픔이 아니라 죄책감이었다. "나 지금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건가"라는 질문이 밥그릇보다 먼저 앞에 놓였다. 그 질문에 답을 찾겠다고 몇 주를 헤맸는데, 결국 나를 건진 건 심리학 논문이 아니라 니체와 불교였다. 둘 다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권태는 사랑이 고장 났다는 신호가 아니라, 사랑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증거라고. 🔁 니체라면 이 권태를 "고장"이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 341절에서 이상한 질문을 던진다. 어느 날 악마가 찾아와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이 지루한 저녁 식사까지 포함해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영원히 반복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묻는다면. 그 순간 절규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한번!"이라고 외칠 것인가. 이 질문을 권태기 철학적 재해석 에 들이대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나는 그 삼각김밥 저녁을 다시 살라면 절규할 줄 알았는데, 곰곰이 따져보니 아니었다. 그 침묵 자체가 싫었던 게 아니라, 그 침묵을 "실패"로 해석하는 내 습관이 싫었던 거다. 니체가 힘에의 의지라고 부른 건 거창한 정복욕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을 저항 없이 긍정하고 거기서 다시 뻗어나가는 힘이다. 권태로운 저녁을 실패로 낙인찍고 도망칠 자료로 쓸지, 아니면 "이 관계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가 됐다"는 데이터로 쓸지는 순전히 내 해석의 몫이었다. ☸️ 불교는 권태를 없애라고 말하지 않는다 불교의 무상(無常)은 모든 상태가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한다는 뜻이다. 초기 경전들이 반복해서 강조하는 건 "설렘도 무상하고 권태도 무상하다"는 것이지, 설렘만 붙잡고 권태는 도려내라는 게 아니다. 고통은 대상이 변하는 데서 오는 게 ...

💔 3분 47초와 47분 사이, 짝사랑의 심장박동과 권태로운 침묵이 말해주는 사랑의 진실 이야기

📱 밤 11시 42분, "자니?"라는 문자 하나 3년 전 봄, 대학원 세미나실에서 자주 마주치던 선배가 있었다. 이름은 여기서 밝히지 않겠지만, 그가 밤 11시 42분에 보낸 "자니?"라는 문자 하나에 그날 밤 두 시간을 뜬눈으로 보냈다는 사실은 밝혀야겠다. 답장을 쓰다 지우고, 쓰다 지우고, 결국 "ㅇㅇ 왜"라고 보내기까지 11분이 걸렸다. "1"이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다시 답이 오기까지 3분 47초 — 이건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카톡 화면을 캡처해 친구에게 보여준 적이 있어서 기억한다. 그 3분 47초 동안 나는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 속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게 물리적으로 느껴졌다. 그 관계는 정확히 11주 지속됐다. 3월 둘째 주부터 5월 마지막 주까지. 지금 남자친구와는 3년째다. 지난주 화요일, 같은 동네 피자집에서 시킨 페퍼로니 피자를 먹으면서 그는 유튜브를, 나는 인스타그램을 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47분이 지났다. 불편하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 촉-수-애-취, 그 11주 동안 내 몸에서 일어난 일 불교의 십이연기에는 촉(觸)-수(受)-애(愛)-취(取)라는 연쇄가 있다. 감각기관이 대상과 접촉하고(촉), 거기서 느낌이 일어나고(수), 그 느낌이 갈애를 만들고(애), 갈애가 집착으로 굳어진다(취). 선배의 문자 알림음, 그 특정 진동 패턴이 바로 촉이었다. 진동이 울리면 0.5초 안에 손이 폰으로 갔다. 그게 그 사람 문자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이미 수가 시작됐다는 걸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문제는 갈애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사이클이 하루에 40번쯤 반복됐다는 물리적 빈도였다. 지금 남자친구의 문자에는 그런 진동 패턴이 따로 없다. 3년을 쓰다 보니 카톡 알림이 다 똑같이 울린다. 이건 내가 흔히 듣던 "안정된 사랑은 집착을 놓아버린 평정심"이라는 설명과는 다르다. 나는 집착을 놓은 게...

💕 권태기는 실패가 아니다: 니체와 붓다에게 물어본 사랑의 권태기 철학적 의미와 진짜 이유

📱 문자 보내는 속도가 달라졌다는 걸 눈치챈 밤 사귄 지 2년 반쯤 됐을 때였다. 예전엔 그이 문자가 오면 화장실에 있다가도 뛰쳐나와 확인했는데, 어느 순간 "이따 답장해야지" 하고 미뤄두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처음엔 죄책감이 들었다. 마음이 식었나, 싶어서. 그날 밤 연남동 카페에서 그이가 "따뜻한 오트밀라떼 하나요"라고 주문하는 뒷모습을 보는데도 예전 같은 심장 반응이 없었다. 근데 이상하게 불안하지 않고, 오히려 그 순간이 편안했다. 이 낙차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서 한동안 책만 붙들고 있었다. 💌 프롬이 갈라놓은 두 개의 사랑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 서문에서부터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착각 하나를 지적한다. 사랑을 '빠지는 것(falling in love)'으로만 이해하는 착각이다. 그는 이걸 사랑하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받는' 대상을 찾는 문제로 사람들이 착각한다고 썼다. 낯선 두 사람 사이의 벽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생기는 그 폭발적 친밀감 — 프롬은 이게 강렬하긴 해도 본질적으로 일시적이라고 봤다. 서로에 대해 몰랐던 것들이 익숙해지면 벽은 다시 세워지고, 그 폭발도 가라앉는다. 그가 진짜 사랑이라고 부른 건 그 다음 단계다. 원서에서 프롬은 mature love를 giving의 능력으로 정의하면서, "미성숙한 사랑은 '너를 필요로 하니까 사랑한다'고 말하고, 성숙한 사랑은 '너를 사랑하니까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는 문장을 남겼다. 설렘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건 결핍이 아니라, 매일 다시 선택하는 행위라는 뜻이다. 사랑을 감정이 아니라 기술(art)로 본 이유도 여기 있다. 기술은 연습과 인내, 훈련이 필요하고, 그건 권태로운 순간에도 계속 작동해야 한다. 😈 니체의 악마가 던진 질문을 연애에 적용하면 니체는 《즐거운 학문》 341절에서 악마 하나를 등장시킨다. 그 악마는 어느 날 밤 찾아와 이렇게...

💔 사랑의 감가상각: 마카롱 다섯 개에서 삼각김밥 두 개로, 정말 변해버린 우리 사랑의 온도차

🍪 마카롱 다섯 개와 마지막 통화 3년 전 10월, 합정동 '책방 무사' 옆 카페에서 정우를 처음 만났다. 그는 약속 시간보다 20분 늦었고, 변명 대신 종이백을 내밀었다. "여기 줄이 너무 길어서요." 종이백 안에는 마카롱 다섯 개가 들어 있었다. 피스타치오, 얼그레이, 라즈베리, 솔티드 카라멜,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보라색 하나. 나는 그 보라색을 가장 먼저 집어 먹었고, 그는 그걸 보고 "왜 하필 그거부터 먹어요?" 하고 웃었다. 별것 아닌 대화였는데 그날 집에 가는 길에 그 말을 세 번쯤 곱씹었던 기억이 난다. 지난주 화요일, 그는 회사 앞에서 나를 기다리다 편의점 봉투를 건넸다. 삼각김밥 두 개와 캔커피였다. "뭐 먹었는지 모르겠어서 그냥 이거 샀어요." 나는 고맙다고 말했고, 그는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집에 가는 길에 나는 그 말을 곱씹지 않았다. 곱씹을 말 자체가 없었다. 이 두 장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싸운 적도, 헤어질 위기를 넘긴 적도 없다. 그저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나는 이 흐름을 설명할 단어를 연애 에세이가 아니라 회계 교과서에서 빌려오기로 했다. 사랑의 감가상각 . 📉 정액법만으로는 이 마음을 다 적을 수 없어서 감가상각을 처음 연애에 가져다 붙였을 때, 나는 그게 '시간이 지나면 설렘이 줄어든다'는 뻔한 말을 어렵게 포장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정액법은 자산의 가치를 내용연수 동안 똑같은 금액만큼 매년 떨어뜨리는 방식이고, 정률법은 처음에 더 많이, 나중에 적게 떨어뜨리는 방식이다. 둘 다 우리 관계에 대입하면 그럴듯했다. 첫 만남의 흥분이 가장 크고, 그 다음부터는 일정하게든 점점 적게든 줄어드는 거라고. 그런데 회계에는 이 두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개념이 따로 있다. 손상차손이다. 자산은 보통 정해진 속도로 가치가 줄지만,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사건 때문에 장부가액이 갑자기,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떨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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