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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짝사랑 감정을 혼자서 조용히 소화하는 루틴 — 고백도 극복도 아닌 세 번째 선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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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 그 사람이 카카오톡으로 "왜요?"라고 보냈을 때 나는 그 두 글자를 다섯 번쯤 다시 읽었다. 물음표의 각도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나는 그 메시지가 가볍게 쓰인 건지 진지하게 쓰인 건지 오래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이미 그 사람의 언어 패턴을 암기하고 있었다. 문장 끝에 마침표를 쓰는 사람인지 아닌지, '네' 대신 '응'을 쓸 때의 맥락 같은 것들.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고백할 생각은 없었고, 억지로 잊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 두 선택지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고, 그 자리에서 이 글을 쓴다. --- ## 🔄 영원회귀는 위로가 아니다 니체의 영원회귀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살자'는 말로 이해했다. 틀렸다. 니체가 『즐거운 학문』 341번 잠언에서 던지는 질문은 훨씬 잔인하다. "이 순간을, 단 하나의 변경도 없이, 무한히 다시 살기를 원할 수 있는가?" 짝사랑에 이 질문을 대입하면 잔혹해진다. 그 사람이 내 메시지를 읽고 세 시간 뒤에야 답장하던 저녁을, 그 사람이 다른 사람 이름을 자연스럽게 언급하던 순간의 위장 속 감각을, 나 혼자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그 식어드는 느낌을 — 무한히 반복하기를 원할 수 있는가? 원한다고 대답하기가 두려웠다. 니체에 따르면 그 두려움이 신호다. 나는 그 감정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영원회귀는 위로를 주지 않는다. 다만 도주의 위장을 벗겨낼 뿐이다. '성숙하게 극복하겠다'는 말이 실은 도주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는 것. 감정을 긍정하라는 게 아니다. 긍정할 수 없다면 그 이유를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 ## 🔍 집착의 실체를 추적했다 불교의 우빠다나(upādāna), 번역하면 '취함' 혹은 '집착'은 단순히 무언가를 원하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이미지나 서사에 달라붙는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