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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명 중 셋, 감옥에서 쓴 보에티우스 철학의 위안이 내게 남긴 정답 아닌 질문하는 습관

💸 92명 중 셋, 그리고 통장을 세 번 확인한 밤 작년 3월, 다니던 핀테크 스타트업이 결제 사업부를 접었다. 전체 인원 92명 중 우리 팀 8명에서 나를 포함해 셋이 그 주에 나갔다. 실업급여 수급률이 전년 대비 3.8%에서 7.2%로 뛰었다는 기사를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읽었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통장 잔액은 40만원 남짓이었고, 그걸 세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이미 아는 숫자인데도. 그 무렵 서점에서 아무 생각 없이 집어든 책이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 이었다. 사형 선고를 기다리며 감옥에서 쓴 책이라는 소개 문구에 혹해서 샀는데, 정작 내가 걸려 넘어진 건 사형이 아니라 다른 대목이었다. "신은 내가 앞으로 뭘 할지 이미 알고 있는데, 그럼 나한테 진짜 선택권이 있는 건가?"라는, 되게 오래된 질문. 📚 사실 이건 새로운 답이 아니다 먼저 하나 정직하게 짚고 가야겠다. 보에티우스가 5권에서 내놓는 해법 — 신의 예지가 인간 행위의 원인이 아니다 — 은 지금 철학과나 종교학과 개론 수업에 가면 반드시 나오는 표준 답안이다. 양립가능론(compatibilism)이라는 이름까지 붙어 있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이 책에서 뭔가 감춰진 통찰을 발굴해낸 게 아니라, 1500년 동안 이미 다들 알고 있던 답을 뒤늦게 읽은 거다. 그런데 표준 해법이라고 해서 그 안의 논증까지 이해했다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나도 처음엔 "예지는 그냥 지켜보는 거고, 원인은 아니지"라는 문장만 붙잡고 안다고 생각했는데, 보에티우스가 실제로 하는 작업은 그보다 훨씬 정교하다. 🔍 조건적 필연과 단순 필연 5권에서 그가 쓰는 구분은 '조건적 필연'과 '단순 필연'이다. 예를 들어 내가 창밖을 보다가 누가 걸어가는 걸 목격했다고 치자. "내가 그를 걷는 모습으로 봤다면, 그는 그 순간 걷고 있는 게 필연적으로 맞다." 이건 조건적 필연이다. 내 관찰이 참이려면 그 사실도 참이어야 하...

🌀 아포리아: 막혔다는 것, 그게 사실은 시작이었다 — 소크라테스와 메논이 만든 철학적 막힘

📞 전화를 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몇 년 전 가을,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우리는 오 년 넘게 만나지 않았고, 마지막 만남은 좋지 않게 끝났다.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하기를 반복했다. 전화를 걸면 부담을 주는 것 같았고, 걸지 않으면 외면하는 것 같았다. 두 선택 모두 틀린 것처럼 느껴지는 그 자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막혔다'는 감각을 몸으로 알았다. 철학에서는 이 상태를 아포리아 (aporia)라고 부른다. 그리스어 어원을 풀면 a(없음) + poros(길)이다. 길이 없는 상태.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모르겠다'는 것과 다르다. 아포리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더 깊이 막히는 특수한 막힘이다. 두 방향 모두 나름의 논리를 갖고 있어서, 그 논리들이 서로를 취소시킨다. ⚡ 납작가오리의 마비 플라톤의 『메논』에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덕(virtue)이 무엇인지 묻던 메논이, 소크라테스의 거듭된 질문에 몇 번 답하다가 결국 두 손을 든다. "소크라테스, 당신은 마치 납작가오리 같아요. 전기가오리처럼 접촉하는 사람을 마비시키잖아요." (『메논』 80a) 메논은 항의하는 척하면서 사실 항복하고 있다. 덕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확신했는데, 소크라테스와 이야기하다 보니 그 확신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메논이 말하는 '마비'가 바로 아포리아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 자신도 당신을 마비시키면서 동시에 마비되어 있다오"라고 말하며, 마비를 실패가 아닌 진지한 탐구의 표시로 읽는다. 『메논』의 또 다른 유명한 역설이 이 장면 바로 다음에 등장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탐구할 수 있는가? 만약 안다면 탐구할 필요가 없고, 모른다면 탐구할 수도 없다." (80d–e) 막혔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탐구의 조건 자체가 흔들린다. 이것이 메논의 역설이고, 소크라테스...

💀 스토아 철학자들은 왜 매일 아침 죽음을 상상했을까

새벽 3시, 나는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2년 전 가을이었다. 회사 프로젝트가 삐걱거렸고, 통장 잔고는 바닥을 향했고, 부모님은 조용히 나이를 먹고 있었다. 뇌는 쉬지 않았다. '만약 이게 다 무너지면?' 이라는 질문이 4초 간격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몰랐다. 이 불안이 2000년 전 로마의 철학자들이 정확히 겨냥했던 문제라는 걸. 그리고 그들의 처방이 '긍정적으로 생각해'나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해' 같은 말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는 걸. 🌅 스토아 철학자들의 이상한 아침 루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였다. 로마 제국 전체가 그의 손에 있었다. 그런데 그는 매일 아침 자신의 죽음을 상상했다. 가족을 잃는 장면을, 권력이 사라지는 장면을, 자기 자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이걸 *프레메디타티오 말로룸(premeditatio malorum)*, '나쁜 일의 미리 떠올림'이라고 한다. 세네카는 루킬리우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Omnia, Lucili, aliena sunt, tempus tantum nostrum est." — "루킬리우스여,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오직 시간만이 우리 것이다."(*Epistulae Morales*, Ep. 1.3) 그가 이 문장을 쓴 건 허무주의 때문이 아니었다. 반대로, 그것이 '우리 것이 아님'을 매일 확인해야만, 지금 가진 것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에픽테토스는 더 직접적이었다. 그는 세상을 딱 두 칸으로 나눴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eph' hemin*)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ouk eph' hemin*). 내 판단, 내 의지, 내 반응은 전자다. 날씨, 타인의 평가, 내 수명은 후자다. 죽음 철학 스토아 에서 죽음을 매일 상상하는 건 이 경계를 매일 다시 새기는 행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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