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이 회의주의인 게시물 표시

🧦 회색 양말 스물한 번, 그리고 세탁기가 알려준 흄의 인과율 회의주의와 습관에 대한 질문

## 🧦 세탁기가 고장 나던 날, 회색 양말은 없었다 대학교 3학년 2학기, 복수전공으로 듣던 통계학 202 수업. 그 학기에만 중간고사 두 번, 기말고사 한 번, 도합 세 번의 시험이 있었고 나는 세 번 다 같은 회색 양말을 신고 시험장에 들어갔다. 사실 그 습관은 1학년 때부터였다. 3년 동안 치른 크고 작은 시험 스물한 번 중에 그 양말을 신은 건 열아홉 번. 나머지 두 번은 못 신었는데, 그중 한 번이 하필 통계학 기말고사 전날이었다. 자취방 세탁기가 고장 나서 양말을 빨 수가 없었고, 나는 새로 산 검은 양말을 신고 시험장에 들어가야 했다. 결과는 B+. 평소보다 한 등급 낮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한동안 그 검은 양말을 시험 전날 절대 세탁기에 넣지 않는 규칙까지 만들었다. 말도 안 되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데이비드 흄을 다시 읽으면서, 이 양말 습관과 흄이 말한 인과율이 사실은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걸 알게 됐다. --- ## 📖 『인간 지성에 관한 탐구』 7절, 흄이 진짜로 쓴 문장 [흄의 인과율 회의주의](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흄의+인과율+회의주의)은 보통 당구공 예시로 요약되지만, 정작 그 논증이 나오는 자리는 1748년에 나온 『인간 지성에 관한 탐구』 7절, "필연적 연관의 관념에 대하여"다. 여기서 흄은 이렇게 쓴다. 우리는 원인이라 불리는 사건과 결과라 불리는 사건이 늘 붙어서 나타나는 것, 즉 "항상적 결합"만을 관찰할 뿐, 그 둘을 묶어주는 필연적인 힘 자체는 단 한 번도 감각으로 포착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5절에서 이 문제의 결론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둔다. "관습이야말로 인간 삶의 위대한 안내자다(Custom, then, is the great guide of human life)." 내일도 해가 뜰 거라는 믿음, 불을 만지면 뎄다는 확신, 심지어 회색 양말을 신어야...

🤔 모르겠다고 말할 용기 — 피론의 에포케가 정보 홍수 시대에 건네는 위로

## 📱 하루에 몇 번이나 '판단'을 강요당하는가 얼마 전 저녁, 나는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었다가 20분 만에 내려놓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어떤 정치인에 대한 입장, 특정 식품의 건강 효과, 어느 나라의 외교 전략, 요즘 뜨는 투자 종목까지 —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스스로 뭔가 판단하려 애쓰고 있었다. 피로했다. 정보를 소화한 것이 아니라 정보에 짓눌린 기분이었다. 그때 문득 학부 때 읽었던 한 이름이 떠올랐다. 피론(Pyrrho of Elis).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철학자. 그는 '아무것도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결론을 삶의 방식으로 끌어올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방식의 핵심에 [피론의 에포케(epoché)](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피론의+에포케(epoché))가 있었다. --- ## 🏛️ 피론은 왜 판단을 멈추었는가 에포케는 원래 그리스어로 '보류', '정지'를 뜻한다. 피론과 그의 후계자들이 발전시킨 고대 회의주의(Pyrrhonism)에서 에포케는 단순한 지적 겸손이 아니었다. 어떤 명제에 대해서도 동의하거나 반대하지 않는, 완전한 판단의 유보였다. 피론의 제자 티몬(Timon of Phlius)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스승은 이렇게 가르쳤다. "사물은 본질적으로 구별되거나 측량되거나 판단될 수 없다. 따라서 감각도 의견도 참이거나 거짓이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도 신뢰해서는 안 되며, 판단 없이, 기울지 않고,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들으면 허무주의처럼 들린다. 그런데 피론이 이 판단 중지를 통해 도달하고자 했던 것은 파괴가 아니라 '아타락시아(ataraxia)', 즉 마음의 평온이었다. 판단을 멈추자 불안이 사라졌다. 확신을 추구하기를 그만두자 오히려 마음이 고요해졌다는 것이다. 후대 철학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는 이를 그림자에 비유했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로스트아크] 제작 효율 최적화 위한 영지 세팅

[로스트아크] 로스트아크 생활 도구 옵션

한국 핵무장 논의와 방위산업 관련주: 핵무기 개발 과정과 유망 종목 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