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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경애의 손끝, 이제현의 붓끝 — 묘지명으로 되짚는 고려시대 여성 문인의 흔적과 생존기

🖐️ 손끝에 남은 냄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018년 겨울,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특별전을 보러 갔다. 같이 간 후배는 국문학 대학원생이었는데, 묘지명 탁본이 늘어선 진열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대뜸 이러는 거다. "이거 다 누구 아버지, 누구 아들, 누구 남편 얘기야." 유리 너머로 한자가 빼곡한 탁본을 들여다보다가,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한참 뒤에야 이해했다. 이규보 문집이 몇 권씩 남아 있고, 이제현의 시가 지금도 교과서에 실리는 동안, 같은 시대를 산 여자들의 이름은 왜 남편이나 아들의 묘지명 한 귀퉁이에서만 찾아야 하는가. 그날 이후로 이 질문을 몇 년째 붙들고 있다. 📜 염경애, 묘지명 속에 남은 다섯 글자 가장 자주 인용되는 사례가 염경애다. 12세기 중반, 남편 최루백이 세상을 떠난 아내를 위해 지은 묘지명인데, 이 자료는 김용선 선생이 고려시대 묘지명 수백 편을 모아 엮은 『고려묘지명집성』(한림대학교출판부)에 실려 있다. 이 책은 고려시대 여성 문인 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거의 반드시 거치는 기초 자료집이고, 정용숙·권순형 같은 연구자들이 여성의 실제 삶을 재구성할 때 반복해서 끌어다 쓰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정확한 한문 원문을 여기서 자신 있게 옮기진 못하겠다. 다만 연구자들이 공통으로 짚는 대목은 있다. 염경애가 글자를 알았고, 남편이 과거 공부에 매달려 있는 동안 집안 살림을 실질적으로 이끌었으며, 아이들 글공부까지 직접 챙겼다는 기록이다. 흥미로운 건 이 사실이 '특별히' 적혔다는 점이다. 묘지명이라는 장르 자체가 죽은 이의 미덕을 골라 새기는 글이니, 문식 능력이 따로 언급됐다는 건 그게 당연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뒤집어 말하면, 글을 몰랐던 훨씬 많은 여성들은 애초에 언급할 미덕 목록에 '글'이라는 항목 자체가 없었다는 뜻이다. 『고려묘지명집성』에 실린 여성 대상 묘지명 다수가 효(孝)·열(烈)·정숙(貞淑) 같은 상투적 형용사 나열에 그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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