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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르겠다고 말할 용기 — 피론의 에포케가 정보 홍수 시대에 건네는 위로

## 📱 하루에 몇 번이나 '판단'을 강요당하는가 얼마 전 저녁, 나는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었다가 20분 만에 내려놓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어떤 정치인에 대한 입장, 특정 식품의 건강 효과, 어느 나라의 외교 전략, 요즘 뜨는 투자 종목까지 —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스스로 뭔가 판단하려 애쓰고 있었다. 피로했다. 정보를 소화한 것이 아니라 정보에 짓눌린 기분이었다. 그때 문득 학부 때 읽었던 한 이름이 떠올랐다. 피론(Pyrrho of Elis).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철학자. 그는 '아무것도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결론을 삶의 방식으로 끌어올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방식의 핵심에 [피론의 에포케(epoché)](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피론의+에포케(epoché))가 있었다. --- ## 🏛️ 피론은 왜 판단을 멈추었는가 에포케는 원래 그리스어로 '보류', '정지'를 뜻한다. 피론과 그의 후계자들이 발전시킨 고대 회의주의(Pyrrhonism)에서 에포케는 단순한 지적 겸손이 아니었다. 어떤 명제에 대해서도 동의하거나 반대하지 않는, 완전한 판단의 유보였다. 피론의 제자 티몬(Timon of Phlius)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스승은 이렇게 가르쳤다. "사물은 본질적으로 구별되거나 측량되거나 판단될 수 없다. 따라서 감각도 의견도 참이거나 거짓이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도 신뢰해서는 안 되며, 판단 없이, 기울지 않고,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들으면 허무주의처럼 들린다. 그런데 피론이 이 판단 중지를 통해 도달하고자 했던 것은 파괴가 아니라 '아타락시아(ataraxia)', 즉 마음의 평온이었다. 판단을 멈추자 불안이 사라졌다. 확신을 추구하기를 그만두자 오히려 마음이 고요해졌다는 것이다. 후대 철학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는 이를 그림자에 비유했다...

🏠 두 달 만에 돌아온 내 집이 낯설었다 — 슈클롭스키 '낯설게하기'가 설명하는 인식의 철학

## 🏠 귀환의 이상함 작년 겨울, 두 달짜리 출장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이상한 감각이 왔다. 열쇠는 맞고, 고양이가 반겼고, 짐도 그대로였는데 — 어딘가 모르는 집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벽지가 이 패턴이었나. 주방 조명이 이렇게 노랬나. 욕실이 이렇게 좁았나. 나는 몇 분 동안 내 거실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이틀이 지나자 그 감각은 사라졌다. 나는 다시 무의식적으로 조명을 켜고, 냉장고를 열고, 소파에 쓰러졌다. 다시 집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집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틀 동안의 감각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철학은 종종 그런 감각에서 시작된다고들 하는데, 왜 하필 그 감각인지는 잘 설명하지 않는다. --- ## 🐴 슈클롭스키가 말을 빌린 이유 러시아 형식주의자 빅토르 슈클롭스키는 1917년 「예술, 기법으로서」에서 '낯설게하기(остранение)'를 설명하며 톨스토이의 소설 「홀스토메르」를 예로 든다. 화자가 인간이 아니라 늙은 얼룩말인 소설이다. 그 말이 '소유'라는 개념을 이해하려 애쓰는 장면이 있다. 사람들은 "내 말", "내 땅", "내 아내"라고 말하는데, 말의 눈에 이것이 이상하다. 마부는 자신을 타고, 마굿간지기는 자신을 먹이고, 주인은 어딘가에서 서류에 서명한다. 그런데 그 누구도 말 자신이 자기 다리와 맺는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말은 다리로 뛴다. 그 다리는 말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것도 실제로 '갖지' 않으면서 '내 것'이라고 말한다. 슈클롭스키는 이 장면을 통해 문학 기법을 설명하려 했지만, 이 장치가 작동하는 방식은 더 근본적이다. '내 것'이라는 말이 실은 어떤 물리적 실체도 없이 사회적 약속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 우리는 그 개념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볼 수 없게 됐고, 그것을 처음 보는 존재의 시점...

🧘 노력하지 않는 것이 집중이다 — 시몬 베유의 주의 개념

## 🌙 이상하게 잘 읽히던 밤 마감이 사흘 뒤였다. 책상에 앉아 텍스트를 세 번 읽었는데 세 번 모두 다음 줄로 넘어가는 순간 내용이 사라졌다. 눈은 활자를 따라갔지만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집중해야 한다는 의식이 오히려 페이지를 막고 있는 것 같았다. 포기하듯 그 책을 덮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아무 생각 없이 옆에 쌓인 책 더미에서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시몬 베유의 『신을 기다리며』였다. 읽겠다는 의도가 없었다. 그냥 손에 잡혀서 펼쳤다. 그런데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 경험이 한동안 머릿속에 걸렸다. 집중하려 할 때 안 되고, 포기하자마자 빨려 들어간다는 것. 단순히 긴장이 풀려서가 아닌 것 같았다. 뭔가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그 답을 베유 자신이 들고 있었다. --- ## 💪 의지와 주의는 다른 근육이다 베유는 1942년 에세이 「학업과 신의 사랑」(이후 『신을 기다리며』에 수록)에서 [시몬 베유의 '주의(attention)' 개념](https://warguss.blogspot.com/search?q=시몬+베유의+'주의(attention)'+개념)을 이렇게 정의한다. > *"L'attention consiste à suspendre sa pensée, à la laisser disponible, vide et pénétrable à l'objet."* > "주의란 자신의 사유를 멈추고, 그것을 비워두어 대상에 의해 침투될 수 있는 상태로 두는 것이다." 처음 읽으면 집중의 정의치고 이상하다. 사유를 멈추는 게 집중이라고? 우리가 집중이라 부르는 건 보통 정반대다. 이를 악물고, 의식을 한 점에 모으고, 딴생각이 끼어들면 억지로 끌어당기는 것. 베유는 그것에 이름을 붙인다 — 의지(volonté). 의지는 근육처럼 수축한다. 반면 주의는 확장하고, 열리고, 기다린다. 의지로 집중을 강제할수록 사유는 굳어지고, 대상이 아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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