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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중종: 반정으로 오른 개혁 군주의 이상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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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1대 왕 중종은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으로 즉위한 군주로, 즉위 후 **조광조** 등 신진 사림과 함께 유교적 이상 정치를 시도했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로 개혁이 좌절되었습니다. 이상을 꿈꾸었으나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결국 **우유부단한 군주**로 평가됩니다. --- ## 정사 기반: 중종반정과 개혁의 시작 1506년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신하들의 쿠데타(**중종반정**)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진성대군(중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중종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공신들에 의해 옹립된 터라 초반부터 훈구 공신들의 눈치를 보며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위 후 중종은 연산군 시절 문란해진 국정을 바로잡고자 폐지된 법령과 제도를 복구하고, 홍문관을 부활시켰습니다. 그러나 훈구 세력의 막강한 힘 앞에서 중종의 개혁 의지는 번번이 꺾이고 말았습니다. 공신들의 전횡을 억누르려 했으나 끝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입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중종은 한때 축출됐던 **사림파** 인재들을 등용하며 훈구파에 맞서 세력 균형을 꾀했습니다. **조광조**와 함께 **현량과** 실시 등 유교 개혁정치를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훈구파의 거센 반발과 중종의 미온한 태도로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며 모든 개혁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 ## 야사와 일화: 폐비 신씨와 중종의 궁중 이야기 **폐비 신씨 사건**은 중종반정의 뒷이야기로 유명합니다. 중종의 초대 왕비였던 단경왕후 신씨는 아버지 신수근이 반정에 반대하다 주살당한 탓에 '역적의 딸'로 몰려 반정 공신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결국 중종은 왕이 된 지 7일 만에 사랑하는 아내를 폐위시켜야 했습니다. 신씨는 궁 밖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으며, 훗날 영조 때 뒤늦게 복권되었습니다. 일주일 만에 폐위된 이 왕비의 사연은 후대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궁중 암투를 보여주는 **주초위왕 사건**도 중종 시대에 빼놓을 수 없습니다. 훈구 대신들은 중종의...
👑🗡️ 조선 제10대 임금 연산군 – 폭군의 삶과 인간적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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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연산군(燕山君)은 초기에는 개혁을 시도했으나 곧 폭군으로 돌변하여 조선 역사에 악명을 남긴 왕입니다. ** 즉위 후 국방과 행정 개혁에 힘썼지만, 어머니 폐비 윤씨 사건을 계기로 사대부를 숙청하고 향락과 폭정에 빠졌습니다. 결국 그의 잔혹한 정치 행태는 **중종반정**으로 이어져 왕위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 ## 즉위와 초반 개혁 시도 연산군(본명 이융, 1476\~1506)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의 아들이자 10대 임금입니다. 그는 1494년 아버지 성종의 승하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즉위 당시 나이는 19세로, 어린 왕이었지만 학문적 소양을 쌓은 **세자** 출신으로서 기대를 받았습니다. 초기 연산군은 **선왕의 유훈**을 이어받아 정치를 안정시키고자 노력했고, 당시 백성의 삶을 어루만지는 시책을 펴는 듯했습니다. 즉위 초반, 연산군은 **국방 강화를 위한 개혁**을 시행했습니다. 왜구(왜인)와 여진(야인)의 침입에 대비하여 **평안도와 함경도**의 북방 방비를 강화하고, 국경 지역 성곽을 수리하며 변경 지역 이주를 장려했습니다. 그는 **비융사(備戎司)**라는 군사 기구를 설치해 무기를 개량하고 상설 군사 회의를 주재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후일 비변사의 전신이 될 정도로 선구적인 국방 개혁이었습니다. 또한 연산군은 젊은 시절 가르침을 주었던 **정여창, 허침 등 스승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즉위 초기에 경연(임금과 신하들의 학술 토론 모임)에 부지런히 참석했습니다. 성종 대부터 편찬 중이던 《국조보감》과 《여지승람》 같은 역사서와 지리지의 증보 작업도 지속하게 하며, 학문 사업에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 ## 폭정의 서막: 무오사화와 억압 정치 그러나 연산군의 치세는 곧 어두운 전환점을 맞습니다. 즉위 4년째인 **1498년(연산군 4년)**, 조선 역사에 첫 사화(士禍)로 기록된 **무오사화**가 일어납니다. 이는 성종실록 편찬 과정에서 젊은 사관 김일손이 남긴 글이 문제시된 사건입니다. 김일손이 기록한 고...
👑 조선 9대 임금 성종 – 통치 체제를 완성하고 문화의 꽃을 피운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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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成宗, 1457\~1494)**은 조선의 제9대 왕으로, 13세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조선의 통치 법제를 완비하고 **문화의 황금기**를 연 인물이다. 그는 법률 정비와 유교 문화 진흥에 크게 기여했으며, 한편으로 궁중에서는 폐비 윤씨 사건과 같은 비극적 일화가 있었다. 성종의 치세는 유교 이념에 입각한 **왕도 정치**의 구현으로 평가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아들 연산군의 폭정으로 이어지는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 ## 즉위와 정치 개혁 성종은 세조의 손자로 태어나, 숙부 예종이 갑작스레 붕어한 후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예종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었지만 불과 3살에 지나지 않았고, 성종의 친형 월산군은 병약하여 왕위 계승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할머니 **정희왕후**(세조 비)의 결정과 **한명회**·**신숙주** 등 공신들의 추대로 서열을 뛰어넘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 과정에는 어린 왕을 앞세워 외척과 대신들이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즉위 초기 성종은 7년간 이어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아래에서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가, 1476년 친정(親政)을 시작하면서 적극적인 개혁 정치를 펼쳤다. 그는 먼저 왕권 강화를 위해 국정 자문기구였던 원상제를 폐지하고, **임사홍**·**유자광** 등 부패하거나 권세가 강했던 훈구 대신들을 과감히 축출하였다. 동시에 세조·예종 시대에 위축되었던 **사림파**(신진 유학자 관료들)를 대거 등용하여, 기존 공신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하고 새롭게 권력 균형을 이루었다. 이러한 인재 등용으로 성종은 조정에 활력을 불어넣고 유교적 **왕도 정치**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성종은 백성을 위한 정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세조 때 실시된 직전법 이후 일부 관리들의 토지 겸병과 농민 수탈이 문제가 되자, **1470년 관수관급제**를 도입하여 국가가 조세를 직접 거두어 관리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도록 개혁하였다. 이를 통해 토지의 사적 세습에 ...
👑 조선 8대 임금 예종: 정사(正史)와 야사(野史)가 전하는 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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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종은 조선의 제8대 임금으로, 짧은 재위 기간에도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군주입니다. 법과 질서를 바로잡고 경국대전 편찬을 추진했으며, 동시에 인간적인 일화와 야사로도 전해지는 복합적인 인물입니다. 짧지만 굵게 스쳐 간 그의 통치는 조선 중기의 흐름을 결정지은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 --- ## 즉위 배경과 짧은 치세 예종(睿宗)은 조선 왕조의 제8대 임금으로, 재위 기간이 약 14개월에 불과했던 단명한 군주입니다. 짧은 치세 탓에 역사에서 비교적 **존재감이 적은 왕**으로 여겨지지만, 나이는 젊어도 통치는 매우 엄격했다고 전해집니다. 1468년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그는 병약하여 친정(親政)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고, 어머니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맡았습니다. 즉위 후 **불과 한 달 만에 남이 장군을 처형**하는 등 극적인 사건들이 벌어졌고, 결국 재위 1년 남짓만에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조카인 성종이 왕위를 잇는 파란을 남겼습니다. 짧지만 **파란만장했던 예종의 삶**은 정사와 야사를 통해 오늘날까지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종의 왕위 계승은 원래 예정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형인 의경세자(훗날 덕종)가 있던 탓에 왕위와 거리가 멀었지요. 그러나 1457년 형 의경세자가 20세의 젊은 나이에 급서(急逝)하면서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8살 어린 나이에 **새 왕세자로 책봉된 예종**은 아버지 세조의 각별한 관심 속에 학문과 무예 수련 등 왕이 될 소양을 쌓아갔습니다. 세조는 직접 훈계 10조를 내려 **“항상 덕을 지니고 부모를 공경하며, 사치하지 말고, 학문과 무예를 익혀라”**라고 가르쳤고, 예종은 이를 마음에 새겼다고 합니다. 이러한 가르침 덕분인지 예종은 효심이 지극하고 학문에도 힘써, 세자로서 차근차근 준비를 갖추어 나갔습니다. 1468년, 세조가 병으로 쓰러지자 어린 세자였던 예종은 국사를 대신 처리하며 아버지 곁을 밤낮으로 지켰습니다. 세조는 자신의 임종을 ...
⚔️ 조선 7대 임금 세조 – 왕위 찬탈부터 불교 부흥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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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일곱 번째 왕 세조(世祖, 1417~1468)는 왕좌를 둘러싼 피의 역사로 악명 높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법전 편찬과 불교 부흥 등의 업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종의 동생인 그는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였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충신들을 처형하여“피의 군주”로 불립니다. 그러나 집권 후에는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경국대전 편찬을 시작하는 등 왕권 강화와 국가 안정에 힘썼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세조의 생애는 왕위 찬탈과 단종 폐위, 집권 이후의 공과(功過), 그리고 말년에 겪은 기이한 사건들과 전설까지 정사(正史)와 야사(野史)가 교차하며 전해집니다. ``` *1935년에 그려진 **세조 어진 초본**. 원본 세조 어진은 소실되었고 이 초상이 현재 세조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 ## 계유정난 – 피로 물든 왕위 찬탈 1453년 (단종 1년) 음력 10월, 세조는 당시 수양대군으로서 정변을 일으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합니다. 역사에 **“계유정난”**으로 기록된 이 쿠데타에서 그는 어린 조카 단종을 보좌하던 김종서, 황보인 등의 고관과 심지어 친동생인 안평대군까지 제거하여 권력을 빼앗았습니다. 이후 수양대군은 어린 왕을 꼭두각시로 세운 채 국정을 마음대로 주무르다가, 1455년 마침내 단종을 강압하여 양위받음으로써 직접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처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좌를 찬탈**한 세조는 정통성이 약할 수밖에 없었고, 조선 왕조 역사에서 큰 오점을 남긴 인물로 평가됩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충격을 받은 신하들과 백성들의 반발도 극심했습니다. 1456년에는 성삼문, 박팽년 등 단종의 충신들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유명한 **사육신(死六臣)**입니다. 세조는 이 거사 이후 어린 전 왕의 생존 자체가 반란의 빌미가 될 것을 우려하여, 끝내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키고 이듬해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습니다. 조정의 많은 인물들이 ...
👑 조선 제5대 왕 문종: 짧은 재위에 담긴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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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종(文宗, 1414~1452)은 조선의 위대한 성군 세종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향(李珦)이며 일찍이 7세 때 왕세자에 책봉되어 무려 30년간 세자로서 지낸 인물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학문을 즐기고 성품이 관대하여 누구에게나 칭송받았다고 한다.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에도 어린 세자가 의젓한 태도로 임하여 사신과 대신들을 감탄시켰다는 기록이 전해지며, 형제들과 우애도 두터웠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효심이 깊어 아버지 세종이 병석에 누우면 식음을 전폐하고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였다고 하니, 문종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 ## 즉위 이전: 준비된 왕세자의 긴 세월 왕세자 시절 문종은 학문뿐 아니라 과학과 병법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를 고안해냈을 정도로 천문과 산술 방면에 능통했다고 한다. 측우기는 훗날 세종 대에 장영실 등에 의해 제작되어 오늘날에도 전해지는 발명품으로, 문종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또한 문종은 **화차(火車)** 개발에도 관여하였는데, 화차란 여러 개의 신기전 화살을 한꺼번에 발사할 수 있는 15세기식 다연발 로켓포였다. 세종 후반에 만들었던 화차를 문종이 즉위 전후 새로 개량하여 실전 배치하였고, 한 번에 수십,수백 발의 화살을 쏘아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관심은 모두 어린 시절부터 쌓은 학구열과 국방 의식의 반영으로, 문종은 세자로 있으면서도 학자들과 교류하며 역사서와 병법서 편찬에도 힘썼다. 실제로 문종은 세자 시절에 **병법 교본**인 《진법》 편찬을 주도할 만큼 국방에 관심이 많았고, 고려,조선 초기의 전쟁사를 정리한 《동국병감》 편찬 사업도 이끌었다. 이러한 준비된 세자였기에 세종 말년에 8년간 **대리청정**(세자가 국정을 대신 돌봄)을 맡아 국사를 처리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눈병 등 지병으로 말년에 국정 수행이 어려워지자 첨사원이라는 기구를 두어 세자가 정사를 대행하게 했는데, 이는 적장자인 문종에게 미리 통...
👑📜 세종대왕 | 백성을 사랑한 성군의 삶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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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광장에 자리한 세종대왕 동상. 세종은 조선 제4대 왕으로, 한글 창제와 다양한 개혁으로 존경받는 성군이다.* ``` 조선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임금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세종대왕**입니다. 세종은 백성을 사랑한 마음으로 정치와 문화를 꽃피웠고, 훗날 국민들은 그의 이름에 **‘대왕’**이라는 칭호를 붙여 부르게 되었죠. 본 글에서는 **정사(正史)**에 기록된 세종의 즉위 과정과 주요 업적을 살펴보고, 역사 속에 전해 내려오는 **야사(野史)**와 일화를 곁들여 세종대왕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교과서 속 임금이 아닌, 한 사람의 리더로서 세종의 고민과 철학, 그리고 흥미로운 뒷이야기들을 함께 알아보시죠. ``` ## 📖 왕위에 오르기까지 – 총명한 왕자의 성장과 즉위 세종대왕의 본명은 **이도(李祹)**로, 1397년(태조 6년)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이름은 *막동*이었는데, 그만큼 사랑스럽게 자랐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매우 좋아했던 이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에 몰두했는데, 그 열정이 지나쳐 눈병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아버지 태종은 어린 아들의 건강이 염려되어 한때 책을 모두 치워버리게 했지만, **충녕군 이도(세종)**는 몰래 병풍 뒤에 숨겨둔 책을 찾아내 여러 번 읽었다는 일화가 전합니다. 이처럼 학구열이 남달랐던 세종은 지식과 학문의 가치를 깊이 새기며 성장했지요. 왕위 계승자로서 세종이 주목받게 된 데에는 **형인 양녕대군의 태도**도 한몫했습니다. 원래 왕세자였던 큰형 **양녕대군**은 사냥과 놀이를 즐기는 자유분방한 성격이었고, 나이가 들수록 여러 행동으로 **태종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 잦았습니다. 충녕군 이도는 형의 잘못을 보면 직언으로 충고하기도 했는데, 이를 두고 두 형제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결정적으로 1418년, 태종은 끝내 **양녕대군을 세자 자리에서 폐위**하...
🐉태종 이방원: 조선의 기틀을 세운 냉철한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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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세 번째 왕인 **태종(太宗, 1367~1422)**은 조선 초기 왕권을 확립한 냉철한 정치가였다. 이름은 **이방원(李芳遠)**으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자 신의왕후 한씨 소생이다. 그는 정치적 판단력과 단호한 결단력으로 혼란스러운 조선 초기의 국정을 안정시키고 왕권 강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의 냉혹한 면모로 인해 역사 속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 --- ## 📜 정사(正史): 강력한 왕권을 세운 정치가, 태종 ### ⚔️ 권력의 중심에 선 왕자 이방원은 젊었을 때부터 뛰어난 판단력과 강력한 리더십을 가졌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계비 강씨 소생 막내 이방석을 세자로 삼자 불만을 품었고, 1392년 조선 건국 후 정치적으로 배제당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1398년 결국 쿠데타(제1차 왕자의 난)를 일으켰다. 이 난을 통해 세자 이방석과 정치적 라이벌이던 정도전 등을 제거하며 권력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방원은 곧장 왕위를 차지하지 않고 형인 정종을 즉위시켰다. 이는 정치적 혼란을 최소화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 🏹 제2차 왕자의 난과 즉위 1400년, 이방원의 또 다른 형인 이방간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방원은 이를 진압하며 사실상 실권을 완벽히 장악했다. 이에 정종은 더 이상의 혼란을 피하고자 이방원에게 왕위를 넘겼다. 1400년 마침내 이방원은 조선의 제3대 임금으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태종이다. ### 📖 왕권 강화와 국가체제 확립 태종은 즉위 후 강력한 왕권 확립을 위해 가장 먼저 사병(私兵)을 혁파했다. 왕족과 공신들이 거느린 사병은 조선 초기 혼란의 주요 원인이었기에 이를 철저히 금지했다. 또한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도입하여 행정 체계를 정비하고 왕권 중심의 통치 구조를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호구 조사와 토지 조사를 실시하여 세금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백성들의 인구수와 재산을 파악하여 국가 재정을 확립했다. 이는 훗날 ...
👑 정종(定宗): 권력을 멀리한 비운의 두 번째 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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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두 번째 왕, **정종(定宗, 1357\~1419)**은 역사 속에서 주목받지 못한 임금 중 한 명이다. 이름은 **이방과(李芳果)**로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이며, 초대왕 태조의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이다. 그는 형제간 권력 다툼 속에서 왕위에 올랐지만 실제 권력은 행사하지 못하고 결국 2년 만에 왕위를 동생 태종에게 넘겼다. 정종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고, 그는 왜 조용히 왕위를 물려주었을까? ``` --- ## 📖 정사(正史): 혼돈 속에 떠밀려 왕이 된 이방과 ### 👑 예상치 못한 왕좌의 주인 태조 이성계는 조선 개국 이후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막내 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정했다. 이는 첫 번째 부인의 소생들인 왕자들에게 큰 불만과 반발을 가져왔다. 결국, 1398년 다섯째 왕자인 **이방원(태종)**은 쿠데타(제1차 왕자의 난)를 일으켜 세자 이방석과 태조의 측근 정도전을 살해하고 권력을 잡았다. 태조는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아 왕위를 스스로 내려놓았다. 그러나 이방원은 곧장 왕위에 오르는 대신 정치적 부담을 고려해 형인 이방과를 왕위에 앉혔다. 이때 이방과는 42세로, 전혀 뜻하지 않게 왕이 되었다. ### 🏰 한양에서 개경으로 수도 이전 정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혼란스러운 정치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수도를 다시 **한양에서 개경으로** 돌렸다. 한양은 조선의 새 수도로 결정되었으나 정치적 혼란이 극심하여 다시 고려의 옛 수도였던 개경(현 개성)으로 돌아간 것이다. 정종의 이 결정은 안정을 위한 시도였지만, 결국 혼란은 오히려 가중되었다. ### ⚔️ 지속된 왕실 갈등과 2차 왕자의 난 정종의 재위 기간에도 왕실 갈등은 계속되었다. 특히 1400년, 이방원을 견제하던 넷째 왕자 **이방간**은 정변(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패배했다. 이방원이 이 난을 진압하며 사실상 왕권을 확고히 했다. 정종은 이 사건 이후 정치적 현실을 받아들이고 왕위를 이방원에게 물려주었다. 재위 기간은...
🔖태조 이성계: 고려의 장군에서 조선의 국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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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는 고려 왕조 말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왕조 **조선**을 연 인물입니다. 그는 무장(武將)으로서 홍건적과 왜구 격퇴에 큰 공을 세워 명성을 얻었고, 1392년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고려의 마지막 왕을 몰아낸 뒤 조선 왕조의 초대 임금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재위 7년 동안 왕위에 있다가, 왕자의 난으로 인해 아들에게 양위하며 물러났습니다. --- ## 고려 말의 영웅, 이성계 이성계는 1335년 (고려 충숙왕 4년) 북방의 화령부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에 재능이 뛰어났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많은 **설화**도 전해집니다. 예컨대 왜구를 토벌하던 전투에서 **달이 산 너머로 지려 하자, 이성계가 달을 붙잡아 끌어올려 대승을 거두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곳 지명이 지금도 ‘인월(引月)’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성계의 화살에 맞은 왜구장수 **아지발도**의 피가 바위를 붉게 물들여 그 바위를 ‘피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처럼 **뛰어난 무예와 용맹**으로 고려를 여러 차례 외적의 위협에서 구한 덕에, 이성계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공민왕 때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북쪽 영토 수복에 공을 세우고, 이성계 본인도 **홍건적의 난**과 왜구 침입을 막아내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1380년 **황산 대첩**에서 왜구 세력을 크게 격파하면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후 최영 장군과 함께 요동 정벌에도 참여하는 등 고려 말 새로이 부상한 신흥 무인 세력의 중심으로 성장합니다. 이러한 활약은 그가 장차 새로운 왕조의 주인공이 될 기반을 닦아주었습니다. --- ## 위화도 회군: 새로운 시대의 서막 14세기 후반,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흥기하면서 **고려와 명의 관계가 악화**되었습니다. 명 태조 주원장은 압록강 인근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통보하며 고려 영토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습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최영 장군과 우왕(禑王)이 주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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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핵무장 논의와 방위산업 관련주: 핵무기 개발 과정과 유망 종목 분석
한국의 독자적 핵무장 논의가 주요 이슈로 떠오르며 방위산업 관련 주식들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특히, 핵무기 및 방어 관련 기술력을 보유한 기업들이 관심을 끌고 있어 투자자들에게 큰 잠재적 수혜가 예상됩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 가능성 등 외교적 변화는 이러한 방위산업 관련주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 참조: https://gussconomy.tistory.com/entry/한국-핵무장-시나리오-관련주-투자-포인트-총정리 ) --- ### 핵무기 생산과정 요약 #### **핵연료 확보** : 고농축 우라늄-235 또는 플루토늄-239와 같은 핵분열 물질을 확보하는 과정입니다. - **우라늄 농축**: 우라늄-235의 비율을 약 90% 이상으로 높이는 과정입니다. - **플루토늄 생산**: 원자로에서 우라늄-238을 중성자로 포획하여 플루토늄을 생성하고 이를 화학적으로 분리합니다. #### **폭발 장치 개발** : 확보한 핵연료를 폭발할 수 있도록 설계된 장치입니다. - **충돌 방식 (Gun-type)**: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해 두 덩어리를 빠르게 결합시켜 핵분열을 유도합니다. - **내부 압축 방식 (Implosion-type)**: 고폭압력으로 플루토늄을 압축하여 임계 질량을 초과하도록 합니다. ####. **무기화 및 배치** - 폭발 장치를 무기 형태로 조립하여 배치 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미사일, 폭격기 등에 탑재될 수 있도록 설계합니다. --- ### 핵심적인 부분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핵연료 확보**와 **폭발 장치 개발**입니다. - **핵연료 확보**: 핵분열 물질 확보가 핵무기 개발의 필수 조건입니다. 우라늄 농축과 플루토늄 생산은 고도의 기술력을 요구하며, 보안과 국제적인 감시가 강화된 부분입니다. - **폭발 장치 개발**: 핵연료가 있어도 이를 효과적으로 폭발시키는 장치가 없다면 무기화가 불가능합니다. 압축 방식 등 폭발 장치 개발 기술이 핵무기의 폭발력...
윤석열 계엄령 선포! 방산주 대폭발? 관련주 투자 전략 완벽 분석
## 1. 배경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를 이유로 계엄령을 선포하였습니다. 계엄령은 전시나 사변 등 국가의 안녕과 공공질서가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 대통령이 군사적 권한을 통해 이를 방어하고 유지하기 위해 발효하는 특별한 조치입니다. 이러한 조치는 국내 정치·경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며, 특히 주식시장에서는 관련 기업들의 주가 변동이 예상됩니다. 24.12.03 오전 5시 계엄 해제로 아래 관련주 추천 - [윤석열 계엄령 해제! 이재명 관련주 급등? 투자자 필독 전략](https://warguss.blogspot.com/2024/12/yoon-martial-law-lift-lee-jaemyung-stocks.html) --- ## 2. 기업 및 관련주 ### 2-1 식품 관련주 - 계엄령이 선포되면 사회적 불안정성이 증가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생필품 및 음식 관련 주식이 단기적으로 강세를 보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 1. CJ제일제당 (KOSPI: 097950) [시가총액: 약 10조 원] - **주요 산업**: 식품 및 생필품 제조 - **관련주 근거**: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식료품 수요가 증가하며, 즉석밥, 가공식품 등의 판매가 확대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 **주가정보**: [네이버 차트](https://finance.naver.com/item/main.nhn?code=097950) #### 2. 오뚜기 (KOSPI: 007310) [시가총액: 약 3조 원] - **주요 산업**: 식품 제조 및 유통 - **관련주 근거**: 라면, 즉석식품 등 비축 가능한 식품 수요가 증가하며, 매출 상승이 기대됩니다. - **주가정보**: [네이버 차트](https://finance.naver.com/item/main.nhn?code=007310) #### 3. 대상 (KOSPI: 001680) [시가총액: 약 2조 원] - **주요 산업**: 식품 제조 및 발효제품 - **관련주 근거**: 계엄...
[로스트아크] 제작 효율 최적화 위한 영지 세팅
### 1. 대성공 확률 증가 vs. 제작 수수료 절감 - **대성공 확률 증가**: 대성공 확률이 2% 증가해도 실제 효과는 크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기본 대성공 확률 5%에 2% 증가를 적용해도 실질적인 효과는 0.1% 증가에 불과합니다. - **제작 수수료 절감**: 제작 수수료를 2% 절감할 경우, 제작할 때마다 발생하는 골드 비용을 직접적으로 줄일 수 있어 비용 절약 효과가 훨씬 큽니다. - 결과적으로, 제작 수수료 절감이 대성공 확률 증가보다 약 10배 더 많은 이득을 제공합니다. 따라서 대성공 확률보다는 수수료 절감에 집중하는 것이 권장됩니다. --- ### 2. 효율적인 영지 세팅을 위한 이득 극대화 세팅 - 영지 내 필수 세팅 아이템으로 "곡예사의 대기실," "찬란한 소원 나무," "여신의 가호"가 추천됩니다. - **곡예사의 대기실**: 마리샵에서 블루 크리스탈로 구매할 수 있으며, 기본적인 제작 효율을 높이는 데 필수 아이템입니다. - **찬란한 소원 나무**: 수수료 절감을 제공하여 제작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어 이득 극대화에 도움이 됩니다. - **여신의 가호**: 미술품 42개를 모아 획득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제작 효율을 제공합니다. 여유가 있다면 필수로 장착하는 것이 좋습니다. - 여신의 가호 대신, **곡예사의 무기 진열대**를 구매해 사용할 수도 있으며, 경제적인 선택지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 ### 3. 의상 세팅 (선택적 적용) - 특정 의상을 착용하면 제작 효율이 약간 증가하지만, 최적의 의상 옵션은 없기 때문에 필수는 아닙니다. 크리스탈 비용이 부담스러울 경우 생략 가능하며, 다른 세팅을 우선적으로 강화하는 것이 좋습니다. - **드레스룸 이용**: 크리스탈을 사용하여 드레스룸에서 특정 NPC와의 호감도로 얻을 수 있는 의상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 **추천 의상**: 페...